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순종까지 즐긴 露유학파 김문필의 마술쇼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2.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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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1925년 7월창덕궁 인정전서 관람…
新공연예술로 선풍적 인기
1920년대는 일본인 마술사들이 휩쓸던 공연 시장에 조선인 마술사들이 등장해 인기몰이를 하던 마술의 시대였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인 김문필, 역시 러시아에서 성장한 김완실과 박창순은 마술을 포함한 춤과 노래, 연극이 뒤섞인 공연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했다. 예전엔 볼 수없었던 화려하면서 충격적인 마술쇼는 신종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다. /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김문필은 평안북도 초산(楚山)출생으로 23세에 고향을 떠나서 로국(露國·러시아)에 유학하여 ‘알늑산드럿지’대학에서 7년간 문학을 연구하다가 예술단을 따라서 멀리 불란서 파리까지 최면술과 기술(奇術)을 배우고 이래로 각파 예술단에 참가하여 서반아에서는 김군이 예술계의 일대 명성이 되어 세계적 기술가(奇術家)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으며, 그 후에는 폴란드 여자와 결혼하여 재미있는 생활을 하다가 로국의 혁명이 일어난 후로 재산은 있는대로 주고 단신으로 바람찬 시베리아를 거쳐서 동양으로 향하기 시작하여...’(‘천재 기술의 김문필군’, 조선일보 1924년6월30일)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신문에 특이한 인물이 소개됐다. 러시아로 유학갔다가 마술을 배워 ‘세계적 마술가’가 됐다는 김문필이란 사나이였다.평안북도 초산 출신의 이 남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서양의 최면술과 마술을 배웠고, 유럽 공연을 다니면서 스페인에선 ‘세계적 마술사’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김문필은 폴란드인 여성과 결혼했는데,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홀몸으로 시베리아를 거쳐 귀향했다는 얘기였다. 당시 마술은 기술(奇術)로 불렸다.

◇독일어 등 7개국어 능통

경성의 유지 30여명이 1924년 6월 28일 관수동 국일관에서 김문필 후원회를 결성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김문필이 귀향노정에서 하얼빈에서 마술공연으로 번 돈 2400원을 조선 동포학교에 기부하고, 장춘에서도 공연을 펼쳐 수입 2000원을 역시 학교에 기부했다는 미담이 한몫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군은 어학으로도 동서양 일곱나라 말을 능통하고 기술로는 150여종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기술(奇術)이 많이 있는 터임으로...’

7개 국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150여종의 마술을 할 줄 안다고 소개됐다. 후원회 결성 목적은 기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경성을 비롯 전국 순회 공연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김문필은 후원회장에서 ‘프리뷰’ 형식의 마술도 선보였는데, 놀라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마술을 배워 '세계적 마술사'가 됐다는 김문필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4년 6월30일자 기사.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각 신문들이 모두 김문필을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낼 만큼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황실의 격찬 받아

같은 날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도 김문필을 소개하는 기사가 났다. 매일신보는 김문필의 상반신 사진까지 실었다. 김문필의 해외 유학과 경력을 나열한 뒤 이렇게 소개했다.

‘세계적 기술가로 여러 번 노국(露國)황실의 격찬을 받고 노경(露京)성피득보(聖彼得堡)의 한 모퉁이에 거대한 저택을 두고 풍유한 생활을 하더니 의외에 노국 혁명이 돌발하여...’(‘세계적 奇術家 김문필군’, 매일신보 1924년 6월 30일)김문필이 러시아 황실의 총애를 받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저택을 소유할 만큼 성공한 마술가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신문에 ‘우리들은 이때까지 일본 사람이나 서양 사람의 기술이나 마술을 보고 그 신출궤몰한 재조에 깊이 느낀 일이 있으나 우리 조선 사람의 그만한 재조를 보지 못하든 바’(‘노국유학의 김문필씨’, 동아일보 1924년 6월 30일)라며 김문필의 등장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김문필이 인도까지 순회했으며,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소개했다.

러시아에서 마술을 배워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 '세기의 마술사'로 정평 높다는 김문필. 1924년 귀국해 조선연예단이란 공연단체를 만들어 마술공연을 펼쳤다. 매일신보 1924년 6월30일자에 실린 사진과 기사

◇조선인 마술사 출현 앞다퉈 소개

마술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공연예술로 주목받던 장르였다.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서 일본 마술계의 스타인 ‘쇼쿄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1884-1944)가 펼친 공연은 이전에 볼 수없었던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해 마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덴카츠 극단’ 조선 공연은 추후 소개) 1910년대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마술공연은 일본인이 주도했기에 조선인 마술사의 출현은 신문이 앞다퉈 보도할 만한 관심거리였다.

김문필은 소년소녀 20여명으로 이뤄진 ‘조선예술단’을 만들어 그해 10월15일 밤 7시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창단 공연’을 가졌다. 창단 공연을 알리는 기사엔 단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까지 실렸다. ‘그의 재주는 유명하다는 일본의 천승(天勝)이나 천화(天華)단에 비길 바가 아니라 하야 벌써 일반의 인기가 높아감으로….’(‘조선예술단 출연과 동아일보 독자우대 할인’, 동아일보 1924년 10월 15일)

티켓 가격은 2층 2원, 1층 1원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1924년10월 조선연예단 창단 공연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4년10월15일자 기사. 김문필(뒷줄 왼쪽)과 단원들이 공연 홍보용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가극, 기술, 최면술 등으로 매일 밤 만원’

조선예술단은 전국을 도는 순회 공연에도 나섰다. 11월17일~20일 평양제일관에서 공연을 가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레퍼토리는 ‘동요,동화,댄스 등으로 특히 조선의 역사적 예술의 능력을 발휘하야 사회 교화에 필요한 재료이며 그외에도 서양에 유명한 기술 최면술 등의 기이한 것이 많이 있다고 한다’(시대일보 1924년 11월17일)

같은 달 진남포에서도 ‘가극 기술 최면술 등 흥미있는 것을 공연하야 매일 밤 만원의 성황을 이루는’(‘조선예술단의 자선공연’, 시대일보 1924년11월26일)성과를 거뒀다. 하얼빈, 장춘에서처럼 사회 사업을 위한 자선 공연도 계속한 것같다.시대일보 진남포 지국 후원으로 11월25일 밤 기독교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돕는 자선공연을 했다.

이듬해 3월 동대문 밖 총독부의원 동물사육장에 움막 같은 교실을 지어놓고 공부하는 ‘고학당’(苦學堂)을 후원하는 공연을 펼쳤다. 3월15일~18일 시내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마술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은 물론 일본까지 순회 공연을 펼쳐 학교 설립을 돕겠다는 포부였다.(‘고학당을 위하야 조선예술단 출연’, 조선일보 1925년 3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서 순종이 관람 어전 공연

순종도 1925년 7월 6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종친, 귀족들과 함께 김문필의 마술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금 6일 오후7시반부터 이왕전하께옵서는 창덕궁 인정전으로 이왕가의 어친척과 중요한 귀족, 그외의 이왕직 고등관을 불러서 조선예술단의 김문필일행의 기술을 어람하신 후 일반 내빈에게 다과의 하사가 계실터이라더라.’(‘인정전에서 기술을 台覽’, 매일신보 1925년 7월 6일)

김문필은 1925년 여름 조선 공연을 마무리하고 해외로 나갈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조선예술단 김문필씨는 그동안 1년간이나 조선 각지로 돌아다니며 많은 환영을 받아오던 바 이번 또 많은 경영을 목적하고 고국을 떠나 해외로 향할 터이라는데 고국을 작별하는 마지막 흥행으로 8월 6일부터 5일동안을 평양제일관에서 최면 대 기술(奇術), 마술, 서양인 기술, 남녀무도, 가극, 희극 등 여러 가지 종목으로 특별대흥행을 한다는데, 본사 평양지국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반 독자에게 우대권을 발행하여 우대권 가진 분에게는 각 등에 10전씩 할인하여 줄터이더라.’(‘조선예술단 평양에서 흥행’, 조선일보 1925년 8월 9일)

◇조선예술단 출신 신일선, 나운규 ‘아리랑’ 출연

기사에 따르면, 조선예술단은 마술을 중심으로 무용, 노래, 희극을 섞은 버라이어티 쇼를 공연한 것같다. 김문필의 이후 행적은 신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조선예술단 단원인 당시 열일곱살 신일선이다. 예술단을 나온 신일선은 1926년 나운규의 대표작 ‘아리랑’에서 누이동생 영희 역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이경손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 1927년 심훈이 연출한 ‘먼동이 틀 때’에도 출연하면서 한국 영화 초창기를 장식한 대표적 여배우로 떠올랐다.

◇조선소년군 지원, 공회당 건립 자선공연 나선 박창순

1920년대는 김문필의 ‘조선예술단’뿐 아니라 박창순의 ‘우리기술단’, 김완실의 ‘천연기술단’ 등 조선인 마술공연단이 속속 등장한 시대였다. 1925년 3월 23일 박창순이 조직한 ‘우리기술단’이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자선공연을 가졌다. ‘부내 필운동에 있는 필운 강습원은 창립 이래 매우 곤궁한 중에서 지내던 터인데, 이 필운강습소의 경비에 보태어주고자 ‘우리기술단’에서는 23일부터 사흘간 하오7시부터 부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육연보기술대회를 열고 기술사 박창순군의 여러가지 기술, 마술을 행할 터이라는데 입장료는 특등은 1원, 대인은 30전, 학생은 20전이라 한다.’(‘필운강습을 위하여 우리기술단 출연’, 조선일보 1925년 3월 23일) 매일신보에도 같은 날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박창순은 같은 달 3일 세우(世友)구락부 주최로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보이스카웃 전신)돕기 연예회에도 출연했다.이날 박창순은 ‘기술’(奇術)을 선보였고, 바이올린 독주, 소년소녀가극 등이 함께 열렸다.(동아일보 1925년 3월 2일)

우리기술단은 같은 해 5월 선천, 안동현, 신의주, 6월 용천군 양시(楊市), 7월 숙천, 8월 개성 등 전국 순회 공연을 다녔다(‘우리기술단이 선천에서 대성황’, 조선일보 1925년 5월 15일, ’공회당 기성회와 우리기술단 미거’, 조선일보 1925년 6월 23일). 대부분 자선공연으로 지역단체가 주최하고 신문사 지국이 후원하는 형식이었다.

◇공학도 출신 김완실의 천연기술단

1927년엔 어릴 적 러시아에서 자란 김완실(33)이 ‘천연기술단’을 결성, 공연에 나섰다. 함북 명천 사람인 김완실은 모스크바에서 자란 공학도였는데, 재학 시절 마술을 배워 흥행단을 조직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김완실도 러시아 혁명 후 만주를 유랑하다 귀국했다고 한다.

‘30년 동안이나 로국(露國)에 길여서 자기 본국보다 로국이 익숙하다고 할 김완실(33)씨는 ‘모스코바’에를 세살 때 들어가 거기서 로국인 수중에서 양육을 받으며 그곳 공업예술학교까지 졸업하였는데 재학 당시부터 학생들끼리 기술 마술 모험술 등을 하는 흥행단을 조직하야 하기 방학이면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환영과 갈채를 받았었다는데 씨는 혁명 후에 만주에 머물다가 두어달 전부터 귀국하야 현저동에 와서 두류하며 남녀 15인으로써 천연기술단을 조직하야 기술과 가극을 연습중이라는데 오는 22일부터 시내 우미관에서 공연을 하리라는 바 실로 종목이 30여종이라더라.’(‘不日공연할 천연기술단’, 조선일보 1927년 12월 18일)

매일신보(1927년 12월 17일자)는 김완실이 ‘출신이 공예가인 만큼 무대배경 의상 등 손으로 만드는 것치고는 못만드는 것이 없다’고 소개했다. 김문필, 박창순, 김완실이 이끌던 공연단체의 이후 행적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1920년대는 ‘마술의 시대’라고 할 만큼 마술공연단체가 속출했고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을 마술로 실현시켜주는 마력(魔力)이 필요한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신근영, 1920년대 마술의 유행과 그 여파, 공연문화연구 제35집, 한국공연문화학회, 2017, 8

홍선영, 제국의 문화영유와 외지순행, 일본근대학연구 제33집, 한국일본문화학회, 2011,8

김성연,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쓰의 조선 공연, 국제어문 제76집 2018,3

이주희, 쇼쿄쿠사이 덴카츠의 춤 전개 양상 연구, 무용예술학연구 제34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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