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히포크라테스는 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릴까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2024. 2.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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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 역사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 '종의 기원을 통해 ‘자연선택’을 기반으로 하는 진화론을 주장하자 곧 반대 여론에 부딪히게 되었다. 무엇이든 오래 믿어 온 진리를 한 순간에 뒤바꾸는 것은 앞선 진리를 믿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해야 함을 의미하므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반대론자들이 내세운 이유중 하나는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면 왜 특정 단계의 화석과 그 다음 단계의 화석 사이에 중간 화석이 존재하지 않는가’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보다 동조하는 이들이 많아져 165년이 지난 지금은 대다수 학자들에 의해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간화석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다윈은 제대로 답을 못했을뿐 아니라 장차 빈 자리를 메꿀 화석이 발견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고 연결고리가 끊긴 화석을 설명할 수 있기까지는 약 한 세기가 흘러야 했다.

1962년에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어느 한 시대 사람들이 가진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을 가리키는 이 용어는 쿤도 초판에서 명확히 정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에 발행된 개정판에서 ‘페러다임’의 의미를 더 명확히 했다.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마다 한 단계를 건너뛰듯이 발전한다는 그의 주장은 ‘왜 그걸 여태까지 몰랐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이론은 또 중간화석의 부재가 진화가 틀렸음을 증명한다는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진화도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시간에 갑자기 일어날 수 있다. 오랜 시간 서서히 진행하거나 변화가 없다가 주변 상황이 바뀌면 급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진화는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서 관찰한 네 가지 종류의 핀치의 부리가 실제로 기후와 같은 환경변화에 의해 빨리 발생할 수 있음이 관찰되면서 진화이론을 설명하는 증거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히포크라테스 조각상. 위키미디어 제공

● 질병의 원인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꾼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역사를 빛낸 수많은 학자들중에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7?)를 ‘서양의학의 아버지’ 또는 ‘서양의학의 창시자’라 하는 것은 그가 의학이 거의 발전하지 않은 시기에 역사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서양의학은 한 단계 더 발전했고, 의학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기 전에는 질병을 신이 내린 벌이라 여겼다. 원인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 원인에 맞게 대처를 하면 된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가 등장하기 전 고대 그리스에서 흔히 사용한 치료법은 신에게 벌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이왕 기도를 한다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을 기리는 장소, 신전을 지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질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할 때는 이왕이면 신 중에서도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를 기리는 신전을 지어 놓고 거기에 가서 기도를 했다. 일상을 벗어나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정신을 한데 모아 기도를 했으니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질병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이 다른 이유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질병의 원인은 체액의 불균형 상태였다. 정상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면 질병이 발생하지 않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균형이 깨지면 질병의 원인이 되고 가장 먼저 시도할 수 있는 치료법은 식이요법이었다. 즉 음식을 조절하여 깨진 균형을 바로잡으려 했다. 

또한 새로운 약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외과적 수술법도 발전시켰다. 신에게 빌지 말고 사람의 힘으로 질병을 고쳐 보겠다는 그의 생각은 후대 의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질병을 대하는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것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자신보다 과거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시기는 학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였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대할 수 있는 서양학문의 시초를 장식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다.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탈레스를 필두로 기원전 7세기부터 4세기까지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로도토스, 투시디데스, 피타고라스 등 수많은 학자들이 등장하여 세상을 탐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오늘날에는 데모크리토스를 화학자, 피타고라스를 수학자, 헤로도토스를 역사학자, 소크라테스를 철학자와 같이 구분하지만 당시에는 학문적 구분이 없었다. 단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각자의 관점에서 풀이했을 뿐이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던 코스(Cos) 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히포크라테스는 일찍부터 사람의 몸과 질병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리스 각지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학자들을 만나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다. 그러는 가운데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나홀로 우뚝 선 학자가 아니라 다른 학자들과의 교류에 의해 자신의 독창적인 의학과 질병관을 만들어간 것이다.

●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낳은 '히포크라테스 전집'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을 후대에 널리 알려 준 그의 책과 선서는 사실 그가 쓰거나 작성한 것이 아니다. 기원전 3세기 경 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아 놓겠다는 의도로 설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장서로 가득차기 시작하자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그리스를 비롯하여 먼 나라로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다.

히포크라테스도 생전에 글을 쓴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현재 그의 이름이 붙은 전집에 쓰인 내용중 어떤 부분이 그가 쓴 것이고 어떤 부분이 다른 학자들에 의해 씌어진 것인지 구별하기는 어렵다. 

고대 그리스에서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의 무리를 가리켜 소크라테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와 같이 ‘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히포크라테스학파라 할 때는 동시대에 그를 따른 제자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의 사상을 받들고 그를 닮기를 원한 이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기원전 약 400년 경부터 기원후 약 100년 사이에 히포크라테스를 기리며 의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책을 쓰면서 당시 가장 명망높은 학자라 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이름을 붙인 것이 오늘날 '히포크라테스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과 같은 제본방식이 아니므로 '히포크라테스 전집'이 몇 권인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은데 대충 50-70권 정도에 해당한다. 책의 내용은 아주 다양한 질병의 치료, 예후 등을 다루는 것도 있고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도 있다. 

또 '신성병에 관하여'에서는 정신의학적 질환에 대해 기술하는 등 책 전반에 걸쳐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특징이 드러난다. 하기야 그 이전에 의학책다운 책이 없었으니 인류역사상 최초로 의학전반을 다룬 책이 '히포크라테스 전집'이라 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문. 위키미디어 제공

●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사용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오늘날 많은 의대에서 이제 막 의사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졸업식을 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곤 한다. 이 선서도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왔지만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히포크라테스를 받드는 이들이 그가 평소에 남긴 말을 모아서 초안을 만들고 그 후로 그의 학문을 따르는 이들이 긴 세월에 걸쳐 첨삭을 하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분명한 것은 후대 사람들이 선서를 계속 수정보완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길이도 일정하지 않고 앞뒤에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또 의사의 권익을 보호하는 내용도 있고 비용 청구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비용에 구애받지 말고 우선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모순된 내용과 여러 버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선서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역사적으로 의사들의 윤리에 대한 최초로 담았기 때문이다. 수백년 전만 해도 전쟁포로는 잡은 사람이 마음대로 다루어도 되고, 포로나 노비를 서로 주고받기도 했으며 역적은 먼 친척까지 포함하여 삼족을 멸할 정도로 윤리의식이 희박했다. 

그러나 이미 2천 수백년 전에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약은 어떤 부탁이 있더라도 투여하지 않을 것이며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 보고 들은 내용을 비밀로 하라”와 같이 윤리적 내용을 담았다는 것이 그가 시대를 앞서간 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의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가 남긴 훌륭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버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길이가 약 2,000자 정도에 이른다. 따라서 역삭적으로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선서를 한 예가 있기는 하지만 길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졸업식에서 선서를 보편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하는 선서는 1948년 세계의사협회에서 새로 제정한 13문장의 선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생체실험을 한 독일 의사들의 비윤리적인 태도에 자극받은 세계의사협회에서 의사의 윤리를 강조하는 내용을 구성한 후 히포크라테스 선서라 이름붙인 것이다.

참고로 히포크라테스는 “Life is short, but art is long.”이라는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흔히 “인생은 짧다. 그러나 예술은 길다”라 번역하지만 그가 일생을 통해 남긴 행적을 감안하면 “인생은 짧다. 그러나 의술은 길다”라 해야 더 옳은 번역이 될 것이다. 

기원전 4~5세기에 신 중심의 의학을 사람 중심의 의학으로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은 오늘날 서양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평생 한 번쯤은 그의 이름을 딴 선서를 하게 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반덕진. 히포크라테스의 발견. 휴머니스트. 2005
자크 주아나. 히포크라테스. 서홍관 역. 아침이슬. 2004
아커크네히트. 세계의학의 역사. 허주 역. 민영사. 1993
Robert Maynard Hutchins.(ed) Hippocrates/Galen. Encyclopedia Britannica, Inc. 1952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교수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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