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이 사라진 종교에 남는 것은

고명섭 기자 2024. 1. 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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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카이로스

성스러움의 경험은 예언자들이나 종교 창시자들에게서 거의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스러움의 경험’이 모두 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비 체험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그 체험 중에 만난 신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또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충실히 가르침을 따르는지를 보아야 한다.

‘구약성서’ 속 예언자 에제키엘. 에제키엘은 네마리 힘센 짐승이 끄는 큰 전차(메르카바)와 그 전차 위에 앉은 야훼를 보는 신비 체험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성스러움’은 종교적 감정의 핵을 이룬다. 이 감정은 어떻게 경험되는가? 종교사상가 루돌프 오토(1869~1937)는 ‘성스러움의 의미’(1917)라는 저작에서 그 감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합리적인 것을 벗어나고 개념적 파악을 거부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오토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설명해보려고 분투했다.

오토가 말하는 ‘성스러움’은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감정이다. 성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두렵고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경험하는 자를 한없이 위축시킨다. 성스러운 대상 앞에 선 자는 자신이 먼지나 재와 같은 존재라고 느낀다. 동시에 성스러움의 경험은 장엄하고도 매혹적이어서 그것을 느끼는 인간을 한없이 끌어올린다. 성스러움은 두렵고 압도적이면서 장엄하고도 매혹적인 신비다. 이런 체험의 전형적인 사례를 기독교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최초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사야는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 위에 야훼가 나타나 하늘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야훼의 커다란 옷자락이 성전을 뒤덮었다. 야훼를 모신 스랍(천사)들이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스랍들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성전이 흔들리고 연기가 성전에 가득 찼다. 이사야는 공포에 짓눌려 부르짖었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스랍이 뜨거운 돌을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었다. 입이 정화된 이사야는 온 땅이 황폐해지리라는 야훼의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이 됐다. 그 얼마 뒤 북이스라엘왕국이 아시리아제국에 멸망했다. 북이스라엘의 열 부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0여년 뒤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이 되던 해에 남유다왕국의 사제 예레미야도 야훼의 무서운 목소리를 들었다. “온 나라가 다 썩었다. 이제 백성들에게 소태를 먹이고 독약을 마시게 하리라.” 야훼는 자신의 말을 전하라고 명령했다. 예레미야는 두려움 속에 소리쳤다. “나의 염통이 터지고 뼈 마디마디가 떨리는구나. 나는 술 취한 사람 같이 되었다. 야훼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그분 앞에서 술에 곯아떨어진 사람 같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부름을 거역할 수 없어 야훼의 말을 알리는 사람이 됐다. 예레미야가 나타나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바빌로니아가 남유다왕국을 휩쓸었다.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 백성 가운데 에제키엘(에스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에제키엘은 앞 시대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무섭고 충격적인 것을 겪었다. 어느 날 에제키엘은 북쪽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폭풍 속에서 네마리 힘센 짐승이 끄는 큰 전차(메르카바)가 나타났다. 그 짐승들의 모습을 에제키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고도 무시무시하게 묘사했다. 전차를 끄는 짐승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가 넷이었다. 얼굴은 인간·사자·황소·독수리 모습이었고, 짐승들의 날개 치는 소리가 너무 커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 전차 위에 야훼가 앉아 에제키엘에게 두루마리 책을 내려주며 받아먹으라고 했다.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니 “꿀처럼” 달았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못된 생각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으면 제 죄로 죽으리라”라는 말을 전하라고 명했다. 에제키엘은 얼이 빠져 7일 동안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예언자들이 본 환상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마력 같은 힘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환상 속에서 예언자들은 인간이 짓는 죄를 규탄하는 신의 말씀을 듣는다. 이런 성스러운 신비를 경험한 사람 중에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마호메트)도 있다. 무함마드가 살던 7세기 초 아랍은 페르시아왕국과 비잔티움제국 사이에 끼여 부족들끼리 끝없이 싸움을 벌였다. 상업 중심지 메카에서는 빈부격차가 커지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외면했다. 경건한 사람이었던 무함마드는 마흔살이 되던 610년 라마단 기간에 히라산의 작은 동굴에서 가족과 함께 기도하다 천사를 만났다.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읽으라(암송하라)!”고 명령했다. 무함마드가 읽기를 거부하자 천사가 달려들어 몸통을 졸랐다. 숨이 막혀 견딜 수 없게 된 무함마드는 천사가 불러주는 대로 복창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으라! 그분은 한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느니라!”

무함마드는 귀신 들려 지껄이는 카힌(무당)이 된 것 같아 두려움과 수치심에 떨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무함마드야! 너는 신의 사도이고 나는 가브리엘이다.” 눈을 들어 보니 사람 모습을 한 가브리엘 천사가 지평선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놀란 무함마드는 천사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어디를 보든 가브리엘이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무함마드는 온몸을 떨면서 동굴로 기어와 아내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신비 체험은 무함마드를 새 사람으로 바꾸었다. 다시 태어난 무함마드는 아랍을 통합하는 예언자의 사업을 시작했다.

조선 말기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도 유사한 체험을 고향 경주에서 했다. 난세의 혼란 속에 천주를 만나려고 수도하던 수운은 1860년 봄 장조카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갔다가 난데없는 일을 당했다.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리는 기운이 있어 마음을 가라앉힐 도리가 없었다. 일어나 집에 돌아오려고 하는데 정신이 흩어져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엎어지고 고꾸라졌다.” 사람들이 급히 수운을 대청마루 위로 끌어올렸는데 “기가 솟구치기도 했다가 꺼지기도 하는 것이 도무지 무슨 병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수운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묻노니 공중의 소리 임자는 도대체 누구요?” 하늘에서 답이 내려왔다. “나는 상제다. 너는 상제도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상제는 수운에게 명령했다. “너는 즉시 백지를 펴고 내가 그리는 부적을 받아라!” 상제는 수운에게 부적을 태워 냉수에 타서 마시라고 했다. 에제키엘이 신이 준 두루마리 종이를 먹었듯이, 수운은 부적 탄 물을 마셨다. 상제는 다시 명했다. “너는 이제 내 아들이니 나를 아버지라 불러라.” 놀라운 체험을 한 뒤 수운은 1년 가까이 하늘의 ‘아버지’를 여러차례 만났다.

수운의 체험에서 특이한 것은 상제가 ‘하느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사탄’ 노릇도 했다는 사실이다. 상제가 수운에게 ‘백의상’(명목상의 재상)을 제수하겠다고 하자 수운은 “나는 이미 상제의 아들인데 어찌 백의상 따위를 제수받겠소?” 하고 거절했다. 또 상제가 ‘조화’를 부리는 권능을 주겠다고 하자 수운은 이것도 거부했다. 예수가 사탄의 시험을 이겨낸 것과 다르지 않은 경험이다.

더 주목할 것은 시대의 비참을 성토하는 상제의 말이다. “네 나라의 운세는 매우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 곳곳의 목민관은 민중을 학대하고 정치를 그르치며 본래의 직분을 망각한 짓들만 하고 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한다. 너는 내 말을 진실로 새겨들어라.” 두려움 속에 다가왔던 상제는 긴 문답 끝에 수운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룩한 존재가 된다. 상제는 수운에게 ‘오심즉여심’, 곧 ‘내 마음’이 ‘네 마음’과 같다고 말한다. 사람이 하늘과 다르지 않은 존귀한 존재라는 얘기다.

성스러움의 경험은 예언자들이나 종교 창시자들에게서 거의 예외 없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스러움의 경험’이 모두 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비 체험의 참다운 가치를 알아보려면 그 체험 중에 만난 신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또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충실히 따르는지를 보아야 한다. 수운의 상제는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대로 수운은 집안에서 거느리던 여종 둘을 해방하고, 그중 한사람은 며느리로 들이고 다른 한사람은 수양딸로 삼았다. 가르침을 즉시 실천했다는 데 수운 신비 체험의 진실성이 있다.

우리 종교의 현실은 어떤가? 신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 있는가? 신을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하는 말을 내뱉는 종교 지도자들이 군림하는 성전에는 신도 떠나고 성스러움도 머물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신 노릇 하는 것은 세속의 욕망이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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