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어머니,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한겨레 2024. 1. 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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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박인환, ‘검은 신이여’)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알 파쿠라 학교를 공격했다는 뉴스를 보다가, 종군작가단으로 6·25전쟁 한가운데서 썼던 박인환의 시가 떠올랐다. 뉴스에서는 잿더미가 된 포격의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담요에 싸서 옮기고 있었다. “폭발이 세번 일어날 때 여기 서 있었어요. 시신 한구와 목이 없는 시신을 내 손으로 옮겼어요. 신께서 피의 복수를 해줄 거예요.” 어린 소년이 울면서 부르짖던 말이다. 그 울부짖음은 74년 전 학도병 ‘이우근(1934~1950)의 부치지 못한 편지’와 겹쳐졌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 어머니,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1950년 8월10일 쾌청한 날씨”에 당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이었던 이우근 학생이 포항여자중학교에서 북한군과 대치 중에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의 일부다. 이튿날 그는 전투 중 전사했고 그의 일기는 피에 얼룩진 채 옷 속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의 기습작전으로 시작된 가자지구 전쟁도 4개월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이어 이스라엘군이 크리스마스에 시리아를, 새해에는 레바논을 공습했다. 2주 전에는 미·영군이 홍해의 예멘 반군 후티를 공습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서유럽과 중동·러시아·중국,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인과 무슬림, 이스라엘·사우디와 이란·시리아·레바논·예멘의 대결 구조로 확전되고 있다. 오늘도 유엔이 가자지구에 질병과 기근 위험을 경고했고, 우크라이나 포로 65명을 태운 수송기가 격추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모든 계획과 모든 아이디어 뒤에는 총, 혹은 탱크, 혹은 원자폭탄이 있다. 아니면 권총이 있거나, 하다못해 오래된 브라우닌 권총이라도”라고 일갈한 이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했던 영화예술가 요나스 메카스였다. 전쟁을 시작한 사람은 많지 않을 수 있으나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욕망과 논리는 무궁하다. 전쟁의 주체 또한 마찬가지다. 전쟁 당사자는 쌍방이겠으나 실제로 그 뒤에 숨은 실세 혹은 조력자들은 고구마 넝쿨이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크고 작은 원인이 쌓여 한 지점에서 터지는 게 전쟁이다.

“완충구역 북 해안포 사격에 따라 우리 군은 오늘 오후 해상사격 예정입니다. 서해5도 주민께서는 만일의 사태에 유의 바랍니다.” 도민들에게 대피 안내방송과 문자가 전송되었다. 지금은 가물가물해진 민방위훈련이나 등화관제 훈련이 아니라 새해 연평도의 ‘실제상황’이었다. 국민 전체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런 재난 문자를 받는다면?

유엔군(미군), 중국군, 북한군 사령관이 서명했던 휴전협정 이후 70여년이 지났다. 여전히, 최근 들어 부쩍, 북한은 포사격, 핵실험, 미사일 도발을 하며 대한민국의 ‘완전 소멸’ 운운하며 위협 중이다. 한반도 정세가 6·25 전쟁 직전만큼이나 위험하고 김정은의 ‘전쟁 준비’ 경고를 허세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미국 전문가들의 경고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홍해의 일이 남의 나라 얘기로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다.

대만 총통선거를 필두로, 인도네시아 대선과 총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대선, 인도 총선, 유럽의회 선거, 미국 대선, 영국 조기 총선 등이 올해 치러야 할 세계적인 선거들이다. 그 한가운데 우리의 4월 총선도 있다. 선거 결과들은 세계정세와 경제는 물론 전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중, 미-소, 미-중동 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형세가 한반도 정세이기도 하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포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16살 이우근이 마지막으로 꿈꾸었던 건 어머니와 상추쌈과 샘물 한사발이었다. 국가도, 이데올로기도, 승패도, 그 어떤 명분이나 논리도 아니었다. 하루빨리 세계의 전쟁이 종식되기를. 70여년 전 겪었던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여전히 휴전 상태인, 우리로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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