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내 것이로세”···목숨 걸고 북한산 오른 이성계의 한마디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 2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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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나니···” 북한산, 도봉산에 열광한 조선의 학자들
옛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북한산. “어진이는 산을 좋아해 산 같이 고요하다(仁者樂山 仁者靜)”는 논어의 말을 따라 조선선비들은 수양을 위해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산을 즐겨 찾았다. 왼쪽이 만경대, 오른쪽이 인수봉. 인수봉 좌측으로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가 살짝 보인다. [배한철 기자]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졸본부여에서 남하한 동명왕의 아들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도읍을 정했다는 <삼국사기> 온조왕조 기록이다. 부아악은 삼각산(三角山), 즉 북한산을 말한다. 북한산은 우리나라 다섯 개의 명산 중 하나이자 중앙의 산이다. <국조보감> 등 여러 문헌들은 “오악이 있는데 동악은 금강산, 서악 구월산, 남악 지리산, 북악 백두산, 그리고 중악이 삼각산”이라고 했다. <동국여지지>는 또 북한산을 “한성의 진산(鎭山)”이라고 했다.

화강암의 지각변동으로 생성된 북한산은 산세가 웅장하다. 32개의 험준한 바위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봉우리들 사이로 10여개의 계곡이 굽이굽이 흐른다. 조선시대 수도방어를 담당했던 북한산성과 이궁지,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터, 진관사·문수사·태고사·도선사·승가사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사찰도 즐비하다.

윤선도·이덕무 등 최고 문장가들 “북한산 목숨과 바꿀 절경” 찬사
조선말기 도성도. 뒤쪽에 북한산이 그려져 있다. 왼쪽부터 문수봉, 보현봉, 노적봉, 백운대, 인수봉 순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산 홍지문(일제강점기). 홍지문과 탕춘대성(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기 위해 쌓은 성곽) 뒷쪽으로 북한산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여러 봉우리 중 백운대(836m)와 인수봉(810.5m), 만경대(800.3m) 일대 경관이 제일 빼어나다. 주봉인 백운대에서는 서울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이면 서해 섬까지 조망된다. 시조시인 고산 윤선도(1587~1671)는 17살이던 1603년(선조 36), 북한산 절에서 공부하다가 다음의 시를 지었다. “산이여 산이여 어찌 그리도 높은고(有山有山何崔嵬), 한양의 북쪽, 고양의 동쪽이요(漢陽之北高陽東). 우뚝하다 세 송이 푸른 연꽃(亭亭三朶碧芙蓉), 창공을 떠받치며 북두까지 솟구쳤네(聳入斗極撑靑空).”<고산유고>

하늘 드높이 치솟은 북한산 세봉 우리를 푸른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정약용(1762~1836)도 <다산시문집>에서 “어느 누가 뾰족하게 깎아 다듬어(誰斲觚稜巧), 하늘높이 이 대를 세워 놓았나(超然有此臺誰)”라고 했다.

백운대 등산길은 바위절벽을 올라가야해 난코스였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는 “조부인 부사공(강계부사 이필익)이 유언으로 ‘백운대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을 먹지말라’고 하였다”고 했다. 하돈(河豚)은 임진강에서 잡히는 황복으로, 맛이 일품이지만 맹독을 지녀 ‘죽음과 맞바꾸는 맛’으로 불렀다. 바위절벽을 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백운대 역시 죽음과 맞바꿀 만큼 절경으로 통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 1392~1398)도 이 위험한 백운대를 정복했다. 조선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 수록한 관찬 시문집 <열성어제> 맨 첫부분에 이성계가 직접 지은 ‘등백운봉(登白雲峰)’이 실려있다. “칡넝쿨 부여잡고 백운대에 올라보니(引手攀蘿上碧峰), 암자 하나 흰구름 위에 솟구쳐 보이네(一菴高臥白雲中). 눈 앞에 펼쳐진 곳 모두 내 것이라면(若將眼界爲吾土), 중국 중원과 강남 땅인들 어이 마다하리( 楚越江南豈不容).”

이성계, 칡넝쿨 잡고 백운대 정복···수양대군, 바위산 나는듯 등반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 지금은 철계단, 쇠줄이 설치돼 어렵지 않게 올라가지만 조선시대에는 넝쿨이나 밧줄을 타고 등반해야만 했던 위험한 코스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백운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시를 지었다. [배한철 기자]
천하를 차지하고픈 이성계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태조실록>에 백관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눈물까지 흘리며 “여러 신하들이 강제로 세웠다”고 했다고 기술돼 있지만, 이는 그저 체면치레에 불과했던 것이다. 칡넝쿨을 잡고 백운대에 갔다는게 이채롭다.

수양대군(세조·1417~1468·재위 1455~1468) 역시 증조부 이성계를 닮아 정치적 야심도 컸으며 산도 잘 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이 수양과 안평 등 왕자들과 유신들에게 명해 북한산 보현봉(북악산 뒷쪽의 봉우리)의 지세를 살펴보게 했다. 보현봉은 지금도 전문 장비 없이는 등반하기 힘든 악산이다. 안평대군 등 모든 사람이 겁을 먹었지만 수양대군이 홀로 나는 듯이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탄복하며 “(수양대군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행만리로(行萬里路·만리를 걷는다)’를 통해 심신을 닦던 조선 선비들에게 북한산 등산은 수양의 필수코스였다. 조선중기의 문장가 유몽인(1559~1623)은 <어우집>에서 “벼슬길에 나오기 전에 삼각산을 집으로 여겨 아침, 저녁으로 백운대를 올랐다”고 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1707년(숙종 33) 중춘(仲春·음력 2월) 18일부터 이틀간 북한산을 등반하고 ‘삼각산유람기’를 썼다. <성호집>에 의하면, 수유리 조계동(구천계곡) 쪽으로 입산해 보허각(인조 3남 인평대균의 별장 송계별업 내 건물)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석가령(대동문), 중흥사, 문수암, 보현봉을 거쳐 탕춘대로 하산했다. 증흥사에서 아침을 먹은 이익은 백운대에 오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얼음과 눈이 채 녹지 않아 포기했다.

제8대 현종(992~1031·재위 1009∼1031)은 즉위전 북한산 신혈사(진관사)에 머물렀다. 현종은 제5대 경종의 3비이자 제7대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964~1029)가 수차례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신혈사 주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현종은 즉위 후 호족세력을 배척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완성한 고려의 실질적 시조다. 고려의 역대 왕들이 현종을 기려 장의사, 승가사, 문수사 등 북한산의 사찰을 찾아 국가안녕을 비는 대규모 불교의례를 행하면서 북한산은 고려왕조의 종교적 성지로 자리잡았다.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던 비봉. 서유구와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전까지는 무학대사비로 알려졌었다. 원래 비석은 훼손이 심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복제품이 설치돼 있다. [배한철 기자]
북한산은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삼각산은 개경 쪽에서 바라봤을 때 삼각형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고려말 학자인 이색(1328~1396)은 <목은집>에서 “사람들은 (삼각산의) 뒷모습이 살진 양귀비라 하네(人言背後玉環肥)”라고 했다.

북한산이 남성적 매력을 풍긴다면, 중국 계림의 봉우리를 연상시키는 도봉산은 여성미가 넘친다. 도봉산은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과 나란히 서 있다. ‘도를 닦는 봉우리’라는 뜻의 도봉은 신라말 도선국사(827~898)가 지었다고 전한다. 명칭에 걸맞게 천축사, 망월사, 회룡사 등 이름난 사찰이 많다. 자운봉(739.5m), 만장봉(718m), 선인봉(708m), 선선대(726m) 등의 봉우리들이 서로 다투듯 자태를 뽐내는 예로부터 ‘서울의 금강산’으로 불렸다.

험한 산세의 북한산은 남성미, 봉우리들 자태 겨루는 도봉산은 여성미 매력
실학의 선구자 서계 박세당(1629~1703)은 도봉산 맞은편 수락산 자락(의정부시 장암동 197)에 은거했다. <서계선생집>에 따르면, 그는 40세가 되던 1668년(현종 9), 부친 박정(1596∼1632)이 인조반정에 참여하고 받은 사패지(賜牌地·왕이 하사한 토지)인 한적한 이곳에 집을 짓고 75세에 사망할 때까지 35년간 살았다. 그의 고택에서 도봉산 봉우리는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그는 “나의 집은 동쪽 언덕 아래에 있고(我家住在東岡下), 문은 제일봉과 마주하고 있구나(門對當頭第一峯)”라고 했다.

농암 김창협(1651~1708)도 도봉산을 수시로 찾았다. <농암집>에 따르면, 농암은 32세인 1682년(숙종 8) 봄, 아우 김창흡(1653~1722), 9촌 조카인 김시보(1658 ~ 1734)와 도봉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했지만 비가 와서 둘은 오지 못했다. 김창협은 우두커니 기다리다가 섭섭한 마음을 시로 달랬다. “만장봉 꼭대기에 저녁 햇살 비치는데(萬丈峯頭西日照), 먹구름 흩어지기 어찌 저리도 더딜까(冥冥雲氣散猶遲). 단비 객의 마음 헤아릴 리 있으랴만(好雨不應愁客意), 봄산 유람 언약 모른들 그 어떠리(春山無那有佳期).”

창협, 창흡 형제는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들이다. 이들 두명을 포함한 여섯 형제 모두가 문장의 대가로 이름을 떨치며 ‘6창’(창집·창협·창흡·창업·창즙·창립)으로 불렸다. 6창의 활약으로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가 최고 전성기를 이뤘다.

안개낀 도봉산. 비갠 후 도봉산에 안개가 피면서 멋진 광경을 연출한다. 도봉은 “도를 닦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안개에 휘감긴 도봉의 모습은 신선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운치를 풍긴다. [배한철 기자]
도봉산 하면,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빼놓기 힘들다. 조광조는 소년시절부터 도봉천 계곡의 수려한 산수를 즐겨 벗들과 함께 와서 학문을 토론했고, 출사한 뒤에도 집과 가까웠던 도봉산을 자주 찾아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조광조는 특별히 도봉천 계곡의 수석(壽石)을 좋아했다. 그는 중종의 파격적 지원 아래 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1519년(중종 14) 훈구파에 반격을 당해 전남 화순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정암집>에 따르면, 조광조는 죽기직전 “밝은 해 이 세상을 내려비추고 있으니(白日臨下土), 내 거짓없는 마음 환히 밝혀주리라(昭昭照丹衷)”는 절명시를 남겼다.
조광조 휴식하던 도봉계곡에 도봉서원 건립···조선후기 학자들 필수 탐방코스
가을옷을 입은 도봉. 가을 도봉은 설악산보다 낫다고들 한다. [배한철 기자]
도봉의 추색. 도봉산 만월암 계곡의 가을색이다. [배한철기자]
조광조는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장악하며 사림의 종조로 추앙받는다. 1573년(선조 6)에는 조광조가 사랑했던 도봉천 계곡의 고려 절터(영국사지)에 그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도봉서원이 건립됐다. 도봉서원은 학자라면 반드시 들러야하는 필수코스가 됐다. 미수 허목(1595~1682)은 1678년(숙종 4) 4월 24일, 84세에 “전원(연천 왕징면 강서리 은거당)으로 돌아간다”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우의정에서 물러났다. <미수기언>에 따르면, 가는 도중 발길을 돌려 도봉서원으로 향했다. 저녁에 서원에 당도해 조광조 사당을 배알하고 아침에 만장봉을 바라보며 돌 위에 이름과 ‘관수(觀水)’를 새겼다. 승지와 경기감사(관찰사)가 “허목을 다시 모셔오라”는 숙종의 명을 받들고 뒤쫓아 왔지만 극구사양했다.

조선중기 문장가 월사 이정구(1564~1635)도 도봉산을 즐겨 찾았다. 1615년(광해군 7) 가을에는 조정에서 축출돼 불암산 기슭 노원촌에 우거 중이던 백사 이항복과 함께 도봉산을 찾았다. <월사집>은 “바위는 더욱 늙어 예스럽고 나무는 더욱 늙어 기이하며, 봉우리는 더욱 높아졌고 물은 더욱 맑아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도 ‘도봉인’이었다. 신흠(1566~1628)의 문집인 <상촌집>은 “유생(劉生·유희경)은 ··· 어진 사대부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와 예로 몸단속을 하였지. 도봉산 아래에 집을 짓고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79세이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젊구나”라고 했다.

연간 1000만명 방문···“번화한 도심 속 신선의 경치” 독보적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의 터(서울 도봉동 512).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지만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배한철 기자]
선비들의 휴식공간이었던 북한산과 도봉산은 이제 연간 1000만명이 방문하는, 서울을 넘어 한국의 대표명산이 됐다. 단위면적당 탐방객이 세계에서 가장 많아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한다. 두 산이 이처럼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뭘까.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도봉과 삼각산이 금강산보다 낫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금강산 1만2000봉이 하나같이 기이하고 높고 웅장하고 깊지만 창공에 닿을듯한 빼어난 빛과 제 몸에서 우러난 윤기와 자태가 없다”고 했다. 반면에 “삼각산과 도봉은 거울 속의 달처럼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이 금강산을 능가한다”고 했다.

삼각산과 도봉은 산세가 수려하고 신비로운 기운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번화한 서울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두 산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터.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 잠곡 김육(1580~1658)도 <잠곡유고>에서 “그 누가 성시(城市·도시)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 알랴”라고 했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열성어제

2. 고산유고(윤선도), 다산시문집(정약용), 청정관전서(이덕무), 어우집(유몽인), 성호집(이익), 목은집(이색), 서계선생집(박세당), 농암집(김창협), 정암집(조광조), 미수기언(허목), 월사집(이정구), 상촌집(신흠), 열하일기(박지원), 잠곡유고(김육)

2. 이혜순. ‘조광조와 도봉서원 존립에 대한 고찰’. 성균관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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