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속 행복 찾기, 감사일기를 쓰는 청년들…“바꿀 수 있는 건 태도뿐” [2030 ‘내탓’ 설명서②]

전지현·이홍근 기자 2024. 1. 2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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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씨(31)가 지난해 1월2일 고시원에서 쓴 감사일기. 이날 일기에 이씨는 “오전 4시에 일어나따뜻한 물에 밥 말아먹고 오미자차를 끓여 마신다” “오늘 하루도 하루에 온전히 귀속될 수 있게 즐겁고 성실하게 보내자”고 적었다. 본인 제공

직장인 이모씨(29)는 올해 1월1일부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씨에게 2023년은 과로로 혹사한 한 해였다. 그는 “체력이 떨어지니 불평불만을 많이 했더라”며 “작게라도 생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감사한 것을 매일 기록하는 걸 신년 목표로 정했다”고 했다.

고물가, 취업난, 주거·부채 등 2030세대가 맞닥뜨린 문제들은 쉬운 것이 하나 없다. 감사일기는 그런 고된 일상에서 크기가 작더라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이들은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삶에서 할 수 있는 건 태도를 바꾸는 것뿐”이라는 생각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감사일기 한 달, “불평불만을 덜 하게 돼”
1월1일부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한 직장인 이모씨(29)가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모니터에 붙여 둔 포스트잇. “하루에 한 번 감사하기. 오늘의 감사한 일은 뭐였나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등이 적혀 있다. 본인 제공

“하루에 한 번 감사하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

감사일기를 쓰기로 결심한 뒤, 이씨는 이렇게 쓴 포스트잇을 책상 모니터에 붙여뒀다. 4주째 그는 메모장에 매일의 감사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새해 첫날 잠을 충분히 자고 출근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밥을 대충이라도 먹을 시간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씨의 메모장엔 여전히 과로의 흔적이 읽힌다. 그럼에도 ‘오히려 좋다’고 생각을 전환할 수 있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직장인 이모씨(29)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스토리에 올린 2024년 2일차 감사일기. 인스타그램 갈무리

이를테면 수면이 부족한 상황임에도 예약해둔 운동 개인교습(PT)을 가야 할 때, 이전에는 ‘잠도 못 자고 운동을 가야하나’ 생각했겠지만 그날 일기에 “선생님이 피곤한 몸 상태에 맞춰 수업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쓰는 식이다. 이씨는 “진짜 감사해서라기보다는 쥐어짜내서 쓸 때가 많아 웃프다(웃긴데 슬프다)”면서 “스스로에 대한 세뇌란 생각도 들지만 불평불만이 확실히 조금은 줄어들었다”고 했다.

이씨처럼 신년부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한 직장인 A씨(29)는 업무가 과중했던 날 “갓생(God+生) 산 날이라 감사하다”고 썼다고 했다. 스스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A씨는 “작은 것에라도 감사하는 습관을 잡고 싶어서 시작했다”고 했다.

그의 일기장엔 소소한 행복들이 적혔다. “집에 오니 동생이 만든 카레가 있어서 감사하다” “새로 체육관을 등록해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게 돼서 감사하다” “처음 가 본 언어 교환모임을 여자친구가 좋아해줘서 감사하다” 등이 그 예다. 잠이 들기 전 일기를 쓴다는 A씨는 “자잘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라며 “좋은 일을 쓰고 잠들면 그걸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좋더라”고 했다.

감사일기 3년, “불안함이 일상을 잡아먹지 않도록”

감사일기를 통해 스스로를 다잡고 돌아보는 이도 있다. 아침마다 3년째 감사일기를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슬기씨(31)는 “일기 쓰기는 이제 떼놓을 수 없는 습관”이라고 말한다.

고시원에서 오전 5시부터 책을 읽고 감사일기를 쓰던 이슬기씨(31)의 책상. 본인 제공

프리랜서였던 이씨는 3년 전 취업준비를 위해 대구에서 상경해 고시원 생활을 하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년의 취업준비 기간 동안 그의 일기장에는 ‘외롭다’는 말이 자주 적혔다. 이씨는 “나에게 허락된 삶이 단 두 평이란 생각에 우울하기도, 목표가 막연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고 했다. 그는 노력하는 자신을 칭찬하고, 노력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를 믿자. 나는 과거의 모든 시간들을 뚫고 지나온 사람이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 이슬기씨(29)가 2023년 5월5일 작성한 감사일기 일부

이씨의 예전 일기장에선 힘든 상황에서도 사회를 탓하기보다는 개인적인 태도를 바꾸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씨는 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될 때, 친구와 소원해졌다고 느낄 때, 고시원에서 원룸으로 이사를 준비하며 금전적 압박을 받을 때 일기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불안함에 일상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감사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씨는 올해 일기장에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터무니없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하루가 주어졌음에 감사하자”고 적었다. 그는 “권고사직 등으로 퇴사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며 “위로 겸 친구를 만나고 난 후에 ‘친구에게 밥을 사줄 수 있어서 좋다’고도 자주 적었다”고 했다.

감사일기에선 불안하고 팍팍한 삶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청년들의 분투가 읽힌다. 이씨는 “사회 문제를 바꿀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런 것까진 제가 할 수 없으니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서 삶을 바꿔보려 한다”고 했다.

청년들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 SNS를 통해 서로의 감사일기를 공유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지난해 8월부터 감사일기 오픈채팅방을 운영했다는 한 운영자는 인스타그램에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기 좋은 지금 사회에선 내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게 중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고 썼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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