[양희은의 어떤 날] 엄마 떠나시고 한달

한겨레 2024. 2. 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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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양희은 | 가수

엄마가 떠나신 지 한달 지났다. 늙은 고아라도 영락없는 고아라서 세상 울타리 없는 어린애 같아 장례식 다 마치고 돌아와 빨래 돌리고 말리고 개키면서 엄마 방에 들어가 엉엉 울고 말았다. 엄마 계신 아래층에 대고 ‘외등 켜 줘!’ ‘빨래 다 됐음 개켜주셔요.’ ‘밥솥에 밥 뒤집어주실래?’ 내 말을 받아줄 엄마가 더 이상 안 계시다는 게 믿기지 않고 단전에서부터 벌컥대고 올라오는 울음이 그칠 줄 몰랐다.

순서대로 일 다 마칠 때까지 얼떨떨했는데 집에 오니 엄마의 빈방이 믿기지 않고 미술학원 끝났으니 데리러 오랄 것만 같았다. 주변 친지들은 모녀지간은 다 그렇다며, 모시고 살았어도 못 해 드린 것만 가슴에 남았다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집에서 잘 모신 게 얼마나 큰 효도인지 충분히 잘 하셨고 엄니도 고마워 하실 거예요.” “나는 엄마가 맛없는 꿀꿀이죽 7년 동안 드신 게 목이 메요. 비참한 투병 안 당하신 게 너무 부러워요.” “난 엄마를 좋아했으면서도 5분 이상 대화 지속되면 꼭 성질 내곤 했어.” 나 역시도 집에 오면 몇마디 나누고 내 방으로 들어가 쉬기 일쑤였는데….

이상하게 12월부터 그렇게 신발 타령을 하셨다. 신지 않은 신발도 많은데 왜 그리 털신 타령인지? 동생 희경과 내가 좋은 걸로 한 켤레씩 대령했지만 디자인은 좋은데 볼이 좁고 발등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야속해 하셨다. 그 옛날 말표검정털신을 사드렸더니 쑥 들어가는 게 너무 좋다시며 신발을 방에 들인 게 수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그 밤 11시45분 집전화가 울리고 신음소리가 들려 우리 부부 1층으로 내달아가니 이미 괴로운 시간은 지난 듯 보였지만 119를 타고 가는 중간에 심정지가 왔고 심폐소생술도 소용없었다.

8년 전 연말에 엄마와 딸 셋, 유일한 손녀까지 3대가 일본 시마네현 오모리긴잔마을의 군겐도까지 갔었다. 그곳의 디자이너 마쓰바 도미의 취향과 엄마의 취미가 딱 맞아 좋아하실 것 같아서였다. 떠나기 전부터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그쪽 마을의 음습한 산기운과 추위가 몸에 안좋은가? 감기기운인가? 하며 계속 쉬셨고, 귀국길 공항 가는 택시 안에서 호흡곤란 끝에 엄마는 그만 기함을 하셨다. 구급차를 부르고 나는 “안돼, 안돼! 엄마 집에 가자, 집에 가야지!” 소리를 질렀다.

응급실 처치를 지켜보고 희경과 연말연시 일본의 기나긴 연휴를 견뎌냈다.(숙소도 없었는데 여러분들의 배려로 머물 곳이 생겼다) 희경과 나는 이튿날 아침이 두려웠다. 무사하실까? 식물인간이 되었으면 어쩌지? 이 낯선 곳에서 얼마나 더 버텨내야 할까? 의료수가는 또 얼마나 나오려나? 보험도 안될텐데? 다행히 돗토리대학 부속병원은 심장내과로 유명하다지만 그건 나중에 들었고, 운명의 이튿날 잠을 설쳐 푸석한 얼굴로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아 큰 통유리투성이의 심장내과 특수병동에서 온 몸에 줄을 붙이고 매단 엄마를 만났다. 그렇게 첫번째 심부전 발작 2주 동안 엄마는 일본 병원에서 안정을 찾고, 희경과 교대한 맏손자와 나는 매일매일 문병하며 지내다 3대가 무사귀국했다.

귀국할 당시 의사는 “만약 두번째 발작이 일어나면 그때는 연세도 있으시고, 어려울 거다”라고 말했다. 작은 도시 요나고는 공항에서 만난 복미씨 가족과 더불어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마음을 기댈 수 있었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귀한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서 호텔까지 가져다 주시고 가끔 그리운 집밥을 대접 받으며 휑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 위로와 복미씨 모친의 뛰어난 음식솜씨의 기억은 눈물겹게 겨울마다 되살아난다. 그동안 인사드리러 찾아뵙고 오가며 양가 서로 소식을 전하는 인연 깊은 사이가 되었다.

엄마가 가시고 나서야 ‘사무친다’는 말뜻을 알게 되었다. 에스엔에스(SNS)에 이런저런 사연을 올리니 “행복은 몸에 좋다. 하지만 마음에 힘을 길러주는 것은 슬픔이다” “선생님 올리시는 글, 사진 너무 가슴 아픈데… 이상하게 엄청 위로가 되어 글을 읽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서 더 귀합니다. 음악 못지 않게 최고의 작가, 또 엄마를 소재로 한 책도 하나 쓰시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같은 반응이 왔다.

“어머니 모시니? 야, 모실 사람이 있다는 게, 지켜드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으냐? 난 아무도 없어. 혼자야. 보려면 지금 봐야 돼. 지금 아니면 늦어. 나중에 또 보면 되지 하잖니? 그러다 보면 죽어. 죽더라구. 못봐. 그러니까 보구 싶을 때 봐야 돼.”

지난 여름 이장희 선배가 내게 한 말인데. 모실 사람이 떠나서 나는 이상하게 헛헛하고 여러가지가 사무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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