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자결 막은 ‘7일의 왕비’ 233년 만의 명예회복[이기환의 Hi-story](119)

2024. 1. 30. 05: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7일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지 233년 만인 1739년 복위되면서 ‘단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종묘에 신주가 안장되는 과정을 그린 반차도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516년 3월 28일 <고려사>(‘세자·명종’)를 읽던 상(중종)이 깊은 한숨을 쉬며… ‘멍’ 하니 있었다.”(<중종실록>)

조선조 중종(재위 1506~1544)이 <고려사>를 읽다가 시쳇말로 ‘멍때렸다’는 기사입니다. 문제의 <고려사> 구절은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 최충수(?~1197)가 태자(희종·재위 1204~1211)의 조강지처(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던 대목’입니다.

최충수 때문에 쫓겨난 태자비가 흐느껴 울자 궁궐이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겁니다. 중종은 신하의 강압에 조강지처를 내쳐야 했던 희종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 겁니다. <중종실록>의 사관도 중종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상(중종)이 신씨(愼氏)의 폐출을 필시 후회한 것이다. 그러나 강한 신하에게 제압돼 폐출했으니, 이제 어찌할 것인가.”

■‘멍때린 중종’

8년 뒤인 1529년(중종 24) 9월 13일 충청도 부여 출신인 김식이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공자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빛깔이 붉고 뿔이 똑바로 났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씨가 왜 폐출됐습니까. 신씨의 덕이 얼룩소만도 못 하단 말씀입니까.”(<중종실록>)

‘얼룩소의 비유’는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인데요. 붉고 뿔이 곧은 소에 비해 ‘얼룩소’는 못난소의 대명사였죠. 공자는 그러나 ‘출신이 천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반드시 쓰임새가 있다’고 가르친 겁니다.

두 기사에서 동일인물이 등장하죠. 바로 ‘신(愼)’씨입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1487~1557)를 가리킵니다. ‘7일의 왕비’로 알려진 분이죠.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시리즈물 학술총서 중 7번째 책을 펴냈는데요. <외규장각의궤 연구: 추상·복위부묘봉릉>입니다.

<외규장각 도서(의궤)>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했다가 2011년 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책(297권)이죠. 이번 출간된 책은 당대에는 홀대받았거나 혹은 폐위됐다가, 훗날 추상(존호를 올림) 혹은 복위(신분 회복)된 분들을 다뤘습니다. 이분들의 추상·복위 논의와 의례의 모든 과정을 수록했습니다.

1560년 9월 2일 반정군이 집을 에워싸자 진성대군(중종)은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부인(신씨)은 남편을 만류하면서 “만약 반정군의 말머리가 집을 향했다면 죽어야 하지만, 궁궐을 향했다면 대군을 호위하는 것이니 알아보라”고 했다. 과연 반정군의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남편의 자결을 막은 부인

이중 ‘7일의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를 살펴보려 합니다. 신씨는 문신 신수근(1450~1506)의 딸입니다. 신씨는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훗날 중종)과 혼인했습니다.

그런데 얽히고설킨 관계가 운명을 가릅니다. 연산군의 부인이 신수근의 동생(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연산군의 부인(거창군 부인)과 진성대군(중종)의 부인(단경왕후)은 고모와 조카 사이였던 겁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의 일화가 눈에 띕니다. 반정군이 진성대군의 집을 에워쌌습니다. 진성대군은 반정군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신씨가 남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말렸답니다.

“에워싼 군사의 말머리가 집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다면 공자(진성대군)를 호위하는 겁니다.”

알아보니 반정군의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었습니다. 만일 신씨의 만류가 없었다면 진성대군은 자결하고 말았을 겁니다.

■‘조강지처를 내쫓다’

하지만 반정 끝에 즉위한 남편(중종)과 달리 신씨의 운명은 급전직하합니다. 연산군의 매부이기도 한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죄’로 죽임을 당했던 겁니다.

아버지의 선택은 딸(신씨)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반정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1506년 9월 9일이었습니다. 이때 반정 세력이 총출동해 중종을 다그칩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궁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왕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니… 밖으로 내치소서.”

그러자 중종은 “조강지처를 어떻게 내치겠냐”고 난감해합니다. 그러나 반정 세력의 시퍼런 서슬에 중종은 나약한 군주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땅히 중론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 당장 오늘 저녁에 나가라 해라”는 명을 내립니다.

■죽은 사람 취급당한 신씨

그런데 ‘신씨를 쫓아낸 이날의 기록’이 훗날까지 논란을 일으킵니다. 반정 세력이 ‘신씨를 왕비로 삼을 경우~’라는 가정법을 쓴 대목입니다. 그래서 신씨가 애초부터 왕비로 책봉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한마디로 신씨는 왕비에서 폐위된 것이 아니라 중종의 진성대군 시절 부인 신분으로 쫓겨났다는 거죠.

그들은 반정 성공 후 19일이 지난 9월 21일 명나라에 중종의 책봉을 받기 위한 사신단을 보내는데요. 이때 중종의 왕위계승이 정변이 아니라 선위를 통해 이뤄졌음을 고하는 ‘9가지 예상문답’을 마련하는데요.

그중 신씨와 관련돼 기막힌 ‘가짜뉴스’도 들어 있습니다. “만약 명 황제가 ‘왕비를 책봉했느냐’고 물으면 ‘전하(중종)의 대군 시절 부인이 병으로 죽었고, 아직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고 대답한다”(<중종실록>)고 했어요.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의 귀환 행사. 2011년 임대형식으로 귀환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외규장각 관련 학술총서를 계속 펴내고 있다. /연합뉴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편이 왕이면 부인은 자동 왕비

<국조보감>과 <선원보략> 등 왕실 기록은 그러나 “신씨는 9월 2일 반정 후 중전이 됐고, 9일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또 1557년(명종 12) 12월 7일 승하한 신씨를 위해 쓴 졸기는 “중종이 즉위하자 비(신씨)도 정위(중전 자리)에서 하례를 받았다”(<명종실록>)고 했습니다. ‘신씨=7일의 중전(왕비)’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건데요.

233년 뒤 영조가 신씨를 왕비(단경왕후)로 올리며 반대 여론을 잠재운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날 봐라. 내가 임금이 됐을 때 내 부인은 이미 중전이 됐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날 신비(단경왕후) 역시 자동으로 중전이 된 것이다.”(<영조실록> 1739년 3월 11일)

■중종의 임종 때 부른 여인

어찌 됐든 남편에게 쫓겨난 모양새가 되지 않았습니까. 신씨는 사저로 쫓겨나 불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사이 남편은 반정 세력의 핵심인 박원종(1467~1510)의 조카(장경왕후 윤씨)와 재혼합니다.

하지만 중종의 속은 편치 않았나 봅니다. <국조기사>는 “중종은… 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마다 신씨의 사저에 ‘임금이 타고 온 말’을 보냈다. 신씨는 늘 흰죽을 쑤어 손수 말을 먹여 보냈다”고 했습니다.

또 “폐비 신씨의 사저(어의동)에 도둑이 들었으니 경비 군사를 4명에서 6명으로 늘리라”(<중종실록> 1528년 1월 29일)는 명을 내립니다. 어의동 자택은 중종이 대군 시절 부인(신씨)과 알콩달콩 살던 집이었습니다.

1544년(중종 39) 11월 15일 죽음을 앞둔 중종이 사경을 헤맬 때인데요. 급박한 순간의 실록 기사가 심상치 않습니다.

“통화문(창경궁 북쪽 문)을 열어놓았기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상(중종)이 임종 때 폐비 신씨를 보고 싶어했기에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진위를 떠나 중종이 신씨에게 진 마음의 빚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죠.

■보류 상소문

신씨를 향한 동정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런데 동정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인종)를 낳고 승하하는데요(1515). 이때 놀라운 상소문이 올라옵니다.

담양부사 박상(1474~1530)과 순창군수 김정(1486~1521)이 “신씨를 복위시켜 원통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신씨를 폐위하신 명분은 무엇입니까… 반정공신들이… 임금을 다리 사이와 손바닥 위에 놓고 희롱하듯 겁박하고, 국모를 병아리 팽개치듯 쫓아냈으니….”

두 사람은 ‘반정공신=난신적자’로 지목하면서 “난신적자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이 ‘춘추’의 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장경왕후가 돌아가셨으니 지금이야말로 신씨를 복위시킬 호기”라고 중종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중종은 어정쩡한 반응을 보입니다. 중종은 “이런 큰일을 하급관리들의 말을 듣고 처리할 수 있겠느냐”면서 “상소문을 승정원에 보관해두라”는 명을 내립니다. 한마디로 ‘보류’한 겁니다. 중종이 돌아가는 조정공론을 살피려 한 겁니다.

신씨 복위 문제는 숙종 때 또 불거져 나왔다. 이때 “중론을 구한다”는 숙종의 명에 따라 모인 491명의 문무백관이 신씨의 복위 문제와 관련, 각자의 의견서를 냈다. 찬반양론이 팽팽했지만, 반대 의견 가운데는 신씨의 복위 자체는 온당하지만 선조(중종)가 내린 결정이어서 선뜻 복위에 찬성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다수였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기묘사화의 씨앗

하지만 대사헌 권민수(1466~1517)와 대사간 이행(1478~1534)이 앞장서서 박상·김정을 탄핵하고 나섭니다.(8월 11일)

“신씨가 복위되면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인종)는 어찌됩니까. 또 그 지위가 장경왕후보다 앞선 자리에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피의 보복을 감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중종실록>)

중종도 섣불리 신씨의 복위를 단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정공신들을 난신적자로 규정하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정통성은 어찌됩니까. 결국 상소문을 올린 박상과 김정은 유배형의 처분을 받았는데요.

이 ‘신씨 복위’ 논쟁은 그러나 또 한 번의 비극을 잉태합니다. 사간원 정언 조광조(1482~1519)가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촉구한 대사헌과 대사간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조광조의 끈질긴 대간 탄핵은 조정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폐비 신씨의 복위 논쟁은 기묘사화(1519)의 발발까지 연결됐습니다. <중종실록>은 “박상·김정의 상소문은 올바른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워낙 논쟁이 격화돼서 결국 사림이 반목해 참혹한 화(기묘사화)를 불렀다”(1515년 8월 8일)고 평했습니다.

중종이 폐비 신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모양이다. 중종이 승하하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창경궁 통화문을 열어둬 신씨를 만났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안타까워, 어쩌나’

‘폐비 신씨의 복위’는 중종이 셋째 부인(문정왕후 윤씨·1501~1565)을 맞이함으로써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폐비 신씨의 처지가 딱하다는 것은 여러 대가 지나도록 불변의 여론이었나 봅니다.

숙종 연간에 ‘폐비 신씨의 복위’ 운동이 일어납니다. 1698년(숙종 24) 9월 30일 전 현감 신규(1659~1708)가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 겁니다. 이때 숙종의 명에 따라 대신·종친·문무백관들이 궁정에 총출동했고요.

또 지방 대신 및 유신까지 자그마치 491명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찬반 여론이 워낙 팽팽하자 숙종은 “참으로 난처한 측면이 있다”고 토로했는데요. 결국 복위는 이뤄지지 못했고요. 다만 별도의 사당을 세우고, 신주에는 ‘폐비 신씨’라 해서 ‘왕비에서 폐위된 사실’을 적시하는 것으로 일단락지었습니다.

숙종은 신씨를 쉽게 복위시켜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어제시로 읊었습니다.

“옛날 왕비로서 지존의 짝이더니/ 밤에 건춘문으로 나감에 백성들이 원통해했네/ 슬픔과 한스러움에 어찌 추복의 의논이 없으랴만/ 어쩌나. 이제 와서 임금 마음 알 수 없음을….”

■538명 중 537명이 ‘복위’ 찬성

숙종의 마음을 알아준 이는 영조였습니다. 1739년(영조 15) 3월 11일 유생 김태남이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어찌 백성들만 억울하게 여기겠냐. 내 마음도 아프다”고 공감하면서 밀어붙입니다.

영조는 내외의 의견을 폭넓게 모으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3월 15일 종친 및 문무백관이 총출동해 신씨의 복위를 두고 찬반 토론을 벌였고요. 지방 관리 및 유생들의 의견도 받았습니다. 무려 538명이 의견서를 냈습니다.

경기 양주 장흥에 조성된 단경왕후 신씨의 온릉. 1506년 9월 2일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남편이 즉위해 왕후가 됐다가 불과 7일 만에 반정 세력에 의해 폐위됐다. 233년 만인 1739년 복위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이중 1명을 제외한 537명이 ‘신씨 복위’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영조실록> 1739년 3월 15일)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는 538명의 의견을 전부 기록했는데요. 지독한 의견수렴이기도 하고요. 또 그 500명이 넘는 의견서를 기록으로 남긴 것도 대단합니다. 아무튼 신씨의 복위가 결정되자 영조는 감회어린 소감을 밝힙니다.

“아! 황량한 신비의 무덤에 난 풀은 지금 몇 년이 지났는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

<승정원일기> 1739년 3월 15일자. 영조가 중종반정 때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 문제를 거론하면서 무려 538명의 전·현직 및 지방관리와 유생들의 의견서를 받았다. <승정원일기>는 3월 15일자에 538명의 명단과 그 의견서를 모두 기록했다. 관련 내용만 23쪽에 달한다. 의견을 낸 538명 가운데 삼가현령 이도익을 뺀 537명이 복위에 찬성표를 던졌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신씨의 복위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요. 시호는 ‘단경’, 능호는 ‘온릉’으로 결정됐습니다. 단경왕후의 신주는 태묘의 중종실에 모셨습니다. 신주의 위치는 중종의 ‘원후’, 즉 첫 번째 부인 자리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그저 ‘7일의 왕비’와 ‘비운의 러브스토리’쯤으로만 알던 분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분에게는 이렇게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기환의 Hi-Story’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