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역사 70%는 환경이 만들지만, 미래는 결국 인간 의지에 달려”[현안 인터뷰]

노성열 기자 2024. 1. 2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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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안 인터뷰
인류문명해설서 ‘미래의 기원’ 출간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
민주·자본주의 미래 예측 위해
인간세계·자연과학史부터 훑어
기술·정치·자원 등 7개 틀 활용
시간 변화 따라 인류 미래 전망
역대최고 기부금 모금 기록하고
美 뉴욕·韓 평택캠퍼스 신설 성과
의공학 전문대학원 꿈도 곧 실현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11일 서울 도곡동 캠퍼스에서 의공학대학원 설립만 이루면 자신의 할 일은 대강 마친 셈이라고 털어놓고 있다. 문호남 기자

인터뷰=노성열 경제부 부장 nosr@munhwa.com

“역사와 미래를 만드는 것은 인간인가, 환경인가?”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과학자의 눈으로 본 인류 문명 해설서 ‘미래의 기원(아래 작은 사진)’을

출간한 이유다. 이 총장의 답은 ‘환경이 7, 인간이 3’이다. 환경이 먼저,

그리고 이에 적응하는 인간 순으로 역사의 동인(動因)을 분석한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인간이 만들어왔다는 결론이다.

기자가 “이병철 전 삼성 회장님의 ‘운칠기삼(運七技三)’과 비슷하군요”

하고 추임새를 넣자, “그래요? 그럼 ‘환칠인삼’인가?

‘자칠인삼’이 더 낫나?” 하며 아이처럼 말 짓기 놀이에

잠시 열중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괴짜 총장’이란 별명에 딱 들어맞는다.

집필에 5년이 걸린 이 총장의 역작은 책 쓰기 수년 전 만난 유발 하라리와의 대화에서 출발했다. 하라리는 다른 동물을 물리치고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로 올라선 것은 상상하는 능력, 창의성과 지성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피엔스’ 등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해설한 인류사 3부작으로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오른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는 자연을 바꿔나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췄다.

“너무 인간에게 무게를 둔 해석이라고 느꼈어요. 아무리 잘나도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적응해가며 진화한 겁니다. 역사와 미래를 만들어온 인간의 능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빅뱅 후 우주 먼지에서 생명이 탄생했고 그중 하나가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광대한 우주의 한 점일 뿐이죠.”

책 출간과 잔여 임기 1년을 계기로 지난 11일 서울 카이스트 도곡 캠퍼스 총장실에서 만난 미래학자 이광형은 “역사학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며 “빅뱅부터 민주주의·자본주의의 미래까지 과학적 사실과 방법론에 따라 해석하고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빙긋 웃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탐욕에서 왔다. 이게 자본주의다. 약육강식, 동물의 왕국”이라며 “그러면 탐욕을 어떻게 관리하나? 안전장치가 바로 민주주의다. 1인 1표의 공평 배분 시스템이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융합으로 발전했다. 혹자는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 걱정하지만, 나는 견제장치가 있기에 희망을 품는다”고 역설했다.

550쪽에 달하는 ‘미래의 기원’은 1, 2, 3부 총 11장으로 구성돼 있다. 1부 ‘세상의 시작’은 우주와 생명의 탄생을 다룬 자연과학사다. 2부 ‘인간의 시대’는 인류의 출현과 발전 과정을 압축한 인문세계사다. 3부 ‘인류의 미래’는 인공지능(AI), 바이오 기술 등 미래과학과 민주주의·자본주의 등 사상 및 제도의 미래를 예측한 전망이다. 이 총장은 “뒷부분이 핵심”이라며 “이걸 쓰려고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개괄한 것”이라고 말했다. 책 말미에는 ‘STEPPER로 보는 인류의 미래’가 부록으로 붙어있다. STEPPER는 이광형이 만든 미래학의 예측 도구다. 사회(Society)·기술(Technology)·환경(Environment)·정치(Politics)·인구(Population)·경제(Economy)·자원(Resource)의 7개 항목을 세로축에 놓고, 시간을 가로축에서 과거로부터 미래로 옮겨가면서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해보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 미래학을 처음 들여와 사단법인 미래학회의 초대 회장까지 지낸 이 총장은 “미래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늘 강조한다.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미래, 그쪽으로 변화하려는 의지의 미래가 결국 실현된다는 지론이다.

이 총장은 임기 1년이 남은 현재, 의사공학자를 양성하는 의(醫)공학 전문대학원 설립 말고는 다 이뤘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2022년 753억 원으로 역대 최고의 기부금 모금 기록을 남겼다. 기부 주체도 기업과 개인, 내용도 예술품 등으로 다채로워졌다. “취임 때 하루 1억 원씩 모금하겠다고 내질렀죠. 기부자들에게 ‘카이스트는 그냥 대학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다. 대학이 변해야 나라가 변한다. 한 대학을 바꾸는 게 아니라 한국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라 설득했더니 공감하시더군요. 하지만 미국 대학 총장들은 이보다 몇 배씩 더 모아요.”

그는 재임 중 미국 뉴욕과 국내 평택에 카이스트 분교를 세웠다. 뉴욕 분교의 정식 명칭은 ‘카이스트-NYU(뉴욕대) 조인트 캠퍼스’다.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에서 꿈을 크게 가지라는 뜻에서 세웠다. 공동 연구는 물론, 양교 학생들이 오가며 배운다. 평택 분교는 차세대 반도체의 연구 거점이다.

카이스트 학생에게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도 이 총장의 뜻이다. 병역의무를 이행 중인 군인들에게 전산학부 재학생이 재능 기부로 코딩 수업을 한다. 지난해 150명이 시범적으로 온라인 및 주말 오프라인 교육을 받았다. 이 총장은 “제대하면 절로 취직되니까 서로 군대에 가려 할 것”이라며 “10년 후 10만 명까지 수강 인원을 늘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소재지인 기흥 동탄역에서는 4개월 과정의 반도체 설계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직업 없이 방황하던 니트족 청년들이 코딩보다 단기간 내 학습이 가능한 반도체 설계에 지원해 졸업 후 전원 취업에 성공하고 있다.

이 총장이 21세기 후반부에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것이라고 예언하는 의공학 전문대학원도 착착 준비되고 있다. 카이스트는 2004년부터 의과학 대학원을 설립해 의사 과학자를 양성해왔다. 현재까지 184명의 의과학자(MD-Ph.D)가 카이스트를 거쳐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의과학 대학원의 다음 단계는 의학공학 전문대학원이다. 공학 기반의 의사 공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MD-데이터공학자, 인공지능(AI) 전문가, 전자공학자, 신약개발자 등 미래의 바이오헬스 산업 전문가를 키워 글로벌 바이오헬스 산업을 선도할 인재를 배출할 방침이다. 현재 의학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은 급속도로 진행 중이다. 가까운 미래에 AI를 통한 진단·분석과 사물인터넷(IoT) 및 빅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기반 스마트 헬스가 보편화하면 의료 산업의 패러다임도 대전환을 맞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새로운 인재가 바로 의료기술 개발에 앞장설 의사 과학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의사 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연구중심 의대가 없어 의사 과학자의 공급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의학공학 전문대학원 설립은 의대 정원 배정, 설립 인허가, 평가인증, 신입생 모집 순서로 단계적으로 추진된다. 현재 의대 정원 배정과 평가인증 준비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개교를 앞두고 있다.

산업·컴퓨터·뇌공학 이어 미래학으로… “새로운 시도에 인생이 늘 외로웠다”

■ 스스로 ‘아싸’라 말하는 李총장

‘내가 안 하면 개척 늦겠다’ 생각
한평생 도전하는 ‘아웃사이더’
“소수는 힘들지만 나중엔 보람”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스스로 ‘아싸(outsider)’라고 말한다. 주류에 속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평생이 도전이고 실험이었기 때문이다. 20대 학생 시절 한국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후 유학 가서는 요즘 잘나가는 컴퓨터공학, 당시 용어로 전산학을 공부했다. 돌아와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이번에는 뇌과학에 빠졌다. 인공지능(AI)의 원본인 뇌가 궁금했다. 바이오 및 뇌공학과를 창설해 초대 교수가 됐다. 그는 과학에 인문학을 결합한 미래학의 한국 개척자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헤매고 다녔을까.

“잘 모르겠어요. 아마 호기심이 아닐까요.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간 거죠. 사실 나도 전공을 조금씩 옮겨가면서 하는 거 힘들어요.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편하고 좋아요. 근데 새로운 걸 자꾸 할 때는, 이건 약간 건방진 얘긴데, 그때마다 ‘이런 걸 내가 안 하면 하는 사람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뭐든지 새로 시작하려면 저항이 크니 그걸 극복하려면 힘들죠. 그러다가도 ‘내가 안 하면 이 분야 개척이 늦어질 텐데’ 하고 시작한 게 대부분이에요.”

이 총장은 이같이 말하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였다. 잘나가는 카이스트 총장님이 뭐가 부족해서? 뜻밖의 고백은 이어졌다.

“그래서 인생이 좀 외로웠어요. 항상 새로운 걸 시도하니까 늘 외톨이였죠. 회사도 그러잖아요. 뭘 새로 도모하려면 이 사람 눈치 보고 저 사람 설득해야 하고, 힘들잖아요. 근데 저는 그 길을 계속했으니까. 그런 인생이 너무 길었어요. 지금은 총장이 됐으니까 주류가 됐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불과 6∼7년 전만 해도 저는 늘 소수였어요.”

이 총장이 10년 전에 카이스트의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을 처음 열 때도 그랬다. 과학 전문 카이스트가 왜 정책대학원까지 만드냐며 반대가 심했다.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의 기부금으로 원래 하던 과학 쪽 연구비나 늘려주지 하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래전략대학원을 졸업한 법조인, 공무원, 기업인, 기자들은 ‘친(親)과학, 지(知)과학’의 든든한 동문으로 성장했다.

‘아싸’ 이광형은 왜 이 시대에 과학을 알아야 하느냐고 묻자 “미래를 보기 위해”라고 응수했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과학 문해력(literacy)도 그래서 필요하다. 최근 우주항공청법은 국회를 통과했으나 AI 법안은 여전히 문턱에 걸려 있다.

“세상이 갑자기 변했다며 깜짝 놀라는 사람들 있죠. 그 사람은 과학 공부 안 한 분이에요. 왜? 과학을 알면 10년, 20년 후가 미리 보이니까. 과학을 모르면 미래를 설계할 수가 없어요. 정책도, 자기 인생도, 자녀 교육도 설계할 수가 없어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학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 리더십이 높은 곳은 미국과 영국 등 유럽 몇몇 나라죠. 우린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해요. 이번에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때 국민 반발이 심했잖아요. 미래를 준비하려는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는 걸 나도 깨달았어요. 정부도 많이 배웠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후학에게 충고를 해달라고 청하자 이 총장은 “소수는 늘 힘들지, 하지만 나중에 보람 있어” 하고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1954년생 △서울대 산업공학과 학사, 카이스트 산업공학과 석사 △프랑스국립응용과학원(INSA Lyon) 전산학 박사 △카이스트 전산학,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 △카이스트 교학부총장 △제17대 카이스트 총장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산업통상자원부·교육부·국방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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