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미등록···차별은 없어요, 기다림만 있어요[포토 다큐]
일요일인 지난 7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기 동두천시 상패동의 낡은 2층짜리 건물은 이주노동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 30여 명이 진료소 대기실에 앉아 진료 개시를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졸거나 휴대전화로 자국의 뉴스를 검색하고,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는 등 기다리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오전 10시가 되자, 고요하던 공간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넘버 2 누구예요? 어디 있어요?” 자원봉사자가 외치면서 환자를 찾았다. “2번? 2번은 위에 있어요. 3번이 나예요.” 순서대로 번호표가 배부되면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된다. 그 사이 환자는 점점 늘어나 번호표 숫자는 50번에 이르렀다.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에 지친 노동자들이 무료진료를 받기 위해 찾는 라파엘클리닉 동두천진료소의 일요일 아침 풍경이다.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은 1997년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처음 진료를 시작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1996년 살인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파키스탄 노동자로부터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심각한 인권침해를 호소한 편지를 받으면서부터다. 추기경의 관심과 걱정을 접한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들이 이주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것이 라파엘클리닉이다. 이후 카톨릭대와 동성고 강당을 빌려 가며 진료를 이어갔고 201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무상임대로 현재의 성북동 라파엘센터에 정착했다. 현재 2007년과 2019년에 각각 개소한 동두천진료소와 천안모이세진료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진료소는 이주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매주 일요일에 문을 열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료한다. 진료과목은 가장 많이 찾는 내과를 비롯해 가정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재활의학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치과 등이다. 길지 않은 진료 시간에 150명 이상의 이주노동자들이 몰려드는 탓에 일요일마다 의사 6~10명을 포함해 약사·간호사·대학생 등 1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환자를 돌본다.
의료진이 부족한 동두천진료소에서 매달 한 차례 진료하는 군의관 신동규씨(31)는 “무거운 물건을 드는 일이 많고 장시간 노동이나 야간노동을 자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특성상 고혈압과 관절염, 당뇨 등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다. 약 처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클리닉에서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해야만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복부 쪽에 악성종양으로 의심되는 혹이 발견된 한 환자에게 협력병원 정밀검사를 제안했다. 진료의뢰서를 받아 든 이주노동자는 “이거 들고 가면 혹시 검사 비용 디스카운트(할인) 되나요?”라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는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미등록 신분에다 최저수준의 임금을 받아 비용 부담이 크다. 진료소는 30여 개의 병원과 업무협약을 맺어 상태가 심각한 환자들을 다른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게 하고 있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최대 200만 원의 비용을 지원해주고 있다.
클리닉은 27년째 정부 지원 없이 오로지 기부와 자원봉사로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미등록 외국인이나 난민 신분의 이주노동자들 진료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다. 라파엘클리닉 서울 본원을 기준으로 코로나 19를 겪으며 매주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던 방문 환자는 최근 180~20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환자가 너무 많이 와서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멀리 부산에서 환자가 올 때도 있는데 다음에 오라고 할 수도 없고….” 클리닉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남명부 국장(62)이 한숨을 쉬었다.
라파엘클리닉은 코로나 19 이전 수준으로 늘어나고 있는 환자들에 대응하기 위해 진료 시간 연장을 계획하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봉사자 확충과 다수의 환자가 앓는 고혈압, 당뇨 등의 약품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우린 병원 갈 시간이 없어요. 일요일에 여는 병원이라 올 수 있어요. 정말 최고예요” 방글라데시에서 온 한 이주노동자는 진료를 마친 후 약처방을 기다리다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며 활짝 웃었다.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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