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알았는데 ‘요리’는 몰랐던 남자…새 장르 ‘K치즈’ 만든다 [푸디人]

안병준 기자(anbuju@mk.co.kr) 2024. 1. 28. 14: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푸디인-12] 20년간 한우물 파온 조장현 ‘치즈플로’ 대표

내가 처음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레스토랑 ‘치즈플로’에 방문한 날은 2021년 4월쯤이었던 거 같다. 그날은 날씨가 참 따듯했고 햇살이 눈부시게 비췄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자생활 10년이 지난 시점에 운좋게 재충전 시간을 갖고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내 마음 속 여유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아 미네랄감 풍부한 샤르도네 와인 한 병을 시켜 얼음 바구니에 넣어두고 여유롭게 햇살을 즐겼다. 그리고 플레이트 위에 나온 수제치즈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공장에서 공산품처럼 대량으로 찍어 나오는 치즈보다 담백했고, 향이 독특해 코끝을 자극했으며 치즈의 다양성에 매료됐다. 그렇게 한남동에서 몇개월 머무는 동안 치즈플로를 3~4번은 더 찾아갔었다. 아쉽게도 그때는 조장현 치즈플로 대표(56)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게 좋은 추억을 한가득 안고 ‘치즈플로’와는 더 이상 인연이 없을 줄 알았건만, 2년 뒤인 작년 11월 와인아카데미에서 ‘치즈&와인’을 주제로 한 강연자로 조 대표를 처음 보게 됐다.

약 2시간에 걸쳐 치즈에 대한 박식한 설명을 내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치즈와 와인의 페어링에 대한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직접 만든 치즈를 오랜만에 맛보니 2년 전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35살 ‘요알못’도 셰프 됐다…“청년들이여 도전하라”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올해 1월 우연히 조 대표가 자신의 20여년 요리 인생 여정을 담은 책을 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더 이상 그와의 만남을 놓칠 수 없었다. 그의 신간 제목은 ‘치즈 마이 라이프’.

그의 책에는 라면 정도 끓일 수 있었던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삼성전자를 10년간 다니다가35살의 늦은 나이에 요리 유학길에 올라 치즈 장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고는 그에게 20여년 전 도전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치즈플로’에서 그를 만나자마자 건넨 질문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 대표는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삼성전자 그만두고 요리 배우러 런던으로 갔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또한 청년들에게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지만 머물기보다 도전을 선택한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도전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장점을 찾아 도전하라고 조언하고 싶다”면서 “너무 과하지 않은 욕심 선에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우연이나 행운이 찾아오면 거기서 스파크가 일어날 것입니다”고 말했다.

와인아카데미에서 ‘치즈&와인’을 주제로 강연 중인 조장현 셰프. 안병준 기자
IMF 위기가 심어준 셰프의 꿈…최고의 원동력은 가족
조 대표가 셰프의 꿈을 꾸게 된 것은 1997년 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부터였다. 1992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한 그는 1994년 삼성전자 팩스 수출팀에서 좋은 실적을 쌓아갔으며 1997년 10월에는 헝가리 지역전문가로 선발됐다.

그러나 IMF 위기가 터지면서 지역전문가로 가려던 그의 일정은 무산됐고 평범한 회사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미국 모던 요리의 선구자인 셰프 찰리 트로터의 자서전을 읽고 요리에 대한 꿈이 커졌다. 찰리 트로터도 어렸을 때부터 요리를 시작한 게 아니었으며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요리에 대한 열정으로 진로를 전향해 독학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요리 유학을 떠나겠다고 하니 공무원 출신인 부친 반대가 거셌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더 강해졌다.

조장현 셰프가 치즈 만드는 모습. 치즈플로 제공
‘왜 요리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를 좋아하고 잘했던 기억이 있어 디자인 분야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셰프라는 직업이 저를 이끌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 대표는 2001년말 드디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인 삼성전자의 문을 박차고 나갔고 이듬해인 2002년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르 꼬르동 블루’ 요리 학교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그의 나이 35세였다. 아내는 물론 초등학교 1~2학년이던 아들과 딸까지 가족 3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도전하기에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조 대표는 “가족이 있는 상황이라 독단적으로 결정하기는 힘들었으나 아내가 제 생각에 동의를 해줬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가족에게 공을 돌렸다.

타지에서의 요리 공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혹했다. 직장생활 10년간 벌어놓은 돈은 월세와 생활비로 야금야금 없어졌다. 약 4개월여간의 요리학교 초급 코스를 마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운 좋게 미슐랭 3스타였던 셰니코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의 강행군과 늦깎이 동양인 요리사에 대한 인종차별적 대우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조 대표는 “그럼에도 응원하는 가족들이 함께 있었기에 묵묵히 버텼고 르 꼬르동 블루로 돌아가 중급과정을 시작할 때는 부쩍 성장해 초보티를 벗은 칼잡이가 되어 있었죠”라고 말했다.

성공하고 실패하고…험난한 아티장 푸드의 길
조장현 셰프가 직접만든 치즈와 샤퀴테리가 치즈플로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습. 안병준 기자
2004년 귀국한 그는 먼저 한국 레스토랑 경험을 쌓기 위해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었으나 답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가량 구직활동을 하다가 더 이상 지체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예 본인 가게를 차리기로 했다.

그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2005년 조 대표가 처음으로 연 양식 레스토랑 ‘키친플로’는 외국 음식에 익숙한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이라는 상권 특성과 영국에서 최신으로 유행하던 요리를 선보인 덕분에 인기를 끌었다.그러나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조 대표는 “성공에 취해 매장 규모를 2층까지 확장했는데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매출이 줄었고, 브런치 레스토랑과 이자카야가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아이템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찰나, 치즈와 샤퀴테리(염장, 훈연, 건조 등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햄)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에서는 치즈와 샤퀴테리가 장인 정신으로 소량만 빚어낸 음식인 아티장 푸드로 평가된다. 국내에서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제품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100% 수제임을 고객들에게 알리면 인기를 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그때부터 치즈 만들기에 매진했다. 치즈에 대한 내공을 쌓기 위해 2013년에는 뉴질랜드의 오버더문 치즈스쿨로 유학길에 또다시 올랐다. 그는 거기서 1달간 빠르게 치즈 셰프 닐 윌먼의 치즈 마스터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2019년까지 5년 동안 치즈를 만들었지만 품질이 들쑥날쑥했다. 2019년 프랑스에서 치즈를 또 배우고 나서 1년여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품질이 안정될 수 있었다. 또한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는 샤퀴테리 관련 수업과 행사를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치즈플로의 치즈와 샤퀴테리 제품들. 안병준 기자
그가 만든 치즈는 짦은 숙성기간을 통해 대량생산 하는 공장 제품과 달리 원유, 렌넷(응고제), 유산균, 소금만을 섞어 오랜 시간 자연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친 ‘자연 치즈’이다. 다양한 품종을 혼자 만들다 보니 그 양도 많지 않지만 수지타산을 맞추기는 더욱 어려웠다. 게다가 치즈를 위한 우유를 착유하는 목장을 찾는 것도, 치즈 만들기 위한 각종 설비와 부자재를 수입하는 것도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선도자의 길은 너무나 험난했지만 그 노력이 빛을 발했다.

2010년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가스트로펍 형태의 ‘쉐플로 도곡점’을 열고 직접 만든 샤퀴테리를 선보였다. 다행히 고객 반응이 좋아 장사가 잘됐고 자신감을 얻어 2012년 신사점을 추가 출점하고 뉴질랜드에서 배운 치즈와 샤퀴테리를 선보였다. 게다가 2016년에는 한남동에 지금의 치즈플로까지 열어 총 3개의 매장을 갖게 됐다.

그러나 혼자의 몸으로 매장에 필요한 치즈를 만드는 것은 고단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불어닥치면서 요리 인생 최악의 위기가 닥쳐왔다. 결국 2019년 쉐플로 신사점을 폐업했고 대출을 받지못하면 더 이상 운영하기 힘든 상황까지 악화하면서 2020년 2월 쉐플로 도곡점도 정리했다.

“세계대회서 한국적 치즈 선보일 것”
20년 요리인생을 담은 신간 ‘치즈 마이 라이프’를 출간한 조장현 셰프. 안병준 기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2020년 5월쯤 수요미식회와 이듬해에 SBS 생활의 달인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예약 문의가 잇달았고 치즈 포장 주문량 역시 대폭 늘었다.

지금은 한남동 치즈플로 외에도 작지만 샤퀴테리를 만드는 효창공방과 치즈를 생산하는 파주의 농업법인 ‘더플로’도 운영 중이다. 같이 치즈와 샤퀴테리를 만드는 직원은 각각 1명씩 2명에 불과하지만 아티장 푸드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지금까지 매진해왔다.

그에게 향후 목표를 물어보자 한국 장인의 열정과 고집이 묻어나왔다.

조 대표는 “현재 미국과 영국에서 세계치즈대회에 열리고 있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게 목표”라며 “최근에 일본 사람이 일본의 전통을 강조한 치즈로 수상을 했는데, 저도 한국적 특성을 담은 치즈를 세계에 알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K-아티장 치즈가 이름 떨칠 그 날이 하루 빨리 오길 응원한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