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면서도 장난을 멈추지 않은 천재[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4. 2. 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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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페스트·폰 노이만·알파고…
세 줄기 이야기, 하나의 메시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다”
폰 노이만(맨 오른쪽)이 개발한 초기 컴퓨터 ‘매니악’. 위키미디어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송예슬 옮김|문학동네|412쪽 | 1만8000원

영화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인류의 구원자인지 파괴자인지 그의 고뇌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이해시킨다. 소설 <매니악>은 당시 핵무기 개발을 천재 수학·과학자들의 광기로 묘사한다. 특히 천재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을 통해서다. 그의 친구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를 통해 “쉬쉬했던 추악한 비밀”을 들려준다. “그 무기에 이끌리고 그것을 만들도록 우리를 추동한 것이 권력이나 부, 명성, 영광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과학을 둘러싼 순수한 짜릿함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리치기엔 너무나도 강력했다. 핵연쇄반응 때 발생하는 극한의 압력과 온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물리학,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분출. (…) 우리는 신조차 창조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있었다.”

전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로 2021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AI)이 시작되는, 인류가 판도라를 열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주인공은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폰 노이만. <매니악>은 2016년 구글 딥마인드의 AI ‘알파고’와 대결한 이세돌 이야기도 한 축을 이룬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이 등장한다. 작가는 폰 노이만의 삶과 사상을 담은 책 <튜링의 대성당>, 회고록 <화성인의 딸>, 그레고 코즈 감독의 다큐멘터리 <알파고> 등을 참고했다고 한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소설인지 경계를 알려주지 않는 <매니악>은 끊임없이 ‘진짜일까? 정말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던져주며 독자들을 끌고 간다.

소설은 폰 노이만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가 장애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실제 에렌페스트가 그랬다. 그는 세상의 모든 기준이 뒤바뀌는 시대에 살았다. 히틀러가 꿈틀대기 시작했고, 고전 물리학과 양자역학이 부딪쳤다. 양자역학에 기여한 그는 혼란 속에 어떤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신 나간 이성, 과학의 영혼을 따라다니는 유령”을 본다. “극도로 비인간적 형태의 지성”은 동료들의 옆구리를 찌르고 갔다. 친구 아인슈타인에게도 고뇌를 털어놓지만 누구도 그를 절망에서 꺼내주진 못했다. “초인적 힘과 신과 같은 통제력을 주겠다는 속삭임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꾀어냄으로써, 기술을 매개로 우리 삶에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렌페스트에 관한 1부는 30여쪽에 불과하다. 이 짧은 천재 물리학자의 서사는 소설 분위기를 관통한다.

“논리적인 동시에 지독하게 비이성적”인 힘은 중심 인물 폰 노이만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2부는 폰 노이만을 떠올리는 여러 화자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의 동생, 첫번째·두번째 부인, 딸, 그의 재능을 처음 발견한 선생, 노벨상 수상자인 친구, 한때 공동연구자에서 적이 된 과학자 등. 이들이 기억하는 폰 노이만과의 대화, 일상, 연구를 보여주며 천재의 이성과 광기를 교차시킨다.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폰 노이만은 날 때부터 천재였다. 20세기 들어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그는 두 살에 글을 깨치고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여섯 살에 암산으로 8자리 숫자 두 개를 나눗셈했고,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혼자 깨쳤다. 그는 훗날 ‘수학 분석기와 숫자 적분기 및 계산기’를 만든다. 영어로 Mathematical Analyzer,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이다. 줄임말은 매니악(Maniac). 그가 만든 컴퓨터 이름의 뜻처럼 천재의 다른 이름은 ‘미치광이’였다. 게임 이론을 담은 책 <게임과 경제 행동 이론> 역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수학화하고자 한 그의 ‘광기 어린 욕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천재성과 광기 어린 면모는 미국의 핵폭탄·수소폭탄 개발 과정에서 자세히 그려진다. 그의 계산이 없었다면 핵분열 계산도 할 수 없었다. 핵폭탄 개발 당시 이들의 분위기는 영화 <오펜하이머>에서처럼 나치보다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지배했다기보다 천재들의 ‘호기심’으로 더 읽힌다. 소설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한 리처드 파인먼을 통해 그때 분위기를 그려본다. “그 시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면서도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장난을 멈추지 못했다.” 고민이 깊은 파인먼에게 폰 노이만은 “자네가 사는 세계를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는 거야”라고 말한다.

<매니악>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 (C)Juana Gomez

그의 광기는 핵폭탄 투하 위치까지 계산해주는 ‘치밀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소설은 폭탄을 지면이 아니라 높은 공중에서 터트려야 한다고 군을 설득한 건 폰 노이만이었다고 전한다. 최대의 피해를 불러일으킬 최적의 높이도 600m라고 도출해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은 정확히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 소설이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 있지만, 과학은 과연 중립적일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기계 개발을 향한 폰 노이만의 꿈으로 이어진다. 1946년 폰 노이만은 미군에게 복잡한 수소폭탄 계산을 거뜬히 수행하고도 남을 강력한 컴퓨터를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소설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컴퓨터가 기저귀를 차야 할 만큼 유아적 상태”였을 때 폰 노이만은 기계에 인간의 뇌와 사고구조를 결합할 생각을 한다. 지금의 AI 시초인 셈. 소설이 알파고와 이세돌 대국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3부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2016년 대국을 재생한다. 알파고가 2차 대국에서 보여준 37수, 이세돌이 4차 대국에서 보여준 78수를 압도적 장면으로 묘사한다. 알파고는 인간이라면 두지 않을 바보 같은 37수를 통해 이세돌의 허를 찔렀다. 세 번 연속 진 이세돌은 네번째 대국에서 ‘신의 한 수’인 78수를 통해 알파고를 허둥대게 만들었다. 두 수 모두 ‘0.0001’ 확률이었다. 작가는 “이세돌과 컴퓨터는 바둑의 한계를 뛰어넘어 낯설고 끔찍한 아름다움을, 이성보다 강력한 논리”를 보여줬다고 말한다. 다만 3부는 대국 전후로 이세돌이 한 인터뷰와 다큐멘터리의 그것처럼 대국 당시 그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그친다. 소설은 ‘자가 학습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라는 커제의 질문과 그 이후 등장한 2017년 AI ‘알파제로’까지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2016년 3월10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이세돌과 구글 딥마인드의 AI 알파고가 두번째 대국을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소설은 서로 다른 듯한 세 줄기의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줄기다. “어떤 특정한 발명품의 비뚤어진 파괴력이 위험을 초래하는 게 아니야. 위험은 원래부터 내재해 있지. 진보를 치유할 방법은 없어.” 소설 속 폰 노이만의 말이다.

“문 앞에서 악마가 두드리는 와중에도 우리 인간은 춤출 수 있다”는 폰 노이만의 첫번째 부인의 말처럼 <매니악>이 보여주는 세계는 음울하다. 전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와도 비슷하다. 현실에선 이미 챗GPT가 등장했고, 인간과 대화를 하고 있다. 현실의 우리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어서 다음 장을 먼저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을 다 읽고도 인류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겠지만 <매니악>이 던지는 과학과 철학을 가로지르는 질문은 남는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폰 노이만의 답과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책은 기계가 느끼지 ‘못하는’, 인간만이 즐길 수 있는 지적 유희를 선사한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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