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볼까 공포, 수사기록 열람 어려워…재판도 힘겨운 ‘미투’

오연서 기자 2024. 1. 30.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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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저울 위, 미투 6년 (하)
클립아트코리아.
2018년 1월29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인 ‘이프로스’에 “나는 소망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검찰 내에서 벌어진 강제추행 피해 사실과 인사 불이익의 과정이 기록돼 있었다. 미투의 시작이었다. 수많은 여성이 유폐됐던 성폭력을 증언하고 또 연대했다. 그렇게 6년이 흐른 오늘, 한겨레는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 서지현을 만났다. 서지현의 7번의 재판과 그 이후 법정에 선 미투 사건들을 살피며, 법원의 변화와 한계도 짚었다.

‘미투 운동’으로 법원이 ‘피해자다움’의 전형성에서 벗어나는 진전이 있었지만, 피해자가 법정 안팎에서 겪는 곤란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재판에서 진술을 할 때 가해자와 마주칠까 두려워해야 하며, 자신이 피해자인 사건의 수사기록을 열람하는 것도 쉽지 않다.

피해자들이 특히 공포를 느끼는 것은 법정에서 다시 가해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형사소송규칙에 따라 재판부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화상으로 신문하거나 법정 안에서 피고인을 가리는 차폐 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 피고인을 아예 법정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조처는 의무가 아닌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다. 조현주 대한법률구조공단 울산지부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는 “피해자 보호 요청을 받아들여줄 것인지 미리 답변을 받으면 좋은데 그날 법정에 가야 상황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재판부에 따라 복불복이기도 하다. 피해자는 신문 전까지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피고인을 퇴정시켜달라고 했는데 차폐막만 설치해준 곳도 있다”고 덧붙였다.

피해자가 의견진술을 할 땐 증인신문을 할 때와 달리 ‘피해자 보호’ 규정조차 없다. 신진희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중앙지부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는 “증인신문은 피고인 비대면 방식이 형사소송규칙에 규정돼 있지만 피해자 의견진술 절차에는 별다른 규정이 없다”며 “일부 판사들은 증인신문이 아니니 피고인을 퇴정시킬 수 없다고 하고 진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감형을 노린 피고인들의 ‘기습 공탁’ 역시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한다. 형사공탁이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피고인이 법원에 일정 금액을 내는 것으로 감형 사유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일부 피고인은 피해자 모르게 선고 직전 법원에 공탁을 하고 감형을 받기도 한다.

지난해 10월 한국여성변호사회가 피해자 국선변호사 29명을 대상으로 형사공탁특례제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형사공탁에 대한 피해자 반응을 묻는 질문(복수응답)에 25명(86.2%)이 “(공탁 뒤) 감형 및 집행유예에 대한 불만”이라고 답했다. 22명(75.9%)은 “법원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라고 답했다. 박찬영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은 지난해 12월 ‘형사공탁특례 제도 시행 1주년 점검과 보완 심포지엄’에서 “형사공탁 접수 때 피해자 의사 확인 등 절차를 재판 예규 등에 명시적으로 규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최근 검찰은 기습 공탁의 문제를 막기 위해 공탁금이 납입되면 선고 연기나 변론 재개를 신청하고 피해자의 의사를 재판부에 제출하는 방안을 시행 중이다.

수사기록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신진희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의 몸에서 마약 성분이 나온 사건에서, 피해자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서를 보여달라고 해도 재판부에서 허락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피해자가 양형 등에 대한 의견을 제출할 때 참고하고 싶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내니 그제야 열람·복사를 허락해줬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김지혜 변호사는 “수사기록을 봐야 피고인의 거짓말에 반박할 증거를 낼 수 있는데 그런 기회가 차단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는 수사기록 열람을 재판부에 수차례 신청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고, 피해 장면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도 1심 재판 때에야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대법원이 자폐성 장애가 있는 피고인의 성추행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면서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언급한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지난 4일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이 사건 판결문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강조한 2018년 판례를 언급하며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해당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피고인의 추행에 고의성이 있었느냐가 쟁점이었고, 대법원도 이를 근거로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했다.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 여부와는 무관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이 2018년 판례를 굳이 언급하며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덧붙인 것을 두고 여러 우려가 나온다. 성범죄 피해자 대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하급심에서 (성범죄) 무죄를 선고할 때 인용할 수 있는 대법원 판례가 생겼다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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