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건강권 보장하랬더니…공공기관 꼼수 휴게실

김아르내 2024. 1. 3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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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직원들이) 공간이 너무 좁아서 여자(휴게실) 쪽으로 넘어와서 쉬어요. 여자 선생님들이 "이러면 안 되지 않느냐"라고 했더니 그분이 "그럼 어디서 쉬냐"…." <부산근현대역사관 직원>

부산근현대역사관 직원 휴게실. 팔을 다 펼치지 못할만큼 좁다

우리 법은 이렇게 정하고 있습니다. '사업주는 근로자가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휴식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갖추어야 한다(산업안전보건법 제128조 2)'. 지난해 8월부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도 휴게시설 설치가 의무화됐는데요. 실제 노동자 건강권이 현장에서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부산시 산하 공공기관을 둘러봤습니다.

양팔을 뻗지도 못할만큼 좁은 휴게실. 잠시지만 이곳에서 쉬고, 탈의까지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답답해서 여자 휴게실로 넘어와 잤겠냐"는 남자 직원의 푸념은 위험하게도 들리는데요. 이곳에선 남자 직원들이 문 하나 넘지 않고도 곧장 여자 휴게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산 근현대역사관 직원 휴게실 모습입니다.

지난 5일 정식 개관한 근현대역사관


지난 5일 개관한 부산근현대역사관은 옛 한국은행 건물을 구조변경해 시민 품으로 돌아온 '문화재(부산시 문화재 70호)'입니다. 6층짜리 본관 건물, 지하실부터 옥상, 야외 조경까지 노동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풀을 뽑고 청소를 하고, 보안부터 안내까지 모두 16명의 직원이 매일 이곳을 관리합니다.

그런데 이 넓은 건물에서 직원들이 쉴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18제곱미터, 쉽게 생각하자면 원룸 방 하나가 전부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대로 사실상 남녀 구분도 없습니다. 샤워실은 지하 1층에 별도로 있습니다. 그런데 건물 온수 배관과 연결돼 있지 않아서 따뜻한 물은 온수기로 데워 사용해야 합니다.

설계 과정부터 빠진 휴게실

온근현대역사관 설계도면. 전체 도면 가운데 직원 휴게실은 빠져있다.


취재진은 부산근현대역사관 구조변경 당시 설계도를 구해 살펴봤습니다. 설계도엔 직원 휴게실이 아예 없었습니다. 구조변경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부산시는 뒤늦게 마지막 남은 지금의 공간을 휴게실로 정했습니다.

지난해 11월, 개관 한 달여를 앞두고서야 남녀 구분을 해주겠다며 설치한 게 얇은 가림막과 옷장입니다. 뻥 뚫린 천장 넘어 옷 갈아입는 소리, 소근거리는 작은 소리까지 다 들리다 보니, 여성 직원들은 여기서 탈의는커녕 쉬기도 쉽지 않습니다.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는 청원경찰은 휴식 시간에 여기서 잠시 눈까지 붙여야 합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측은 별관 휴게실을 쓰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별관 휴게실은 본관을 나와 길 건너 3층에 있습니다. 청원경찰은 근무지를 이탈할 수가 없고, 미화 직원들은 다른 사람이 쓰는 휴게실을 내 휴게실처럼 맘 편히 사용할 수 있겠냐고 합니다. 역사관 측은 취재진에 노동자들의 민원을 충분히 감안해 보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법망 피한 꼼수 휴게실 수두룩

부산 공무직노조는 휴게시설 설치가 의무화된 지난해 8월 기준으로, 부산시 산하 사업소와 기관 29곳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29곳 모두 부실한 휴게시설 문제가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부산 푸른도시가꾸기사업소 직원 휴게실. 컨테이너 두 동이 놓여 있다.


취재진은 그중 한 곳을 찾아가 봤습니다. 부산시 푸른도시가꾸기 사업소 노동자들의 휴게실입니다. 고가 다리 아래에 덩그러니 설치된 컨테이너 . 야외 작업자가 많다 보니 부산시가 본부 사무실 외에 컨테이너를 활용해 별도로 만든 휴게실입니다.

취재진이 머문 길지 않은 시간에도 기침이 절로 났습니다. 주변에 차가 계속 드나들다 보니 먼지가 많이 날리기 때문인데요. 소음도 상당해서 컨테이너에 있는 창문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도심 미화 작업을 하는 직원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고, 옷도 갈아입고 작업 후 씻는 거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이 많아서 식사 전 손이라도 씻으려 물탱크에 물을 받아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온수는 꿈도 못 꾸고 더 급한 건 '용변'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화장실을 가기 어려워 오물을 따로 모아야 한다


컨테이너에 화장실을 설치할 수 없다 보니 부산시 사업소 측은 지하철역사 화장실을 쓰라고 안내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길을 건너려면 무단횡단을 해야 하는 상황. 직원들이 항의했지만, 시설을 마련할 수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따로 오물을 모아 버리고 있습니다.

■법 위반 사항만 조치한다?… 피해는 노동자 몫

문제는 이 휴게실들이 법을 어긴 건 아니라는 건데요.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돼 지난해 8월부터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가 확대됐고 기준도 마련됐습니다. 최소 바닥 면적, 온습도, 조명까지 그 기준은 세심한데요. 하지만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야외 노동자나 300 제곱미터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은 일부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정하고 있는 건데요. 이 탓에 고가도로 아래 컨테이너 휴게실마저도 적법한 시설입니다.

전문가들은 예외 조항으로 법망을 피하면서, 최소 기준만 겨우 충족한 휴게실이 계속 늘어난다면, 이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려던 법 취지와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공공기관에서부터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면 민간에서는 더더욱 법망을 피하는 꼼수 휴게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부산시는 지난해까지 2년 동안 노조와 함께 조사하고, 법 위반 사항은 시정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본 거처럼 예외조항이라는 법 밖의 사각지대까지 행정력은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그 피해는 노동자들이 계속 떠안아야 하는 건데요. 2019년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비좁은 휴게실에서 숨진 지 5년째입니다. 이들의 여건은 과연 나아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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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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