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 포개어 바라본 확장된 세계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1. 2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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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준과 디스위켄드룸
‘레이어 연구 90∼93’
‘공기의 층위’ 연작 등
평면의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이미지
물리적 층위 시각화
디스위켄드룸 수년간
국내 신진 유망 작가
해외 미술현장 연결
“관계 네트워크 확장
더 넓은 세계로 도약”
◆홍성준, 회화의 망막에 맺힌 이미지들
매끈한 화면 가득 맺힌 물방울 하나. 정교하게 묘사한 여린 막 위에 빛의 환영이 여울진다. 홍성준(37)은 평면 회화의 물성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다. 물질에 관한 동시대적 관심사의 연장선상에서, 고전적 표현 매체인 회화의 정체성을 그만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태도다. 작가는 캔버스 위 겹겹이 쌓인 이미지의 물리적 층위를 의식하며 물감의 부피와 질감, 붓과 화면의 규모를 섬세하게 재고한다. 그러기에 그의 회화가 내보이는 것은 때로 시각적 환영에 앞서 매체 및 재료의 잠재적 속성이다. 투명에 가까운 물감의 막을 섬세하게 겹쳐 그린 ‘레이어 연구(Study Layers) 90∼93’(2024) 연작은 깊이에의 환영을 선보이는 장면인 동시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의 물리 구조를 극적으로 해체한 개념적 전개도이기도 하다.
‘레이어 연구 90’(2024)
‘공기의 층위(Layers of the Air)’(2024) 연작은 저마다 크고 작은 물방울의 형상을 묘사한다. 2020년경 하늘을 촬영한 사진 속 우연히 포착된 맑은 비눗방울의 모습에서 착안한 도상이다.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중첩된 이미지의 층계를 드러내는 데 적합한 소재로 여겨 꾸준히 차용해 왔다. 활자로 주어진 작품명은 방울진 피막 내외의 공기를 지시함으로써 보는 이의 관심을 물방울 너머의 현상 세계로 확장한다. 화면이 궁극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공기도 물도 아닌, 그것이 만들어낸 현상 그 자체이다. 공기를 품고 공중에 떠오른 투명한 막 주위에 무지개의 파편이 빛난다. 가느다란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은 잠시 두 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껍질의 안팎으로, 망막에 맺힌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홍성준은 보이는 세계를 그림으로 변환하는 일의 의미와 방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한다. 시각 경험과 회화 매체 각각에 관한 질문에 기반하여 자신만의 실험을 이어 가는 면모다. 붓 자국을 따라 재단한 코어 합판 위에 새벽과 밤하늘의 빛깔을 채색한 ‘터치 더 스카이(Touch the Sky)’(2024)는 촉각적 부피감을 드러낸다. 붓에 실린 물감의 흔적이 커다랗고 단단한 평면으로서 확장되어 전시 공간에 부유한다. 후면에 더한 형광 안료가 단차를 두고 벽에 닿으며 은은한 노을처럼 스미도록 연출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을 고정된 화면 안에 담아내고자 한 결과다.

홍성준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서울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회화 작가다. 에프앤아트 스페이스(2014, 서울), 63아트(2018, 서울), 라흰갤러리(2019, 서울),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2020, 서울), 파이프갤러리(2022, 서울), 갤러리BHAK(2022, 서울), 프롬프트 프로젝트(2023, 서울)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서울교육대학교 샘미술관 외 다수 기관이 연 단체전에 참가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베를린 콘펠트 갤러리의 ‘68 프로젝트’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작업했다.

◆홍성준·필리프 로에슈 2인전 ‘플립 오버’

미술은 자신 안팎에 놓인 다양한 관계를 매개한다. 재료의 성질과 화면의 환영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동안 그리는 손과 바라보는 시선은 끝없이 맞닿고 또 헤어진다. 작가와 관객의 시야가 포개어지는 순간마다 서사는 거듭 쓰인다. 전시라는 사건을 직조하는 동력 또한 작품을 둘러싼 대화적 시간 가운데서 생겨난다.

홍성준이 한남동 소재의 갤러리 디스위켄드룸(대표 김나형)의 2인전 ‘플립 오버(Flip Over)’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 작가 필리프 로에슈(44)와 함께 선보이는 전시다. 박지형 큐레이터가 담당한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매체와 기법으로 표현을 발전시킨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하나의 공간 안에 중첩해 보는 자리로 마련됐다.
‘공기의 층위’(2024) 디스위켄드룸 제공
홍성준이 평면 캔버스에 그린 이미지의 매끈한 표면에 집중한다면, 필리프 로에슈는 상대적으로 묵직한 부피감을 지닌 돌과 책 등의 지지체 위에 고전에서 현대를 아우르는 미술사 서적에서 발췌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세밀한 필치로 묘사한다. 그리기의 행위를 통하여 텍스트를 이미지로 전환하는 일이다. 붓으로 그린 낱낱의 책장 속 문맥은 해체되고, 문자는 그림이 된다. 홍성준은 회화의 물성을 통하여 눈앞의 시각세계를 재정렬하고, 필리프 로에슈는 문자 언어로 쓰인 역사의 파편을 현재의 시공으로 불러들여 직관적 이미지로 재탄생시킨다.

각자의 문화권 내에서 익힌 지식과 감각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새롭고 특별한 운율을 만들어낸다. 저마다 서울과 베를린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는 두 작가의 만남은 디스위켄드룸에 의해 이루어졌다. 작품세계를 공유하고 태도를 참조하며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디스위켄드룸은 2015년 처음 문을 연 상업 갤러리다. 2021년 지금의 한남동 위치로 이전하며 전시 공간 및 기관 정체성을 재정비했다.

◆촘촘히 맺은 관계의 확장: 더 큰 세계를 향하여

디스위켄드룸의 김나형(45) 대표는 수년간 국내 유망작가들을 해외 미술 현장에 연결하는 작업에 공들여 왔다. 2021년 합류한 박지형(34) 큐레이터가 그의 곁에서 기획 및 세일즈 업무 전반에 힘을 보태고 있다. 박지형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예술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리즈대학교 박물관학 석사 및 영국 코톨드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미술사 석사를 취득했으며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큐레이터다. 광주비엔날레(2015∼2017), 페리지갤러리(2017∼2019)에 재직했으며 독립 큐레이터로서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2018, 조원동 강남아파트), ‘멀고도 먼’(2021, 온수공간), ‘최수앙: 플루리버스’(2022, 갤러리 에스피) 등 다수의 전시를 선보였다.
박지형 큐레이터(왼쪽)와 홍성준.
김나형과 박지형의 협업 관계는 보통의 기관 대표와 직원의 그것보다 각별하다. 서로 진솔하게 대화하고,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누며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간다. 그와 같은 소통 방식은 작가와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기관의 특색을 유지하려는 노력 한편으로 개별 작가 작품세계에 관한 성실하고 다각적인 이해의 중요성을 명심하는 면모다. 이들은 그렇듯 촘촘히 맺은 관계망을 확장하여 더 큰 세계로 도약을 시도한다. “지난 2년여 중국, 홍콩, 대만, 일본 등의 아시아권과 독일, 영국, 이스라엘, 미국 등 세계 곳곳의 기관 및 작가들과 협력 관계를 쌓아 왔다”는 설명이다. “작품 판매를 넘어 작가와의 동반 성장, 촘촘한 전시 기획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에게 기획전은 역량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이야기가 뒤따른다.

디스위켄드룸이 주목하는 작가군은 주로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 세대다. 작가로서 역량을 키우고 작품세계의 기반을 탄탄히 하는 과정에 동행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자는 의지다. 상대적으로 높은 예산과 노력이 투입되는 해외 시장 진출에서, 성장 단계 작가군에 주력하는 일은 위험 부담의 크기만큼 상호 진심 어린 애정과 믿음을 요구한다. 디스위켄드룸은 이달 말 교토에서 이채원, 김서울, 지희킴 등 소속 작가 단체전을 선보이며 2월에는 베를린에서 개최되는 단체전에 김진희의 작품을 출품한다. 5월에는 상하이에서 김진희와 최지원의 2인전을, 10월에는 베를린에서 박지나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연중 국내에서는 영국 작가 애덤 보이드의 개인전 및 중동 작가의 개인전, 한국, 독일, 미국 작가들로 구성된 단체전을 준비 중이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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