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루이스, 죽음의 고통과 서정적 아름다움의 진실한 이중주

최주성 2024. 2. 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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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금호아트홀 리사이틀…슈베르트 소나타 대장정의 마지막 무대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금호문화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가 극적인 연주로 2년간 이어온 슈베르트 사이클의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1일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영국의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는 슈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세 개의 연작 소나타를 연주했다. 2022년부터 네 차례 공연으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선보였던 대장정을 마치는 무대였다.

이날 연주한 곡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9번(D 958), 20번(D 959), 21번(D 960)이었다. 세 작품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해인 1828년 불과 3주 만에 신들린 듯 작곡된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명작이다.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금호문화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지금까지 폴 루이스는 전통적인 독일-오스트리아 계보의 피아니스트들처럼 단정하고 절제된 해석보다는 마치 건반 위에서 성격극을 펼쳐 놓는 듯한 드라마틱한 접근을 들려주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도 그러한 일관성을 이어 나갔다.

1부를 여는 피아노 소나타 19번 C단조는 어둡고도 강렬한 화성으로 시작한다. 공포를 자아내는 공격적인 울림, 갑작스러운 단절, 해결을 유보하는 불안정한 화성 진행 등이 특징이다. 폴 루이스는 주로 저음 부분에서 이러한 성격을 담아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주제에서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슈베르트 본연의 서정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오른손 파트의 고음역에서 특징적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폴 루이스는 고음역과 저음역에서 음색 차이를 부여하면서 슈베르트 말기 음악에 나타나는 분열적 성격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단순한 형식상의 대비가 아니라 마치 왼손과 오른손 파트가 역할극을 벌이고, 얼마간 뒤섞이고, 또 교대하는 과정이 역동적이고 유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특징적이었던 것은 서정적 주제를 도입할 때 적절히 루바토(임의로 템포에 변화를 주는 것)를 가미하여 듣는 이들이 전환의 순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단조 주제에서는 자꾸 앞으로 나아가려는 추동력이 부각되고, 장조 주제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멈춰서서' 현재의 감정에 더 오래 머물러 있으려는 제스처가 두드러졌다.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금호문화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폴 루이스는 이처럼 하나의 작품 해석에서 서사와 서정의 기본적 특성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대비시켜 아주 극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서정적 분위기를 시종일관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연주된 세 작품을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루이스의 연주는 세 작품을 하나의 '일체'로 연주했다.

세 작품의 모든 춤곡 악장에서는 춤곡의 대가 슈베르트의 유희적인 감각이 미묘한 음영으로 드러났다. 오스트리아 음악 특유의 유머와 의외성, 슈베르트 본래의 진솔한 어조가 불안, 두려움, 신랄함과 만나 블랙 유머가 된 듯했다.

또한 모든 머리 악장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서사적 추동력과 서정적 분위기의 대조뿐 아니라 흐름 대 단절의 대비를 통해 듣는 이의 시간 경험을 다채롭게 표현했다.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Kaupo Kikkas [금호문화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번 A장조 소나타의 2악장은 매우 독특했다. 루이스가 재현한 주제의 어두운 '방랑자'의 발걸음은 서정적이되 어딘가 취해 있는 듯 멈칫거리거나, 비틀거렸다. 미묘한 루바토를 모든 악절에서 구사하는 것처럼, 마치 생전의 슈베르트가 술에 취해 걸어가는 듯한 묘사였다.

이 주제 이후에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긴 악구를 거쳐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타격이 이어진다. 이 공포의 경험 이후 다시 반복되는 '방랑자의 주제'에는 새로 '운명'을 연상시키는 셋잇단음표 악구가 추가되는데, 루이스는 특이하게도 이 유명한 악구를 '운명의 두드림'이 아니라 한 음으로 된 숨죽인 선율인 것처럼 여리게 연주했다. 선율성을 잃어버린 선율, 노래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또 다른 자신의 '도플갱어'가 모습을 드러낸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4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악상이 갑자기 단절된 뒤 생략되는 부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악상이 중단되고, 잊힌다. 아무 이유 없이 노래가 끊긴다. 그것이 슈베르트가 미리 만나 본 죽음의 얼굴이 아닐까. 루이스의 슈베르트 이해가 얼마나 깊은지, 그의 슈베르트가 왜 독자성을 지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금호문화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폴 루이스는 마지막 소나타 21번 B플랫 장조를 극도로 회고적인 어조로 연주했다. 이 작품은 흔히 '대교향곡'과 비견될 만큼 기념비적인 대작이지만, 루이스는 그 규모보다는 내면성에 온전히 집중하는 듯했다.

서정성과 더불어 찬가 풍의 장대한 깊이를 지닌 1악장에서 루이스는 길고 아름다운 선율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도 담백함을 잃지 않으려 세심하게 접근했다. 리듬의 추동력보다는 반음계 진행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긴장감을 긴 호흡으로 표현했다.

2악장은 그야말로 아득했다. 이날 연주에서 가장 깊고 가장 체념적이며 느리게 느껴지는 연주였다. 루이스는 이처럼 마지막 곡으로 갈수록 보다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면면이 더 두드러지도록 연주했다. 모티브 상의 연관성, 다양한 음영과 표현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타나는 슈베르트다운 어조의 일관성 등 다른 차원의 연주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슈베르트를 사랑하게끔 하는 연주였다. 관객들은 마음을 열고 마지막 해를 치열하게 보내며 악보에 새겨놓은 젊은 작곡가의 마지막 고백에 온전히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폴 루이스는 슈베르트가 흡족해할 만한 진실한 전령이었다.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Kaupo Kikkas [금호문화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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