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촌에서 유튜브로 수능 공부했죠” 우승과 서울대 모두 잡다

이혜운 기자 2024. 1.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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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서울대 합격한 이은지

지난해 4월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은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1그룹 B(3부 리그)에서 사상 최초로 우승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영국·폴란드 등을 모조리 꺾으며 5전 전승으로 이뤄낸 쾌거다. 대회 첫 골과 결승골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베스트 플레이어’로 뽑힌 공격수 이은지 선수는 우승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잠들기 전 수학 문제집을 폈다. 그녀의 또 다른 신분은 대한민국의 고3. 그리고 그해 12월 이은지는 서울대 의류학과에 합격했다.

‘OOO의 서울대 입학하기’ 이야기가 각광받는 시대는 아니다. 명문대에 가는 것보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어릴 때 꿈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법. 이왕이면 둘 다 잘하면 좋다. 운동에만 매진하는 국내 학교 스포츠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이유다. 그래서 이은지(19) 선수의 서울대 합격기가 궁금했다. 지난 11일 수원 영통구 광교복합체육센터에서 아이스하키를 연습 중인 그녀를 만났다.

지난 11일 수원 영통구 광교복합체육센터에서 만난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이은지 선수. 지난해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1 그룹 B(3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서울대 의류학과에도 합격했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학원 대신 유튜브로 공부

이 선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뒤 모든 국가 대표팀에서 뛰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U18 국가대표,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인) 국가대표로 선발된 후에는 U18과 병행하며 세계 선수권, 올림픽 등에 출전했다.

-국가대표로 뛰면서 공부하는 게 가능한가요?

“보통 대회 기간은 정해져 있어요. 가장 중요한 세계선수권은 매년 4월에 열립니다. 그럼 매년 1월부터 집중 훈련을 시작해요. 그 시기를 시즌, 그 밖의 시기를 비시즌이라고 해요. 비시즌 기간에는 최대한 공부에 전념했어요. 시즌 중에도 오전에는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링크장으로 갔어요.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받을 시간은 없기 때문에, 최대한 학교에 있을 때 공부를 끝내려고 했어요. 쉬는 시간을 가장 많이 활용했고, 모르는 게 있으면 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봤습니다. ‘학교를 벗어나면 공부할 수 없다’고 생각해, 교내에 있을 때 더 완벽하게 하려고 했지요.”

-양쪽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힘들지 않나요?

“육체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었어요. 아침에 코피가 날 때도 있었고. 그런데 공부와 하키 둘 다 제가 좋아서 하다 보니 특별히 마음이 힘들거나, 하기 싫은 적은 없었어요.”

-하루에 보통 몇 시간씩 잤나요?

“국가대표 시즌일 때는 자정에 훈련이 끝나기 때문에 5시간 정도, 시즌이 아닐 때는 6시간 정도. 최대한 잘 자려고 했어요. 운동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몸 상태니깐요.”

-학원은요?

“비시즌 기간에 수학과 영어 학원에 다녔어요. 제가 혼자 공부하는 걸 좋아해 되도록 적게 다니려고 했습니다. 전 학원에서 내주는 숙제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싫었어요. 학원에 다니면 제 공부하는 시간이 없어지는 것도 싫었고요. 혼자 조용히 집중해서 ‘자기 주도 학습’을 하는 것이 제일 좋았어요.”

-가장 쉽지만 어려운 말인데요.

“복습을 가장 중시했어요. 훈련 일정상, 선행 학습은 거의 불가능하니깐요. 훈련 기간, 자투리 시간도 활용했어요.”

-예를 들면요?

“해외로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거나 전지훈련을 갈 때면 공항 대기 시간과 비행시간을 활용했어요. 그럴 때는 가장 집중력을 덜 요구하는 수학 문제를 풀었어요. 개념 학습이 중요한 과학과 언어는 유튜브로 공부했고요. 영어는 수업 시간에 배운 지문을 통으로 써보면서 연습했습니다.”

-시험 전날엔 어떻게 했나요.

“평상시 문제 풀면서 제가 한 실수들을 정리해 놓은 ‘실수 노트’가 있어요. 오답 노트보다 더 단순하게 만든 거예요. ‘글씨를 헷갈리지 않게 또박또박 쓰자’ 이런 것들도 있고요. 이렇게 적어 놓은 노트를 읽으면서 준비했어요.”

-선수촌에서 합숙 훈련할 때는?

“전 합숙할 때 공부가 더 잘됐어요. 독서실이나 고시원 같기도 하고. 시간을 단순하게 쓸 수 있었거든요. 수능 앞두고 9월부터는 일부러 시끄러운 카페에서 실전 모의고사를 풀면서 연습했어요. 시험장에서 긴장돼 집중하지 못하는 환경을 미리 연습해보고 싶었거든요.”

-자신의 공부법에 확신이 있었군요.

“중학교 때 친구들은 학원을 7~8개씩 다녔어요. 저는 비시즌에 수학·영어만 다녔는데 전교 10등 안에는 계속 들었어요. 그때 제 공부법에 확신이 선 것 같아요.”

"아이스하키는 스케이트를 타면서 슛을 쏜다는 것이 되게 매력적이었어요. 스포츠의 종합체라고 할까요. 골 맛을 보고 나니 떠날 수 없었죠."/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아이스하키에 푹 빠진 소녀

이은지가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건 오빠 덕분이다. 오빠가 등록하러 갈 때 따라갔다가, 정작 오빠는 하지 않고 그녀가 배우게 됐다.

-아이스하키의 어떤 점이 끌렸나요?

“원래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했어요. 오빠와 야구 경기 보는 걸 좋아했죠. 그러다 아이스하키를 접했는데, 스케이트를 타면서, 축구나 농구처럼 슛을 쏜다는 것이 되게 매력적이었어요. 스포츠의 종합체라고 할까요. 골 맛을 보고 나니 떠날 수 없었어요.”

-집안에 운동선수가 또 있나요?

“없어요. 서울대 들어간 사람도 제가 처음이에요(웃음).”

-아이스하키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국가대표였기 때문에, 오히려 돈이 거의 안 들었어요. 국가대표팀 훈련만 참여하면 되거든요.”

-시즌 중 시험이 겹치면 어떻게 하나요?

“세계선수권대회가 중간고사와 겹치곤 해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중간고사는 망치더라도, 기말고사 때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지요. 오히려 대학교가 더 걱정이에요. 고등학교 때처럼 며칠 동안 시험 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니. 선수권 기간이 중간고사 기간이더라고요. 서울대에서도 선례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고요.”

-그렇게까지 공부와 아이스하키를 병행한 이유라면.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이제 아이스하키는 그만하고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이스하키가 너무 좋아서 ‘둘 다 잘할 수 있다. 계속하게 해달라’고 했거든요.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어머니는요?

“제가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걸 장려했어요. 제가 사는 분당은 진짜 학구열 강한 부모님이 많은데, 저희 부모님은 정말 ‘공부하라’는 말을 거의 안 했어요. 청소년 대표팀 때는 제가 등하교를 하면서 훈련을 해야 하니깐, 어머니가 운전해 데려다 주고, 4~5시간 기다렸다가 데리고 오기도 했고요.”

-부모님은 세계선수권 우승을 더 기뻐하셨나요? 서울대 합격을 더 기뻐하셨나요?

“결승 때는 현장에 계셨어요. 정말 기뻐하시더라고요. 서울대 합격은 조기 발표를 해서 제가 먼저 전화를 받았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는데, 두 분이 집에 함께 계셨더라고요. 엄청 좋아하시면서, 같이 술 마시러 갔대요(웃음).”

"아이스하키와 공부는 개념과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게 닮았어요. 하키는 중심 잡기, 방향 전환, 스케이트 날을 사용하는 방법이 생명인데, 기본기 없이 슛만 쏘다 보면 전체적인 실력 향상이 안 돼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개념을 탄탄하게 익히면, 문제를 풀면서 사고를 확장해나가기만 하면 돼요."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공부도 운동도 기본기가 중요

-하키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하키를 안 하려고 했어요. ‘대학을 잘 가겠다는 목표가 있으니깐, 지금은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 김도윤 감독님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도록 도와주겠다’며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학교 일정 때문에 훈련을 빠져야 하면, 그래도 된다’고도 하셨지요. 감독님 아니었으면, 고3 때는 하키를 중단했을 테고, 그러면 세계선수권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보지 못했을 거예요.”

-아이스하키를 포기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받진 않았을까요?

“저는 아이스하키를 안 했으면 서울대에 못 갔을 것 같아요. 시간이 많다고 그 시간에 공부만 하지는 않잖아요? 몸은 학교에 있지만, 머리와 마음은 대표팀에 가 있었을 거예요. ‘내가 왜 아이스하키를 포기했지?’라면서 후회도 했겠지요. 오히려 공부를 하는데 아이스하키가 좋은 자극이 됐어요.”

-부상당한 적은 없나요.

“작년 영국과 경기할 때 넘어지면서 제 스케이트에 다리가 찢어져서 바로 실려갔어요. 꽤 꿰매야 했는데, 다행히 살만 찢어진 거라 재활은 안 해도 됐어요. 살 붙기를 기다리면서 공부했지요.”

-스포츠 종목마다 직업병이 있는데.

“무릎과 허리가 가장 많이 아파요. 기본 자세가 살짝 앉아서 타는 거라. 다리뼈가 안쪽으로 많이 밀려 있기도 하고요.”

-아이스하키를 하며 얻은 가장 큰 자산은 뭔가요?

“무엇보다 저를 행복하게 해줘요. 전지훈련이나 국제대회로 많은 국가에 가볼 수 있었고, 올림픽을 통해 다른 나라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어요. 제가 득점했을 때, 팀이 승리했을 때 느끼는 짜릿한 감정은 말로 표현이 어려울 정도고요.”

-아이스하키인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링크장이 언제나 부족한 거 같아요. 남녀팀 상관없이, 피겨 하는 친구들까지 모두 링크장 대관 전쟁을 치러요. 동계 스포츠 발전을 위해 링크장 활성화가 최우선이에요. 그런데 너무 신기한 게, 요즘 아이스하키 인구가 많이 늘었어요. 초등학교 팀도 엄청 생기고. 여자 대회도 많아지고. 점점 성장하는 것 같아요.”

-공부와 하키, 어떤 점이 닮았나요?

“개념과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요. 하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스케이팅이에요. 중심 잡기, 방향 전환, 스케이트 날을 사용하는 방법이 중요한데, 기본기 없이 슛만 쏘다 보면 전체적인 실력 향상이 안 돼요. 공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개념을 탄탄하게 익히면, 그때부터는 문제를 풀면서 사고를 확장해나가기만 하면 돼요.”

-큰 경기 전날은 어떻게 준비하나요.

“제가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라 자신감을 올리기 위해서 골 넣었던 장면들 모아 놓은 걸 반복해서 봐요. 폼롤러로 근육을 열심히 풀기도 하고요. 그 외 루틴은 안 만들려고 해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나요?

“돈이나 명예에 치우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자. 최대한 다양한 걸 해보자. 아직 제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잖아요. 운동을 하다 보니 스포츠 의류 소재에 관심이 많아 의류학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또 어떤 일이 하고 싶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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