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한국인 수천 명 탑승한 우키시마호의 침몰…사과도, 진상규명도 없었다

강선애 2024. 1. 2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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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5일 방송된 '부산행-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터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박호산, 래퍼 미란이, SBS 이인권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의문의 부탁

때는 2012년 5월. 부산에 사는 이응구 씨는 어떤 할아버지로부터 뭔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응구 씨는 친한 형님한테 전화를 걸어 그 일을 같이 하자고 했어. 응구 씨가 형님을 설득해서 만난 곳은 김해공항. 들고 온 짐과 장비만 한가득이야. 응구 씨와 형님은 30년 넘게 같이 호흡을 맞춰온 다이버, 잠수사야. '버디' 사이로 함께 오랫동안 잠수를 해왔어.

"사고 현장이나 어떤 구조물에 가서 이제 수중 탐사 조사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늘 다이버는 2인 1조로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제 이런 큰 이야기를 바로 하지 않고 물속에서 어떤 부분을 꼭 찾아야 되는데.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어떤 한 분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저희 사무실에 몇 번 왔습니다."

-이응구, 잠수사

두 사람의 목적지는 국내가 아닌 외국. 타국의 바다까지 가서 이들은 뭘 찾으려고 한 걸까. 두 잠수사는 하루 종일 바다 밑을 뒤지고 다녔어. 탐침봉으로 여기저기를 막 찔러봐. 그러다 뭐가 툭 걸리면, 다른 도구는 없어. 손으로 막 파야 돼. 진짜 모래바닥에서 바늘 찾기였어.

"턱 하고 부딪히길래 저희들은 기분이 좋아서 막 손으로 이렇게 헤집었는데 결국은 작은 자갈이든지 아니면 쓰레기 종류였든지 조개더미였든지 그랬습니다."

-이응구, 잠수사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두 사람은 작업을 멈추고 수면 위로 올라가. 빈손으로 돌아온 응구 씨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해져. 할아버지는 실망했는지 눈시울이 벌게져. 그 모습을 보며, 응구 씨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대.

"너무 늦게 왔다... 한국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인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장비도 다 있습니다. 다 있는데 아무도 가지 않았다는 게 참 거기서 참 짜증이 날 정도로… 저희들이 너무 늦게 간 거죠. 작은 실마리라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없이 그냥 들어간 게..."

-이응구, 잠수사

이때가 2012년이랬잖아. 이 깊은 바닷속까지 한국인이 직접 찾아온 건 67년 만에 처음이래. 그 할아버지가 뭘 찾아달라고 부탁한 건지, 그걸 알려줄게. 그날 물 위로 올라오기 전, 응구 씨는 가지고 들어간 카메라 앞에 뭔가를 펼쳐 들었어.

우키시마마루 폭침. 수중현장조사.

들어본 적 있어? 일단, 일본어지. 한자로는 '부도환(浮島丸)', '우키시마'는 '부도', '떠다니는 섬'이란 뜻이고, '마루'는 '배'야. '떠다니는 섬처럼 큰 배'라는 뜻이야. 그게 폭침됐다, 즉, 우키시마호가 침몰했다는 거야.

그럼 타이타닉호는 알지? 1912년, 북대서양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 승객 2,200여 명 중 1,500여 명이 사망한 실제 사건이야. 영화 덕분이긴 하지만 타이타닉 사건 모르는 사람 없잖아? 그런데 우키시마호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일본 바다에 침몰한 일본 선박이야. 근데 왜 한국 잠수사들이 그걸 찾고 있겠어? 그 안에 한국인이 있었으니까. 타이타닉엔 2,200명이 탔다고 했지? 우키시마호엔 그보다 훨씬 많은 한국인이 타고 있었어. 타이타닉보다 더 큰 침몰 사고란 건데, 우린 왜 이렇게까지 생소한 걸까? 이제 그 비밀을 파헤칠 거야.

▲ 우키시마호에 탑승한 조선인들

잠수사들이 일본 바다를 뒤지고 10년이 흘러 2023년 9월. 부산에 사는 전병관 씨는 신문을 보다가 눈이 번쩍 뜨여. '생존자를 찾습니다'라는 내용을 봤는데, 자신이 아는 얘기 같은 거야.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휴게실에서 신문을 보다가 밑에 자그마하게 그 우키시마호 관련 기사가 나오고 생존자를 찾습니다, 하는 광고를 보고.. 제가 알고 있는 내용하고 비슷해서.. 배 이름은 전혀 몰랐습니다. 뭔가 이게 우키시마호 같더라고요.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그 배가. 제가 깜짝 놀랐거든요? 궁금해서 제가 여쭤봤는데,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전병관

"참 지독했지. 옛날 역사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요. 눈물이 나고 말도 못 하지요. 그 배가 침몰된 걸 요즘 젊은 사람들을 알겠나 싶어. (자식들에게 말을 안한 이유는) 얘기를 하나 안하나 달라질까 싶고. 지나온 역사를 얘기할 필요가 있나. 그래서 너희한테는 얘기 안했다."

-전영택, 전병관의 아버지

전영택 씨의 연세는 올해로 98세. 우키시마호 사건을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 중 가장 고령이야. 그동안 아들과 가족들에게도 그날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지 않으셨는데, 이번에 거의 80년 만에 그날 일을 털어놓으셨어. 어쩌면 이게 마지막 증언일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전영택 씨가 그날 우키시마호에 탄 건 아주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어. 그 배가 부산 가는 마지막 배였거든. 영택 씨의 고향은 울산 울주군이야. 근데 왜 일본에 있었을까?

배가 출발한다는 곳은 일본 아오모리현이야. 영택 씨의 나이는 그때 열여덟 살. 1년 전에 강제동원으로 여기까지 끌려왔어. 지역마다 할당량을 주고, 청년들을 차출했거든. 영택 씨는 그걸 피해보려고 마을 뒷산에서 몇 날 며칠을 숨어있기도 했대. 근데 경찰들이 가족들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못살게 구는 거야. 결국 두 손 들고 산에서 내려왔어.

"영장이 나왔대요. 내가 피신을 갔거든 매봉산에. 아버지한테 '아들 찾아내라', 아들 어디 갔는지 찾아내라고 군인들이 와서 남은 사람들 때리고 울리니까."

-전영택, 우키시마호 생존자

일본으로 출발하던 날 영택 씨 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와 새 옷을 건넸어. 나무 팔아 마련한 돈으로 급하게 새 양복을 지어오신 거야. 그렇게 눈물의 이별을 하고, 바다 건너 끌려간 곳이 아오모리현이야. 눈으로 유명한 홋카이도 바로 아래 있어. 아오모리는 5월에도 눈이 와. 일본인들도 이쪽으로 발령 나는 걸 기피할 정도로 춥고 척박한 곳이었대. 영택 씨는 비행장 활주로를 만드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어. 두들겨 맞는 건 기본, 밥도 제대로 안 나와. 일본 사람들은 하기 힘든 중노동을 조선 청년들에게 푼돈 주고 시키는 거야. 그런 우리 청년이 아오모리 지역에만 수천 명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모두 타라. 뱃삯은 공짜야 공짜!"

갑자기 조선으로 가는 배에 공짜로 태워준다는 거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 선언을 하고 패망했거든. 식민지 조선도 해방됐어. 영택 씨는 짐을 꾸리기 시작해. 딱 한번 입었던 그 양복을 다시 꺼내 입고 품속엔 꼬깃꼬깃 종이봉투도 잘 감췄어. 그동안 피땀 흘려 일하고 받은 돈을 넣은 봉투야. 부산 가면 아버지 선물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했어.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뭉클해.

부산행 배가 출발한다는 곳은 오미나토항이야. 영택 씨는 짐 보따리를 들고 항구 앞에 도착했어. 항구 주변에 사람이 바글바글해. 영택 씨 같은 청년부터 노인들까지, 대체 몇 명인지 가늠이 안돼. 아오모리현뿐 아니라 홋카이도에 있던 조선사람들이 싹 다 모여든 거야. 그날 부산으로 가는 배가 있는 유일한 항구였거든. 사람들은 아예 노숙 중이야. 이불 덮고 누워서 자는 사람, 불 피워서 밥 짓는 사람… 그 배를 타려면 한참 기다려야 된대. 항구 앞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배가 한 척 들어와 있어. 그 배 이름이 바로, 우키시마호. 이 배야.

배가 너무 크니까, 선착장에서 멀리 정박해 있고 작은 통통배들이 셔틀버스처럼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어. 영택 씨도 동료들과 맨뒤로 가서 줄을 섰어.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실어도 실어도 끝이 없어. 그 끝없는 행렬 속엔 경남 거창이 고향인 청년도 있었어. 스물여섯 살의 한석희 씨. 석희 씨는 감격에 겨워있어. 고향에 고운 아내와 3살짜리 아들을 두고 왔거든.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 석희 씨의 3살짜리 아들, 누구일 것 같아? 잠수사 응구 씨에게 바다 밑을 뒤져달라고 부탁한 그 할아버지야. 한석희 씨의 아들, 한영용 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게.

"처음에는 내가 잘 몰랐어요. 내가 3살 때 (아버지가 일본에) 갔으니까 사진도 없고.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할아버지가 아버지인 줄 알고 내가 살아왔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할아버지라, 아버지는 저 일본에 가시고. 한자 석자 희자. 일본 그 아오모리 해군시설부에 가셨죠. 해군 비행기 격납고 짓고 뭐 그런 거지. 해군시설부 짓던 거니까 그 천막 속에서 생활을 했던 모양이야."

-한영용(82), 한석희 씨 아들

아버지 한석희 씨도 강제동원 되어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셨대. 그런 아버지가 아들 영용이를 보러 지금 막 출발하려는 참이야.

그날 항구엔 일가족 전체가 가는 경우도 많았어. 그중엔 생후 2개월 된 막내를 꼭 안고 줄을 선 가족이 있었어. 바로 최억조 씨네 가족이야. 억조 씨네 가족은 무려 일곱 명이야. 자식만 5남매거든. 억조 씨네는 어쩌다 아오모리에 살게 된 걸까?

"거기 한국 사람 많이 살았지요. 함바(식당)하고 있었어요. 우리 큰아들 6살 먹은 거 데리고 혼자 일본 동경, 영감님(남편)이 동경에 있었는데 찾아갔어요. 한 3년 넘게 있었지."

-최억조

억조 씨는 남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어. 억조 씨 남편처럼 한국에서 너무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자리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분들도 많았대. 억조 씨는 악착같이 일해 돈을 모았어.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에 논 몇 평은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고향에 돌아가 잘 사는 게 유일한 꿈이야. 그렇게 부산행 우키시마호 앞에 섰어. 근데, 저 앞을 보니까, 해군들이 엄청 재촉을 해. 명령조에, 분위기가 좀 살벌해.

그 시각, 맨 뒷줄에 서있던 전영택 씨 앞으로 아는 얼굴이 쓱 지나가. 같이 일했던 작업반장님이야. 근데 반장님 표정이 좀 어두워. 뭔가 우물쭈물하더니만, 대뜸 이상한 소릴 해. 이 배가 좀 위험하다며, 자기는 안 타겠다는 거야.

"반장이 똑똑한 사람이거든. 말하기를 '배가 위험하니 배를 타지 마라'.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배를 안 탔거든."

- 전영택, 우키시마호 생존자

영택 씨는 영 찜찜했지만, 고대하던 귀국길이잖아. 금세 잊고 배에 올라탔어. 1945년 8월 22일, 드디어 우키시마호에 승선했어. 직접 타보니 배 규모가 어마어마해. 갑판 아래론 4층 구조의 선실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해. 정확하진 않아도 수천 명은 넘는 것 같아.

"사방 20리밖에 있는 사람을 다 모아서 전부 조선사람만 모았는기라."

-최억조, 우키시마호 탑승자

우키시마호는 4,730톤급 배야. 용도가 달라서 타이타닉호와 단순 비교는 어려운데, 우키시마호는 타이타닉호의 10분의 1 정도야. 중요한 건 탑승객의 수야. 탑승객은 확인된 숫자만, 타이타닉호보다 두 배를 더 태웠어. 일본 해군이 밝힌 이날 우키시마호의 총 승선 인원은 약 4천명. 일본 해군 승조원이 255명, 나머지 3,700여 명이 한국인이래. 객실은 해군들이 다 차지했고, 우리 한국인들은 2, 3층 선창 맨바닥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앉아있어. 억조 씨 가족은 처음에는 2층에 자리 잡았다가 금세 포기하고 갑판 위로 올라갔대. 장남 빼고 어린애만 4명이야. 애들이 가만있었겠어? 막내 똥기저귀 갈자니 눈치 보이고, 애들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억조 씨 가족은 갑판 위로 올라갔어. 영용이 아버지 한석희 씨, 그리고 울주 청년 영택 씨도 빈자리가 없어 갑판 위에 올라와 있었어.

1945년 8월 22일 밤 10시. 우키시마호는 일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기상도 좋고 바다도 잔잔해. 부산까지는 앞으로 4일 정도 걸린대. 별문제가 없다면, 8월 25일 아침에는 부산항에 도착할 거야.

8월 한여름. 수천 명이 탄 배 안은 덥고 비좁고 변소도 부족하고 이런 북새통이 없어. 꼬박 4일을 버텨야 해. 거기서 사람들이 뭘 했게? 화투를 그렇게 쳤대. 덥고 지쳐도, 배 안의 분위기는 거의 뭐 명절이야.

▲ 폭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3일째야. 8월 24일, 오후 5시쯤. 억조 씨는 식구들 먹을 저녁밥을 짓고 있었어. 배 앞 쪽이 갑자기 웅성웅성해. 저 멀리 육지가 보였거든. 그런데, 좀 이상해. 분명 일본을 떠나 삼일째 달려왔잖아. 그런데 눈앞에는 여전히 일본 집들이 보이는 거야. 대체 여기 어디야?

마을이 점점 가까워져. 우키시마호가 항구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야. 속도도 점점 느려져. 이제 마을까지 한 500미터 남았나? 배는 거의 멈춰 섰어. 바로 그때였어. 쾅! 귀를 찢는 굉음. 억조 씨는 깜짝 놀라 막내 귀를 손으로 막았어. 원인 모를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 갑판 위에 서있던 영택 씨는 몸이 붕~ 떴다가 다시 쿵, 바닥으로 떨어졌어. 고통이 느껴져.

"처음에 우리는 위에 탔는데 한번 쾅 하데요. 쾅 하는데 그 큰 배가 우쭐하데. 두 부분으로 쾅 하니까 배가 턱 이렇게 가운데가 부서져서 내려앉는 거라. 그 길로 내려앉았지. 밑에 안에 탄 사람은 전부 다 죽고 나올 수가 있는가 물이 다 덮었는데. 천이고 만이고 다 죽었습니다. 콱 터지니까 이제 배가 가라앉는 거에 물이 콱 물속에 들어가 버리니까 살 수가 있는가."

-전영택(98세), 우키시마호 생존자

"5시쯤 됐어요. 배가 막 부서지는 소리가 천지를 뒤덮는 거라. 붕 뜬 거라 밑에 부서져 버리니까. 배가 두 동강이 나버렸는데, 동강 난 게 가라앉는데 그걸 기어 올라가면서 살겠다고 자꾸 기어 올라가면서 울고. 그때는 해가 있고 밝을 때인데, 눈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보여."

-최억조, 우키시마호 생존자

그 큰 배가 두 동강이 났어. 그리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해. 갑판 위에 있던 사람 수백 명은 바다 위로 풍덩 떨어져. 영택 씨는 죽을힘을 다해 난간을 붙들었어. 근데 문제는 갑판 아래야. 선실마다 수천 명이 꽉꽉 들어차 있었잖아. 위로 올라오려고 다들 아우성이야. 하지만 선체는 점점 더 기울기 시작해. 배 아래쪽에선 콸콸콸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고 있어. 서로 밀치고 떨어지고... 배 안은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해.

위로 올라오려고 사투를 벌이는 사람 중엔 한영용 씨 아버지 한석희 씨도 있어. 동료가 내려준 줄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 석희 씨는 그 줄을 끝내 잡지 못했어.

"배가 팍 내려가는데 하도 급하니까 올라가서 줄을 거머쥐고 살까 싶어서 거머쥐고 있는데 갑자기 그 줄이 내가 거머쥔 데가 탁 떨어지더라고."

-유경수, 당시 한석희 씨 동료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일곱 식구나 되는 억조 씨네는 어떻게 됐을까? 품속에 안고 있던 막내가 눈을 안 떠. 그때 남편이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

"틀렸는갑다... 얼라를 놔주라. 그래야 산다."

막내를 포기하고 다른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거야. 남편은 넷째 아들 재필이를 등에 업고는 첫째, 둘째에게 말해. "느그들 헤엄칠 수 있지? 어떻게든 뭍까지 올라가야 된다"라고. 배는 갑판도 기울어진 채로 점점 가라앉고 있어.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곳은 마이즈루만이야. 육지와의 거리는 약 500미터.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볼만한 거리야. 억조 씨 남편이 결국 먼저 물로 뛰어들었어. 엄마 억조 씨 심정은 어땠을까? 아기를 버려야 산다? 축 처진 막내를 그래도 놓을 수 없었대. 바다 한가운데 아이를 버리는 것 같아서. 그래서 아기를 가슴에 동여매고, 한 손엔 막내딸 손을 잡고 더 높은 쪽으로 올라갔어.

"양옆에 딸 둘은 거머쥐고 죽은 애도 거머쥐고, 죽은 애를 어찌 물에 던지겠나 싶어서 애를 쥐고, 이렇게 올라갔다니까 자꾸 올라갔다니까."

-최억조, 우키시마호 생존자

배는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아래를 보니, 너무 참혹해.

"바다 밑을 보니까 기름이 터져서 새까맣게 있고 사람들이 막 빠져서 꼭 미꾸라지 소굴처럼 그렇지요."

"올라가서 보니까 아부라(기름) 탱크가 터졌던지 그냥 바다 위가 새까맣게 그냥 아부라뿐이야. 근데 펄쩍펄쩍하는 것은 다 사람이야."

"꼭 개미 와글와글하듯이 그랬어요."

"죽어서 자빠지는 사람도 있지, 팔딱팔딱하며 살려달라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지. 얼굴이 흉측해서 사람 같지도 않고 형편없었죠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생존자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허우적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날 우키시마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장면을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대.

얼마나 지났을까. 해군 한 명이 돛대 위로 기어올라가더니 육지를 향해 나팔을 불었어. 잠시 후, 항구 저편에서 작은 배들 서너 척이 나타나. 다들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어. 작은 고깃배들이야. 마을 주민들이 사람들을 구하러 오고 있는 거야.

"해군 부대가 방송을 하데요. 방송을 하니까 배가 딱 모여드는데. (배 옆으로) 갖다 딱 대요. 대서 우리를 확 데려가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도 뛰어내린 사람은 다 죽고, 그냥 갑판에 가만히 있는 사람은 산 거라."

-전영택, 우키시마호 생존자

"배가 들어오려 하니 물에 빠진 사람들 때문에 들어오질 못하는 거라. 달려들고 엎어지고. 사람을 한 명이고 두 명이고 있는 대로 주워갔어요 나가는 길에."

-최억조, 우키시마호 생존자

"모든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하며 배에 달려들어 순식간에 배가 가득 찼다. 그래서 배 위에까지 물이 차올랐다. 내가 이 배까지 가라앉겠다며 그만 타라고 했다. '아이고, 아이고' 했다.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아이고, 아이고'라고 울부짖었다."

-마시마 시게꼬, 당시 구조 작업 참여

갑판 위가 모두 물에 잠길 때까지, 주민들 고깃배가 몇 번씩 왕복하면서 구조 작업을 한 거야. 그리고 우키시마호는 어떻게 됐냐, 이걸 봐봐.

사고 지점은 육지에서 가깝다 보니, 수심이 그렇게 깊지는 않았어. 그래서 완전히 침몰한 후에도 이렇게 돛대 부분이 계속 올라와 있었대. 그날, 스스로 헤엄쳐 나오거나 어민들이 구조해 낸 사람은 몇백명 밖에 안돼. 아까 일본이 밝힌 승선 인원은 3,700여 명.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사고 일주일 후, 해안가에 뭔가가 떠오르기 시작해. 시신들이야.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의 시신이 하나 둘 해안가로 떠밀려 오기 시작해.

"시체를 바다 옆에 다 끌어다 놓고 목에다가 주렁주렁 이래 막 엮어서. 여럿이 이제 많이 엮어서 줄줄 끌어다가. 시체가 기름을 덮어 씌워가지고. 누가 누군지 절대 못 찾겠더래요. 찾을 수가 없더래요. 일본 사람들이 새끼줄을 가지고 목을 이렇게 줄줄 엮었더래요. 사람 목을요."

-당시 생존자

신원 확인도, 제대로 된 장례 절차도 없었어. 바닷가엔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어.

억조 씨네 일곱 식구는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어. 억조 씨와 딸들, 헤엄쳐 나간 가족들 모두 살았어. 그리고 축 처진 막내 있지? 뭍에 올라와서, 축 늘어진 아이를 햇빛 잘 드는 양지에 가만히 눕혔더니 애가 깨어났어.

"죽었다던 그 애가 깨어나서 살았어요. 도로 주워 업고 들어왔지."

-최억조, 우키시마호 생존자

울주 청년 영택 씨도 고깃배로 다행히 구조가 됐어. 근데 영택 씨 머릿속에 한마디 말이 계속 떠올라. 반장님이 했던 말. 저 배를 타면 위험하다고 했던, 반장님의 한마디.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짜 이야기야. 이 사고, 단순한 사고가 아니야. 그날의 침몰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있어.

▲ 생존의 기록

우키시마호 미스터리가 한국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사고 후 거의 50년이 지난 1990년. 충남에 살던 한 남자 때문이야. 바로 이 분이야.

이름은 전재진. 한 병원의 임상병리사였어. 1990년, 전 씨는 행사차 일본에 방문했다가 아오모리현에 들렀어. 거기서 우연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듣게 된 거야. 일본에선 꽤 유명한데 왜 정작 한국 사람이 모르냐는 거야. 전 씨는 이렇게 큰 사고가 왜 안 알려졌는지 의아했어.

"아주 충격이 컸죠 저는. 현장에 강제노동 현장을 다 들여다보니까 이건 모르면 안되는 거예요. 배가 돌아오다가 침몰했다더라. 몇 명이 죽었는지 대상이 누구인지 이런 걸 몰랐죠 사실. 우선 생존자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생존자를 찾아야 되겠더라고요."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

먼저 대전역 광장에 나가서 무작정 유인물을 돌렸대.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생존자, 유가족을 찾습니다. 주변에도 꼭 좀 알려주세요"라고 적힌 유인물을. 그랬더니, 전 씨 집으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해. 그 배에 탔었다는 생존자, 가족이 그 사고로 사망했다는 유가족들의 전화였어. 전 씨는 큰 결심을 했어.

위에 사진을 보면 전 씨 손에 비디오 카메라가 들려있지? 연락을 해온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며, 그걸 영상으로 남기기로 한 거야. 억조 씨의 생전 영상도 전 씨가 할머니를 찾아가 촬영한 거야. 그렇게 전 씨는 총 83명의 생존자를 만났어.

"소리가 팍 하고 나더니 사람이 위에까지 치솟았다가 땅에 뚝 떨어졌어요."

-김옥희, 우키시마호 생존자

"아우성이더라고. 갑판 위에 딱 올라서니까."

-김응석, 우키시마호 생존자

"아들도 가고 영감도 가고 시숙도 가고.."

-신원수, 우키시마호 생존자

남편과 자식을 한날한시에 잃은 김봉선 할머니는 평생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사셨어.

전 씨의 카메라 앞에서 이제야 어렵게 털어놓았던 그날의 증언들. 5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다들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해. 죽다 살아났거나 가족을 잃었거나, 모두들 한 맺힌 사건이야. 이런 일을 한 개인이 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그 누구도 이 사고를 조사한다고 먼저 찾아온 적이 없었대.

"일단은 기록을 남겨야 하거든요. 이 사건은 참으로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기억에 많이 남죠. 거의 다 남아요. 참으로 처절했다고 보면 돼요."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

▲ 우키시마호의 미스터리

그들에게 그날 배에 아주 이상한 일이 많았다는 걸 듣게 됐어.

첫 번째 미스터리는 이거야. 다들 서둘러 배에 올랐던 이유가, 이 배가 한국 가는 마지막 배라고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우키시마호는 한국 가는 마지막 배가 아니라, 첫 번째 배였어. 그것도 일본 전역을 통틀어서. 일본이 패망 후에 공식적인 한국 귀국선을 띄운 건 9월 중순부터야. 근데 우키시마호는 해방 1주일 만에 급조된 제1호 귀국선이었어.

"조선 사람이 우키시마호를 타지 않으면 영원히 자기 고향에 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국하고 싶은 사람은 이 배를 타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동연, 우키시마호 생존자

왜 급하게 조선인들을 태운 걸까? 막차가 아닌 첫차였던 우키시마호. 뭔가 숨겨진 이유가 더 있을지도 몰라.

일단 사고 원인부터 알아봐야 해. 사고는 대체 왜 났을까. 우키시마호는 원래 민간회사 배였어. 그러다 1941년 해군 소속으로 바뀌면서, 무기를 싣는 배가 됐어. 함장과 255명의 승조원 대부분 해군 소속이었어. 함장은 바로 이 사람, 도미우리.

도미우리 함장도 어민들에게 구조됐어. 구조된 도미우리 함장은, 긴급 보고를 해.

"본함, 24일 마이즈루 입항 시 17시 10분 현재. 도지마와 헤비시마 사이 수로에서 제4번 선창 부근에 촉뢰, 선체 중앙부터 절단, 침몰됨. 사상자 현재 조사 중"

사고 원인은 촉뢰(觸雷). 기뢰와 접촉해서 폭발했다는 뜻이야. 기뢰는 바다의 지뢰 같은 거야. 실제로 마이즈루만에서 미군이 투하한 기뢰 때문에 폭발하거나 침몰한 선박들이 종종 있었대. 그럼 우키시마호도 그 이유로 사고가 난 걸까?

우키시마호 침몰의 두 번째 미스터리, 바로 사고가 난 장소야. 사실 승조원들도 항해하는 내내 좀 이상했대.

오미나토에서 출발한 배가 부산에 가려면, 보통 어떤 항로로 갈 것 같아? 오미나토항은 부산에 가는 배가 원래 없던 곳이야. 그래서 정확한 항로는 지금까지도 정보가 없어. 그런데, 승조원들 눈에 뭐가 이상했냐, 3일 내내 일본의 해안선이 멀어지지 않고 옆으로 계속 보였다는 거야.

"이상한 것은 왼쪽으로 1500m 되는 곳에 일본 해안선이 계속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리로 가면 멀리 돌게 되는데'라고 생각을 했죠. 부산이야 동해를 가로지르면 금방인데."

-하세가와 나오시, 우키시마호 승무원 대포 반원

이게 실제 항로야. 이 항로로 이동하다가 3일째 아예 마이즈루만으로 쏙 들어간 거야. 그리고 얼마 안돼서 배가 폭발한 거야. 도미우리 함장의 주장은 이래. 이틀 전 이런 명령이 떨어졌대. "8월 24일 저녁 6시 이후에는 항해하지 말고 가까운 항구로 들어갈 것"이라고. 자기는 그 명령을 따른 것뿐이래.

그렇다고 해도, 항로는 좀 이상하지.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부산행이었다면 직선으로 가든가, 아니면 연안을 따라가더라도 섬 위로 지나는 항로가 가능하다는 거야. 그런데 사전에 마이즈루만을 경유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어. 왜 3일 내내 육지에서 멀어지지 않았는지, 왜 굳이 마이즈루만으로 갔는지. 도미우리 함장은 묵묵부답이야.

세 번째 미스터리가 드러난 건, 침몰한 배가 물 밖으로 인양된 후였어. 1954년, 9년 뒤에야 배 전체가 인양됐어.

인양작업자가 몰래 찍은 사진이야. 선체 안에서만 유골 수백 구가 나왔대.

중요한 건 이 사진.

선체 아래, 가운데 부분, 폭발이 있었던 곳을 촬영한 거야. 이 사진을 촬영한 작업자는 이걸 보고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찍었습니다. 기뢰에 맞았다면 철판이 밖에서 안으로 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이 경우 철판이 안에서 밖으로 휘어져 있었습니다."

-다무라 게이오, 인양 당시 선체 조사자

배 바깥에 있던 기뢰와 부딪혀서 폭발이 일어났다면, 선체가 밖에서 안쪽을 향해 찢길 텐데, 그 반대였다는 거지.

기뢰 폭발이 아니라면, 다른 가능성 뭐가 있을까? 폭발이 정말 외부에서 있었던 게 맞는지, 생존자들은 물론 일본 언론에서도 의혹이 제기됐어. 배 안에는 기관총, 대포 같은 무기들이 실려있는 화약고와 탄약고도 있었어. 생존자들이 의심하는 건, 폭발이 배 안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다는 거지.

함장이 밝힌 사고 원인은 기뢰에 의한 폭발. 근데 기뢰폭발 치고는 좀 석연찮은 게 있었다는 거야. 기뢰에 부딪힌 경우, 보통은 물기둥이 수십 미터 상공까지 치솟는 경우가 많대. 물기둥이 치솟았다면, 갑판 위 사람들은 다들 물벼락을 맞았겠지. 근데 우키시마호가 폭발할 때 물기둥 목격을 두고 증언이 엇갈려.

"물기둥이 딱 올라간 건 사실이거든."

-박재하, 우키시마호 생존자

"물기둥이 그냥 하늘로 솟아오르듯이 막 솟아오르더라고요."

-김응석, 우키시마호 생존자

"물기둥은 분명히 없었어요. 왜냐면 제가 갑판에 있었으니까. 그 정도 폭발했으면 내가 물벼락을 맞았을 거 아닙니까. 절대 그러지 않았거든요."

-장영도, 우키시마호 생존자

"바닷물은 안 튀고 배만 솟아올랐어요. 바닷물은 안 튀었어요."

-전영택(98), 우키시마호 생존자

근데 물기둥 여부만 두고, 사고 원인을 판단할 수는 없대. 사고 당시 수심에 따라, 어느 부위에 기뢰를 맞았느냐에 따라 물기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것만으로 기뢰인지 아닌지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거지.

일부 생존자들이 기뢰 폭발이라는 일본 발표를 불신하게 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사상자의 수에도 미스터리가 있었거든.

일본 해군은 사고 일주일 만에 사상자 수를 집계해 보고해. 일본인 승조원 255명 중 25명 사망, 한국인은 3,735명 중 524명 사망. 그럼 나머지 몇 천 명은?

일본 해군이 보고한 한국인 사망자 명단. 생존자들은 일본이 발표한 사망자 숫자와 명단을 믿을 수가 없대. 일본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하고 실제하고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았거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승선할 때 아무도 이름을 적지 않았다는 거야. 몇 명이 탔는지, 누가 탔는지도 기록이 없는데, 너무 정확한 숫자와 명단이 나온 거야. 심지어 생존자 중에 사망자로 올라간 사람도 많아. 한 예로, 생존자 이철우 씨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었어.

생존자들이 추정하는 그날 탑승객은 최소 5천 명에서 8천명 사이야.

"난 그 말은 들었어요. 이 배에 너무 많이 탔다. 한 7천 명 좀 못 타야 하는데 7,500명 가량 탔다."

-김태석, 우키시마호 생존자

"한 7천 명 탔다고 했는데, 7천 명은 더 탄 거 같아."

-이동우, 우키시마호 생존자

그중 구조되거나 탈출한 사람은 많게 잡아야 1천명 정도야. 이건 일본인 승조원도 인정한 부분이야.

"8천 명 정도 태웠다고 해요. 짐짝처럼 실은 거죠."

-당시 우키시마호 승조원

이분들의 주장이 맞다면, 실제 사망자 수는 최소 4천 명에서 7천 명 이상이야. 그 규모를 축소시킨 거라면, 해서는 안 될 일이지. 일부 생존자들은 일본이 사고 규모를 축소한 것은 물론, 일부러 배를 폭발시켰다고 의심하고 있어. 그날 폭발 전에, 배 위에서 이상한 상황들이 있었거든.

갑판에 있던 한 생존자가 해군들이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걸 목격해.

"(일본 해군들이) 아이들 모아 놓고 과자 갖다 먹이고"

-이재석, 우키시마호 생존자

"이틀 동안 밥을 조금밖에 안 줘요. 밥도 조금밖에 안 주고 담요도 작은 거 하나 줬죠. 사흘째 되던 날 저녁에 담요 좋은 거, 옷도 주고 밥도 많이 주고 이래요. 우리 모두 다 이상하다고 했어요."

-김봉선, 우키시마호 생존자

더 기막힌 건 다음이었어. 큰 선박들 보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옆에 구명정이 있잖아? 일부 승조원들이 구명정을 내리더니, 자기들 짐가방을 챙겨 옮겨 타는 거야.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물이 부족해서 물을 뜨러 간대. 그렇게 6~7척의 구명정이 우키시마호를 벗어났어. 배에는 물이 충분히 있었어.

"선원들이 내리는 걸 내가 봤거든. 구명정 내리는 걸 다 내리고 저들은 떠나고. 한참 있다가 폭발했지."

-김수득, 우키시마호 생존자

▲ 일본의 목적

일부 생존자들이 사고의 원인을 의심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게 있어. 1977년, 당시 함장과 승조원이 TV에 모습을 드러냈어. 이 방송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증언이 공개돼.

"조선으로 가라는 명령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반대가 있었어요. 종전이 되었는데 중간에 기뢰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저조차도 싫으니까요."

-도미우리, 우키시마호 함장

"어디로 가느냐? 마이즈루다."

-당시 노무계원

"암묵적으로 우리는 서로 합의했다. 일단 오미나토는 떠나지만 부산에는 안 간다고 했다. '너희들 진짜 조선으로 보내는 건 아니다'라는 말을 한 병사는 없었어요. 조선인 중에 (부산으로 안 가는 걸)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죠."

-노자와 타데오, 당시 우키시마호 기관장

우키시마호가 제1호 귀국선이었다는 거 기억하지? 해군 측은 우키시마호를 출항시킨 이유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어.

"종전 직후 조선인 공원 다수는 귀국에 대한 열망을 호소하며 불온한 조짐을 보였다. 일본 해군으로서는 이미 해고 완료한 전 공원을 귀선 시킬 의무가 없었으나 사태의 평온한 해결을 원해 우키시마호에 그들을 태웠다."

-1950.3.2. 일본 인양원호청 제2복원국

한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빨리 조선으로 보내주려 했다는 거야.

"일본 해군 부대장 아주 높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타라. 강제로 타라고 했죠. 그러니 빨리 가려 하지."

-전영택, 우키시마호 생존자

사실 일본이 진짜 두려워했던 건 따로 있었어. 왜 아오모리현에 유독 많은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걸까? 아오모리는 일본이 전쟁 막판에 전투기지를 건설한 곳이야. 그런데 갑자기 패망하며, 이젠 소련이 일본을 위협하고 있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사할린까지 진격한 거야. 만약 소련군까지 이곳에 상륙한다면,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합세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까지 세웠대. 그동안 부려먹은 조선인들이 위협적인 존재가 된 거야. 그래서 조선인들을 빨리 내보내야겠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하지만 우키시마호의 함장과 승조원들은 이 출항 명령에 거부감이 심했어. 바다 여기저기 미군이 투하한 기뢰가 깔려있어. 그리고 조선인들 데려다주러 부산에 갔다가 오히려 붙잡힐까 봐 걱정이 된 거야. 부산에 갔다가 포로가 돼서 못 돌아오면 어떡하냐는 거야. 이렇게 항의하자, 해군 사령부 참모는 일본도로 위협하며 명령을 내렸대. 군법으로 사형당하고 싶냐고. 결국 함장도 울며 겨자 먹기로 명령을 받아들이고 억지로 출항을 한 거야.

참 황당한 점이 뭔지 알아? 함장과 승조원 중 단 한 명도 부산까지 항해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어. 이 사람들, 부산 가는 길도 몰랐다는 거야.

우키시마호가 왜 알 수 없는 항로로 움직였는지, 좀 감이 오지 않아? 애초에 어디로 갈 생각이었던 건지, 함장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어. 이런 사실을 그날 우키시마호에 탔던 조선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여전히 '기뢰 접촉에 의한 불의의 사고'야. 우키시마호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은 계속 흘렀어.

▲ 가라앉은 진실

1992년, 15명의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50년 만에 소송을 걸어. 어려운 형편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어르신들이 일본을 왔다 갔다 하셨대. 하지만 고의 폭발 의혹은 소송에 포함하지 못했대. 증거가 부족해 승산이 높지 않다고 봤거든. 대신, 안전하게 승객을 수송하지 못한 데 대한 손해배상, 일본에 있는 사망자들의 유골 반환. 그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이었어.

소를 제기하고 대법원 판결이 나기까지는 12년이 걸렸어. 결과는 어땠을까? 모두 패소했어.

"재판 결과는 '폭침된 사실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배상할 수는 없다' 증언을 뒷받침할 물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자폭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장영도, 우키시마호 생존자

"일본 정부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사진은 찍기에 달렸다 이거예요. 안에서 찍으면 밖으로 휘어져 있고, 밖에서 찍으면 안으로 휘어져 있는 거 아니냐."

-김동연, 우키시마호 생존자

의혹들이 배를 고의로 폭발시킨 증거는 될 수 없다는 입장이야. 그리고 함장이 마이즈루만에 들어간 것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결론을 내렸어.

수천 명의 한국인이 자신들이 운명을 모른 채 우키시마호에 탔고, 그 배와 함께 침몰했는데. 지금껏 그 누구도 사과를 하거나 책임을 진 사람이 없어. 사실, 미군 기뢰에 의해 배가 폭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어. 문제는, 그 부분조차도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거야. 시간이 너무 지나 아무것도 없으니까. 현장 영상, 사진도 없어. 일본 정부는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료조차 안 줘. 그야말로 묵묵부답. 대한민국 정부 역시 이 사건에 대해 한 번도 일본에 진상규명을 요청한 적이 없어.

"여러 번의 재판 과정을 받으면서 일본까지 다녔지만서도 우리나라에서 보도 한 번 없었고, 우리나라에선 재판 과정을 구경도 한 번 오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섭섭한 마음이 들고…"

-전승열, 우키시마호 생존자

의혹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생존자들의 기억뿐이야. 처음에, 잠수사들에게 바다 밑을 뒤져달라고 부탁한 할아버지 영용 씨 기억나지? 사실 아버지 한석희 씨의 얼굴도 몰라. 세 살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노인이 된 지금까지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거야. 우리나라도 일본도 그 누구도 하지 않으니까.

"나는 한 60년 이상을 아버지를 찾으려고 일본도 내가 많이 갔어요. 일본도 내가 한 서른 번은 갔다 와서 이렇게 재판했지 그랬으니까. 왜 지금까지 78년이나 되도록 그 유품이나 유골을 찾으려고 생각도 안하고. 그 자기 부모들 같으면은 그 바닷속에다 그렇게 팽개쳐 놓겠느냐. 있을 수가 없다 생각하는 거지. 나만 발 동동 굴리고 유골을 찾아야 한다고.. 뭐라도 안 찾겠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유골을 한국에다 모셨습니다' 그 얘기는 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닌가."

-한영용, 한석희 씨 아들

그 배에서 살아남은 아버지의 동료분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들려준 적이 있었어. 가라앉는 배에서 아버지가 했다는 마지막 말을, 아들 영용 씨는 평생 잊지 못해.

"돈 벌어놓은 건 우짜꼬. 가방은 어떡할꼬.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가방이고 뭐고 다 놔두고 몸이나 빨리 올라오라고. 그게 마지막이래."

그 일본 땅에서 고생해서 힘들게 모은 돈을 넣은 가방. 아마도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주고 싶었던 돈이었겠지.

우키시마호의 폭발이 기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음모 속에서 벌어진 사건인지. 아직까지도 우린 정답을 몰라. 어쩌면, 앞으로는 더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이제 살아계신 생존자는 세 분 정도야.

"(우키시마호 사고) 생각날 때가 있죠. '아버지 이제 생각하지 마세요 잊어버리고 있으라'고 하는데, 나도 그러려고 합니다."

-전영택, 우키시마호 생존자

그리고 최억조 씨의 자녀 두 분. 억조 할머니네 가족은 온 가족이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고국에 돌아와선 꽤 불행한 시간들을 보냈대.

"귀국선 안 탔다면, 가족들이 뭐 잘 살고 있겠지. 다 헤어지고 한국 나오니 뭐 먹을 게 있나. 집에 우리 누나들 둘은 공장에 가고. 내 동생 죽고부터는 우리 집이 또 파산이야. 7살때쯤 죽었지 싶다. 교통사고로 죽었죠. 아끼고 하는 동생이 죽었는 걸 살려서 왔는데 결국 죽으니까 엄마가 화병이 낫겠지. 엄마가 왜 한이 더 맺혔냐 하면 엄마는 바쁘게 장사한다고 있으니까 엄마한테 와서 '돈 1원만 줘' 이러거든요. '나 뭐 사 먹을래' 이랬대요. 엄마가 돈 1원을 줬대요. 그래서 한참 가더니, 다시 길을 돌아와서 엄마한테 '엄마 나 돈 있어도 되고 없어도 돼' 그 길로 가서 죽어버렸어.. 그게 그렇게 눈물이 나요."

-이재필, 최억조 씨 넷째 아들

생존자들이 그날을 증언할 때 공통적으로 말했던 장면이 하나 있어. 바다에서 나올 때 다들 알몸으로 헤엄쳐 나왔다는 거야. 물에 빠져 허우적댈 때 옆사람이 자꾸 옷을 붙잡아서. 거기 잡히면 나도 같이 빠져 죽을 것 같아서. 옆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가까스로 살아 나왔던 그날의 기억이, 이 분들의 가슴에 아직도 큰 돌처럼 얹혀 있다는 거야.

지난해 2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유골 12구의 소재지가 파악됐어. 근데 발견된 도시가, 그 배의 원래 목적지였던 부산. 부산 납골당 무연고자실에 오랜 시간 보관돼 있었대.

큰 참사를 겪은 사람들을 진짜 힘들게 하는 건 뭘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 어쩌면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차가운 바다에서 귀향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날을 증언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애써온 생존자들. 그분들의 그 외로운 시간들을 오늘 잠시라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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