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스토리] 환갑 맞은 1호 목욕탕

제주방송 신동원 2024. 2. 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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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스토리'는 제주의 여러 '1호'들을 찾아서 알려드리는 연재입니다. 단순히 '최초', '최고', '최대'라는 타이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에 얽힌 역사와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대중 목욕탕인 동천탕(삼다사우나) 내부를 AI 기술을 활용해 그림 형식으로 재구성한 모습. (이미지 신동원 기자)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은 어디일까?

새해를 맞은 어느 날, 문득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남아있을까? 요금은? 바나나우유는 팔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에 한 번 제대로 알아봤습니다.

집집마다 편리한 샤워시설이 설치되고 원할 때면 언제든 온수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목욕탕을 찾는 발길은 점점 더 줄었습니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19도 결정타를 날렸다는 평가입니다. 에너지값 상승도 악재입니다.

이제는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희미해지면서 목욕탕들의 명절 특수도 예전만 못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제주엔 한 갑자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킨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주시 동문시장 입구에 있는 '삼다사우나(옛 동천탕, 이하 동천탕)'입니다.

■ 직접 목욕을 하러 가봤습니다

동천탕 입구 (사진 신동원 기자)


동천탕이 문을 연 것은 지난 1963년 9월 10일. 엄밀히 하자면 이날은 동천탕이 영업 인허가를 받은 날입니다. 지난해 말까지 제주에서 현재 영업 중이거나 폐업한 모든 목욕탕 285곳 가운데 가장 먼저 허가를 받은 곳입니다.

제주도 상수도 개발의 원년을 금산수원 개발사업의 시작점인 1953년이라고 본다면, 꽤나 이른 시기에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산수원 상수도는 제주 최초의 근대식 상수도 시설로 5만 명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루 5천톤)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사업으로, 1957년 6월 마무리됐습니다. 금산수원지와 동천탕은 도보로 10분 거리입니다.

동천탕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취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을 해결하러 지난주 일요일(1월 28일) 직접 목욕을 하러 가봤습니다.

동천탕의 첫인상은 '평범하다'였습니다.

크기는 아담했지만 61년의 세월을 간직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청결했습니다.

오래되거나 관리가 소홀한 목욕탕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물때 냄새도 없었습니다.

목욕탕에 가기 전에 막연히 떠올렸던 색이 바랜 듯한 인상을 풍길 것이란 예상은 초장부터 가볍게 빗나갔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와 조용한 내부. 탕의 배치는 효율적이었습니다.

동천탕(삼다사우나) 내부를 AI 기술을 활용해 그림 형식으로 재구성한 모습. (이미지 신동원 기자)


성인 대여섯 명이 어깨를 맞대고 앉으면 가득 찰 사이즈의 아담한 온탕과 열탕, 그리고 이 두 개의 탕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크기의 냉탕이 있었습니다.

온탕은 운용하지 않는 듯 물이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열탕이 온탕 역할을 하는지 반신욕하기 딱 좋을 정도로 미지근했습니다. 이용객들이 취향에 따라 물 온도를 조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요일 오후임에도 열탕은 육안상 맑은 수질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온탕과 냉탕 사이엔 건식 사우나가 있었습니다. 사우나 안에 온도계나 작은 모래시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닥엔 미끄럼 방지를 위한 초록색 매트가 목욕실 입구부터 온탕 등 주요 경로에 깔려 있었습니다. 특히 고령이 많이 이용하는 고객들의 안전을 위한 안배로 보였습니다.

앉아서 몸을 씻을 수 있는 수전(샤워기)은 19개, 벽에 걸려 있어 서서 몸을 씻을 수 있는 수전은 5개였습니다.

벽엔 김이 살짝 서린 흰색 아날로그 시계가 걸려 있었습니다.

요금은 대인 7,000원, 소인 4,000원. 영업시간은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남탕 기준 세신비 2만 5,000원, 이발비 1만 3,000원. 염색은 1만 2,000원.

안타깝게도 바나나우유는 팔지 않았습니다. 예전엔 판매했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서 팔리지 않아 뺐다고 합니다.

■ "동천탕 모르면 간첩이었지"

동천탕(삼다사우나) 입구 (사진 신동원 기자)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동천탕의 옛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목욕탕 사장님과 직원들은 목욕탕을 맡게 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좀 더 찾아보니 1963년 개업 이후 대표가 바뀐 횟수만 9번.

원래 이름인 '동천탕'에서 현재 이름인 '삼다사우나'로 바뀐 것이 2012년 9월 19일인데. 이즈음 목욕탕의 소유권은 네 번째 주인이었던 한 종교 법인에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 목욕탕을 지켜온 것은 창업주인 A씨였습니다. 1963년부터 2002년까지 약 40년 동안 업장을 운영해 왔습니다.

이제 믿을 건 동네 주민과 인근 시장 상인들뿐. 다행히 상인들 사이에선 동천탕은 랜드마크 급의 시설이었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동천탕과 바로 10m 거리에서 30년가량 호떡 노점상을 해온 송모씨(58).

그는 "옛날엔 목욕탕이 여기뿐이어서 (제주도)동쪽에서 이 목욕탕 모른다고 하면 간첩이었다"고 과장 섞인 농담을 던졌습니다.

송씨는 "목욕탕이 물이 좋다고 해서 함덕에서도 신제주에서도 왔었다. 정거장 바로 옆이라 시장 보러 온 사람들도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송씨는 어머니에 이어 2대에 걸쳐 50년째 노점 장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동천탕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머니 생전에는 이용을 했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엔 어머니가 장사를 하다가 들어갈 때가 되면 송씨가 이어서 영업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집에 들어갈 때는 호떡을 구우면서 몸에 밴 기름 냄새가 말도 못 할 정도였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를 지우기 위해 목욕탕을 들렀다고 했습니다.

송씨는 "기름 냄새, 고기(생선) 냄새를 씻기 위해 목욕탕을 찾는 상인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동천탕 요금표 (사진 신동원 기자)


동천탕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게에서 30년 가까이 원단과 재통틀을 팔아온 허모(55)씨는 올해 스물여섯인 큰 딸을 낳기 전부터 일을 시작하면서 목욕탕에 갔었다고 했습니다.

허씨는 "큰 애를 낳기 전부터 갔으니까 29년 전부터 간 것 같다. 코로나19가 터지고 안 갔다"며 "예전에 가보면 시장 상인들이나 할머니들이 계셨다. 딸 이야기, 김치 담그는 얘기, 고사리 캐는 얘기 같은 걸 했다"고 했습니다.

허씨는 이 목욕탕이 '상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근처 목욕탕이 여기 뿐이어서 복작복작했다. 나는 일요일이나 토요일 새벽 5시 반쯤에 가게 문 열기 전에 갔었다. 가게도 열어야 하고 애기도 봐야 해서 얼른 할 것만 하고 나오는 편이었다. 그때 가야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는 일거리도 많았다. IMF 끝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 경기가 좋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라고 했습니다.

동문시장 안에서 한복 장사를 하는 김미림(67)씨는 "88올림픽을 할 쯤부터 시장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동천탕에)다녔다. 예전엔 매일 매일 갔었는데, 요즘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간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그때 목욕탕 다니면서 사장님을 봬면 인사도 꼬박꼬박 드리고 세상 사는 이야기 같은 것도 많이 했다"며 "이제는 그 사장님이 돌아가신 걸로 안다. 친정 어머니랑 동갑이니까 살아계셨으면 92세(1933년생)였을 거다"라고 했습니다.

이어 "목욕탕 안이 많이 변했다. 아주 옛날엔 냉탕, 온탕 같은 것만 크게 있었고 한증실 같은 것도 없고 그랬다. 이제는 탕 크기가 작아지고 한증실이 생겼다. 중간에 수면실 같은 게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우리 같은 경우는 여기서 장사를 하니까 피로를 풀려고 간다. 저는 주로 저녁에 장사를 마치고 간다. 장사를 열기 전에 갈 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천탕 초창기 라이벌은 '산지천'이었다고 합니다. 산지천은 한라산 부근에서 발원해 제주시 원도심을 관통해 제주항이 있는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제주의 대표적인 하천 중 하나입니다.

이 동네에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는 신금순(72) 칠성경로당 회장은 "처녀 때부터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녔다"면서도 "옛날엔 지금 같지 않고 목욕탕을 많이 안 다녔다. 우리 나이대에는 목욕탕 사업이 막 번창할 때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은 거의 산지천에서 목욕을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신 회장은 "(목욕탕엔)동문시장 안에 상점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촌에서도 동문시장 이용하고 시장이 활발해서 동네사람보다 상인들이 많이 목욕탕을 이용했다. 시장을 보러 온 김에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목욕탕이 1층에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창문 문턱이 낮아서 밖에서 목욕탕 안쪽을 훔쳐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동문시장 두 번째 목욕탕 사장님의 기억

동천탕(삼다사우나)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 (사진 신동원 기자)


수소문 끝에 동천탕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유성탕' 사장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1971년에 문을 열어 2007년까지 영업을 이어온 유성탕은 동문시장 인근에 두 번째로 생긴 목욕탕이었습니다. 제주에선 7번째로 개업한 목욕탕입니다. 동천탕과는 걸어서 5~1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유성탕을 운영했던 유숙자(92) 할머니의 말을 통해 목욕탕 사장님들이 느꼈을 애환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동천탕과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었을 법도 하지만 영업 초기엔 목욕업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용객이 많았다고 합니다. 목욕탕을 접은 후에도 길거리나 경로당에서 '목욕탕 아줌마', '목욕탕 할머니'로 기억해주는 옛 손님들이 만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오면 공짜 요구르트를 주고, 친한 사람들은 목욕비를 받지 않기도 했던 옛 일들을 끄집어 내는 손님들이 반가웠다고.

유숙자 할머니는 "그때는 화북이나 삼양, 봉개에 목욕탕이 없어서 장사가 잘됐다. 조천읍에서도 손님이 왔고 동문시장 상인들도 많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시기를 특정하진 못했지만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진 장사가 나름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유 할머니는 "(동문)로타리에서 옛날 손님을 만났는데 '아이고 재호 어머니, 그때 아이들 왔다고 요구르트도 주고, 돈도 안 받고 해줘서 고마웠다'라는 말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엄마 손잡고 목욕탕에 왔던 대여섯 살짜리 포목점 아들이 서울에 올라가 국회의원이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노인당에서 보면 반가운 사람도 있고 하다. 우리 손님들이었는데, (나를 보면)'유성탕 할머니구나', '유성탕 아줌나구나' 하고 아는 척을 한다. 또 '그때는 젊어났는데 이젠 머리가 하양했네(하얗게 됐네요)'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목욕탕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선 다른 지역에도 목욕탕이 많이 생기면서 손님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층 '나라시(세신사)'가 다른 공장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들었습니다.

유 할머니는 "우리도 빚져서 시작했는데 나중엔 빚도 갚고 육남매도 다 키웠다. 과수원까지 하면서 정말로 바쁘게 살았다. 그때 너무 바쁘게 살아서 요즘도 잠을 잘 못 잔다"며, "소원은 지금처럼 아이들 건강하고 화목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설을 앞두고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을 찾아 보는 건 어떨까요?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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