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허락할게” 밤새 뭐했길래…설날은 ‘불타는 청춘’을 위한 날? [서울지리지]
숙종때 학자 김창흡(1653~1722)의 문집인 <삼연집>에 수록된 ‘설날한탄(新歲歎)’이란 시의 일부다. 김창흡의 글에서 묘사된 18세기 전후 한양의 설날풍경은 조선이 가난하고 낙후됐다는 통념을 여지없이 허문다. 그가 살던 시절의 설날은 풍요롭고 활력이 넘쳤다. “남여 길 위에서 만나 서로 새해인사를 건네니(都人士女途中賀), 이날 만은 모두 즐거운 표정들(是日顔色兩敷腴). ··· 금천교에서는 기방의 가야금 연주소리(靑樓鼓瑟錦川橋), 종각네거리는 붉은 머리띠의 소년들 공차기놀이(朱帕蹋鞠鐘樓衢).”
김창흡은 그러면서 “문을 나서면 바깥놀이가 사흘동안 계속되니(出門行遊三日畢), ··· 가련타, 송구영신의 즐거움이여(可憐送舊迎新樂)”라고 했다. 사흘간이나 요란하게 놀러다니려니 심신이 괴로울 수 밖에.
음력 1월은 농업을 근간으로 했던 한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달이었다. 한해는 봄·여름·가을·겨울 순으로 이어진다. 마땅히 1월 1일은 봄이 돼야 하지만, 사실 양력 설은 1년 중 가장 추운 겨울이다. 음력 1월 1일에 와서야 비로소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날은 동시에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우리 조상들은 음력설을 1년 중 가장 특별한 날로 인식하고 기념했다. 옛사람들은 뜻깊은 1월을 어떻게 축하했을까.
대궐에서는 아침 일찍, 삼정승이 모든 관원을 이끌고 정전 앞뜰에 나아가 임금에게 새해 문안을 드린다. 이를 정조하례(正朝賀禮·신년축하인사)라 했다. 정조하례는 일찍이 삼국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는 “신라 진덕왕 5년(651) 봄 정월 초하루, 임금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에 하례하는 예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조선건국 후 첫 정조하례는 1393년(태조 2) 열렸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는 중앙과 외관의 인사를 받았다. 각 도에서 토산품을 바쳤고 알도리(斡都里·건주여진)는 살아있는 호랑이를 진상했다. 좌시중(좌의정) 조준이 술잔을 받들어 “큰 경사를 감내하지 못하여 삼가 천세수(千歲壽)를 올린다”고 하자 모든 신하들이 “천세”를 세번 외쳤다.
찾아온 손님에게는 세찬(歲饌)과 세주(歲酒·차례주)를 대접했다. 설날하면 떡국이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는 “멥쌀가루를 쪄 나무판 위에 놓고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늘려 만든 떡이 백병(白餠·가래떡)이다. 이를 엽전 두께만큼 얇게 썰어 장국에 넗고 끓인 다음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후춧가루를 쳐서 조리한 것을 병탕(餠湯·떡국)이라 한다. ··· 시장에서 시절음식으로 판다. 떡국 몇그릇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곧 나이가 몇살인가 물어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날과 거의 동일하다. 떡국문화가 오랜 세월동안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갖가지 한약주로 빚은 세주는 도소주(屠蘇酒·악한 기운을 잡는 술)라 불렸다. 세주는 어린아이부터 마셔야했다. 선조때 우의정을 지낸 심수경(1516~1599)의 수필집 <견한잡록>은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는 것은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신다”고 했다. 나이가 적을수록 전염병에 취약해 먼저 나쁜 기운을 떨쳐 버리라는 어른들의 배려다.
병과 재앙을 팔기도 했다. <견한잡록>에서는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고 한다. 자기의 병을 팔고 재앙을 면하고자 함이다”라고 전했다. 대보름 더위팔기의 원조인 셈이다.
정월 세시행사는 대보름날 정점을 이룬다. 현대인은 1월 1일에 산이나 바닷가로 몰려가 해맞이를 하지만, 과거에는 대보름 달맞이를 하며 한 해의 소원을 빌었다. 음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첫 보름달의 의미는 컸다. <동국세시기>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달맞이라 한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吉)하다”고 썼다.
나라에서도 이날만은 특별히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정조실록> 1791년(정조 15) 1월 13일 기록도 “사흘간 야금을 풀고 숭례문과 흥인문을 열어 도성의 백성들이 답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면 사고도 생기게 마련.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은 “남녀가 길거리를 메워 밤새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법관이 이를 불허하고 체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여성의 북문외유(北門外遊)도 허용됐다. 도성의 북문(숙정문)은 다른 문에 비해 외지고 음기가 강한 북향이어서 평소에는 폐쇄돼 통행이 금지됐다. 이로인해 “숙정문 밖에 뽕밭이 많다”, “못난 사내가 북문에서 호강받는다” 등 다양한 속설이 퍼졌다. 여성들이 대보름날 북문을 세번 왕래하면 그 해 모든 액운이 없어지고 일년 내내 몸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했다.
<동국세기기>는 “바야흐로 싸움이 심해져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상처가 나고 죽기도 해 나라에서 특별히 금지시키지만 고질적인 악습은 고쳐지지 않는다”며 “성안의 아이들도 본받아 종각거리나 비파정(琵琶亭·종로 관수동에 있던 정자)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였다”고 했다.
오늘날 서양문화의 급속한 확산 추세 속에 안타깝게도 우리 고유의 세시풍속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가족들이 모처럼 한데 모여 차례 지내고 세배하는 설날 전통은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참고문헌>
1.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김매순
2. 경도잡지(京都雜志). 유득공
3.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홍석모
4.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삼연집(김창흡), 견한잡록(심수경), 지봉유설(이수광), 하재일기(지규식)
5. 한국세시풍속사전-정월편. 국립민속박물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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