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일상의 기적’처럼 51억의 비싼 두다리입니다[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2024. 2. 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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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적이란… 숨 쉴 수 있는 기쁨이고 두발로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는 기쁨인 것을…

서귀포시 동광리 원물오름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산방산, 송악산, 형제섬, 모슬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 강동삼 기자
원물오름 정상 바위에 박힌 서귀포시를 알리는 깃발. 제주 강동삼 기자

호남주재 동료기자가 뜬금없이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박완서(1931.10. 20~ 2011. 1. 22)의 ‘일상의 기적’이란 글을 링크해왔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평소 그답지 않게 센티멘털해져 있나 싶어 안부를 물었더니 되레 내게 스트레스를 풀라며 읽기를 권유합니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을 해댔다.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나의 몸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터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중이다.’

마치 나이 먹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한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입니다. 이 글의 백미는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새삼 감사한 일임을 일깨웁니다.

작가는 ‘안구 하나 구입하려면 1억이랍니다.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 바꾸는데는 3천만원, 심장을 바꾸는 데는 5억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답니다. 지금!! 두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다니는 사람은 몸에 약 51억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입니다. 도로 한 가운데를 질주하는 어떤 자동차 보다 비싸고 훌륭한 두 발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일상의 기적이란 그런 아주 사소하지만, 정말 소중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건강’ 인 듯 합니다.

원물오름 정상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원물오름 초입에 있는 원물샘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 #교통 요충지로 국영여관 이왕원이 있었고 원물 샘이 있었던,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곳

<24>사통팔달 동광육거리를 지키는 원물오름

숨 쉴 수 있는 기쁨에 감사하며, 두발로 오름을 오를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조금은 만만한 오름(표고 459m)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육거리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어릴 적 제주, 한림, 대정, 서귀포를 가려면 이 육거리를 지나야만 할 정도로 사통팔달 길목이었습니다. 예전에 제주로 가려면 모두 이 산간지대로 다녔는데 소위 원이라고 하는데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는 제주목에서도 중간, 대정에서도 중간으로 그 원이라는데는 사람이 몇 가구 살고 있어서 거기 가면 점심도 사먹고 술도 한잔 사마시고 다리도 쉬고하는 곳이었답니다. 한국구연문학대계 설화 중에서 인용해 말하자면 ‘참(站)이었고 원(院)이 있었던 곳’입니다. 또한 예전에는 동광리와 서광리를 통틀어 일대를 자단리(自丹理), 한때는 광청리(光淸理)라 했거니와 옛 지도에 대정~제주를 연결하는 역로(驛路) 선상에 자단촌이라고 기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역촌(驛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촌이었다면 원이 있었음도 당연한 일입니다. 세종때 교통과 연락의 편의를 위해 섬 안의 각지에 원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원이란 공무여행의 관원, 후에 일반 나그네도 이용하도록 마련된 국영여관이었습니다.

그 교통요충지 동광육거리 북쪽에는 낮고 완만한 오름하나가 눈에 띕니다. 원물오름입니다. 원물오름의 명칭은 남녘 기슭에 있는 샘에 연유합니다. 예전에 이 부근에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이 이곳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고 파 보았더니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합니다. 이 샘물은 생수가 없는 인근 주민의 생명수와도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대정현의 원님이 제주목으로 오가는 도중에 이 오름 아래에 있는 물을 마시곤 했다는데서 ‘원님이 마신 물’이라는 뜻으로 샘의 이름을 ‘원물’이라 하고 오름도 한자로는 원수악(院水岳), 혹은 원수악(元水岳)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오름 입구에는 육각정과 함께 샘(원물)이 있어 탐방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어허,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게’ 라며 넌지시 원님이 말을 건네는 듯도 합니다.

원물오름 입구에는 제주목을 드나들던 관리와 주민들이 숙박할 수 있었던 조선말기때 국영여관인 이왕원(梨往院)이 있었다는 표지판도 눈에 들어옵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모슬포 제1훈련소 훈련병들이 야간 산악훈련을 하기 위한 제1숙영지가 들어섰으며, 훈련과정을 마치면 병사들은 화순 사계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던 LST(landing ship tank의 약자. 미국의 상륙 작전용 함정)에 승선해 전선으로 배치됐다고 쓰여 있습니다.

원물오름이 바라다보이는 넓은 주차장엔 충혼묘지탑이 세워져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 당신을 감싸주듯, 4·3의 아픔을 품은 곳, 충혼묘지탑이 있는 곳

반면 원물오름을 탐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길 안내표시도 거의 없습니다. 고랑처럼 파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정상에 다다릅니다. 가는 길에 오름동호회 회원들을 만나 허전함을 달랬습니다. 이들은 아침일찍부터 근처 정물오름, 당오름을 오른데 이어 이 원물오름과 옆에 마주한 감낭오름(감남오름. 439m)까지 오를 예정이랍니다. 참 부지런도 합니다. ‘비싸고 훌륭한 다리’를 지녀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름을 오르는 길에 동그랗게 생긴 노란 옥구슬같은 열매를 만납니다. 도깨비가지랍니다. 처음보는 듯 한데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가지에 가시가 달려 초식동물이 먹지못해 골칫거리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정상에 오르면 동광리 마을이 한눈에 내다보이고 산방산, 형제섬, 바굼지오름, 모슬봉, 송악산까지 멀리 펼쳐집니다. 정상에는 산불초소가 있고 북쪽 굼부리 너머로 북쪽 봉우리가 마주하는데 묘지 서너개가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전망좋은 자리라 생각듭니다.

오름 하산길 아래에는 안덕면 충혼묘지 탑이 눈에 띕니다. 1999년 3월에 조성됐다는 이 충혼묘지에는 군인 109명과 경찰 4명, 공무원 3명 기타 1명 등 총 117명이 안장돼 있답니다. 이 가운데 1949년 1월 29일 화순리 개폭데기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충혼비와 안덕면 서기였던 양운섭 순직기념비, 육군 이등상사 김기성 묘비 3기가 4-3과 관련된 비석이랍니다.

왼쪽부터 도깨비가지. 원물오름 앞 토이파크, 승마장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지금은 평화로운 동광리마을. 그러나 여기 저기에는 4·3의 아픔이 서려 있습니다. 동광육거리를 중심으로 무등이왓, 삼밧구석, 영화 ‘지슬’촬영지 큰넓궤 등 중산간 마을은 1948년 11월 증순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실시되면서 마을은 모두 파괴됐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습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 1980년대 젊은이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혁명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손가락에 꼭 맞는 장갑을 끼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던 체 게바라(1928.6.14~1967.10.9)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의 책상 앞에는 덥수룩한 수염에 두툼한 시가담배를 문 그의 사진을 붙여놓기까지 했으며 투쟁을 외치던 그 시절에, 행동하지 않던 청춘들도 ‘체 게바라의 자서전’ ‘체 게바라의 평전’을 한번쯤 읽었습니다. 그는 혁명가이기 전에 지칠줄 모르는 여행자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는 기록자이면서 시인으로 마야왕국의 유적지 팔렌케를 이렇게 관찰합니다.

그는 ‘팔렌케, 당신의 돌 속에는 그 무엇이 살아 있다’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숲은 자신의 줄기로 당신을 감싸주고 있고, 자신의 뿌리로 자비롭게 당신을 긁어주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어쩌면 4·3의 아픈 상흔을 품은 원물오름의 누렇게 빛바랜 풀들이 당신의 하산길에서 바람에 춤을 추듯, 발등을 살랑살랑 건드리며 간지럼 태울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을 지탱하고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듯 합니다.

탐나라공화국을 만든 강우현 대표가 탐나라공화국 방문객들을 상대로 직접 안내자 역할을 하며 헌책도서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탐나라공화국 헌책도서관은 지역주민들이 기증한 책 30만권으로 꾸며졌다. 제주 강동삼 기자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한국교육관광지를 꿈꾸는 ‘탐나라공화국’

‘내버리면 청소, 써버리면 창조’.

정말 이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 있다. 원물오름에서 차량으로 서쪽으로 5분만 가면 ‘탐나라공화국’이 나온다. 제주도민들에게는 조금 낯설지 모르지만, 제주 한림읍 금악리에 자리 잡은 탐나라공화국은 전국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춘천 남이섬의 ‘나미나라공화국’과 비슷한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춘천 남이섬을 전국적인 명소로 탈바꿈시킨 나미나라공화국을 만든 강우현 대표가 2014년부터 허허벌판을 깎고 다듬고 빚어낸 또하나의 작품으로 오는 22일이 10주년이 된다. 본격 오픈한 것은 지난해 4월이라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겨울연가’의 배경무대가 되면서 한류 관광명소로 뜬 남이섬이 그랬듯, 버려지는 모든 것들을 재활용해서 새롭게 가꾸고 환골탈태시켰다. 제2의 남이섬을 꿈꾸며 조성한 제2의 야심작인 셈이다.

미니국가이자 공화국을 표방하는 만큼 이곳을 방문하려면 입장권 대신 비자나 여권을 발급받아야 한다. 1일 당일 방문인 경우 1일 비자 1만원(입장료 개념), 1년동안 아무 때나 불쑥불쑥 방문하고 싶다면 1년 방문권인 여권(2만원)을 발급받으면 된다. 현재 약 3000여장의 여권이 발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우현(70) 대표는 2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이곳은 70% 이상이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며 “그중에 절반이 지역에서 기증받았다”고 자부했다.

탐나라공화국에 입장할 때 필요한 여권(맨 위 왼쪽)과 주민들이 기증하거나 바려지는 물건들로 꾸민 공원(맨위 두번째 가운데왼쪽과 두번째), 갤러리, 하늘등대, 노자예술관(맨 아래 왼쪽)등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 30만권의 헌책도 기증받고… 2만여그루의 나무도 기증받은… 70%이상 업사이클링 관광명소

제주의 자생나무인 녹나무를 비롯, 소철, 먼나무, 워싱턴야자수 등 황무지를 숲으로 만든 5만여 그루의 나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지역 주민과 방문자들이 심은 것이다. 전국서 기증받은 헌책 30만권을 보관하는 헌책도서관도 그렇게 탄생했고, 깨진 항아리, 도자기, 볼링공과 핀, 타일 등으로 꾸민 야외조각공원의 일부도 그렇게 재탄생했다. 서쪽편에 위치한 노자예술관은 중국 낙양사범대학 노자연구원 양중유 원장의 주선으로 하남성 문화청으로부터 노자 도서 500권을 기증받아 문을 열기도 했다. 용암을 녹이는 용해로체험, 천에 염색을 해보는 스카프 만들기, 도자기체험, 한지 체험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한달에 한번 지역주민에게는 무료 입장을 시켜 개방하고 바자회, 문화공연 등도 펼친다.

헌책도서관 한 귀퉁이 액자에 새겨진 ‘홀로 있으면 생각할 수 있어 좋고, 함께 있으면 사랑할 수 있어 좋다’라는 캘리그래피 글귀처럼 그는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돈보다 사람을 벌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강 대표는 “단순 재활용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가꾸는 곳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바이오투어리즘’을 내걸었다”면서 “여행자가 가꾸는 여행지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강조했다.

탐나라공화국은 국내 첫 한국교육관광지로 거듭나는 꿈을 꾸는 세계다. 함께 가꾸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나라를 만들었으니 예술, 문화, 인문 등 다방면에서 일반인 누구나 와서 쓸 수 있는 평생교육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공원 조성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방문할 때마다 변화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이곳에 바친 10년 세월을 덮고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다.

1953년생인 그는 그러면서 농을 건넨다. “10년을 묻어 버렸으니 나는 1963년생으로 다시 젊어졌다”며 껄껄 웃었다.

글 사진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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