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관리자 쓸 돈 없어…처벌 감수하고 공장 돌릴 수밖에"

배현정.오유진 2024. 1. 2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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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 오늘부터 시행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많은 수의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은 공장 등 사업장을 운영하기 벅찬 상황이다. 사진은 중소 제조업체가 밀집한 안산시 시화산업단지의 한 공장. 최기웅 기자
# “그런 것까지 따지면 문 닫아야죠. 자갈논이라도 팔아다가 공장을 돌려야 할 판인데….” 26일 경기도 양주에 있는 양말공장 영성산업을 운영하는 백기출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해 “(먹고 살기 바빠서) 미처 대비할 겨를이 없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영성산업은 상시근로자가 5명이어서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백 대표는 “(법 대처가) 어렵고 안 어렵고를 떠나 먹고 살기 바빠 그런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며) 잘못해서 잡아 가면 잡혀갈 수밖에 없고, 문 닫으라면 문 닫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 경남에서 15년째 자동차 부품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60대 김모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소식을 전해 듣자 “안 그래도 공장을 폐업하려 직원 규모를 줄여나가고 있는데, 하루빨리 문을 닫는 게 속이 편하겠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9명 규모의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는 코로나19 이전 매출액이 30억원에 달했을 정도로 튼튼한 ‘강소기업’ 사장이었지만, 코로나19 이후 매출이 90% 이상 감소했다.

안전관리자 1명 연봉만 7000만원

지난해엔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쌓여 사업을 접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남은 계약 물량을 소화하려면 당분간은 공장을 돌려야 하는데, 중대재해처벌법상 안전관리를 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김 대표는 “사람을 더 쓰거나, 기존 인력을 빼 안전관리를 맡길 상황도 아니다”라며 “(처벌)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처럼 공장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27일부터 상시근로자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되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걱정거리가 또 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업장이 중대재해처벌법 준비가 안 된 상태라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50인 미만 1053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4%가 ‘법에 대한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2년간의 유예 기간이 있었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공장 등 사업장을 유지하기 바빴다는 게 이들의 항변이다. 실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중소기업·소상공인 어음부도액은 3조6282억원으로 2015년(연간 4조6361억원)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백 대표처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알면서도 준비를 못한 예가 대부분이다. 백 대표는 “1990년대 초에 양말 제조업에 뛰어들었는데 지금이 제일 어렵다”며 “30년 전보다 양말은 더 헐값에 팔리고 임금과 전기료 등 모든 것이 너무 올랐다”고 말했다. 법 대응은커녕 공장을 운영하기도 벅찬 상황이라는 얘기다.

어느 한 두 곳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상시근로자가 50인 이상으로 이미 이 법의 적용 대상인 D건설사에서 현장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A씨는 “(이 법은) 평소 안전 교육이나 관리, 점검 등을 잘 시행하면 처벌을 경감 받도록 돼 있다”며 “인력을 충원하거나 기존 인력을 빼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비용이 적지 않게 들기 때문에 10~30명의 소규모 업체들은 그렇게 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A씨에 따르면 건설업의 경우 안전관리자 1명의 인건비만 연 7000만~8000만원에 이른다. A씨는 “일각에선 한 직원이 (안전관리자를) 겸직하면 된다고 하지만, 안전관리자가 처리해야 할 사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며 “이 법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전담 직원을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의 특성상 중대재해가 많은 건설업체들은 대기업처럼 처벌을 피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상시근로자가 8명 정도인 수도권의 한 중소건설사 대표 B씨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된다고 해서 대표이사를 공동대표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그나마 여유가 있는 건설사는 대개 이런 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책임 회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항변했다.

중소기업 특성상 중대재해가 발생해 대표가 구속이라도 되면 그 날로 회사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건설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소기업의 경우 대표가 매출과 직결된 영업에서부터 회계, 인사 등의 사무를 도맡아 하는 예가 대부분이다. 대표 자체가 회사인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대표가 구속되면 회사 매출은 급락하고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 주재로 대책 논의

그런가 하면 정부와 여당이 법 시행 유예에만 몰두하면서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아 법 적용 대상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적지 않다. 서울 도심에서 소규모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Y대표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우편으로 몇 번 안내를 받긴 한 거 같은데 우리 같은 미싱 공장에도 그런 법안이 적용되느냐”고 되물으며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법 대응 준비는 당연히 전혀 안 돼 있다. Y대표의 공장은 상시근로자가 7명인데, 주로 고령의 여성 인력이 일한다. 그는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일 틈도 없이 일하는데 매일 작업환경이 안전한지 등을 점검해가며 일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노동계는 준비 소홀은 정부와 사업주 책임이라며 엄정한 법 집행을 촉구했다. 민주노총·생명안전행동 등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쉴 새 없는 법 무력화 시도 속에 기소는 느리고 처벌은 여전히 약하다”고 비판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의 발단이 된 고(故)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생명안전행동 공동대표는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죽음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며 정치권의 유예 움직임을 비판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고용노동부는 이정식 장관 주재로 전국 기관장 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장관은 “생존을 위협받는 영세기업들에 필요한 지원 조치도 다각적으로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50인 미만 기업이 ‘산업안전 대진단’에 적극 참여하고, 공동안전관리자 지원 사업 등을 활용할 수 있도록 각 지방 관서에 지원을 당부하고, 영세 중소기업·자영업자 등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도 강조했다.

배현정·오유진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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