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두개 껴입고 청소...영하 13도, 언 손으로 새벽 여는 사람들

김승현 기자 2024. 1.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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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청소원들 새벽 버스 타고 강남으로 출근
“빗자루 든 두 손 시리고 아프지만 일할 수 있어 감사”
서울 지역 최저 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내려간 23일 서울 강남구 한국은행 강남본부 인근에서 청소 노동자들이 건물 주변을 돌며 청소를 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23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기온은 올해 들어 가장 낮았다. 일부 지역의 새벽 최저기온은 영하 20도였다. 본지는 이날 건물 청소원과 ‘달동네’ 주민들을 만났다. 한파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이다. 옷을 겹겹이 입고 추위를 버티며 일터로 나간 이들은 “작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이날 새벽 6시 서울 강남구 역삼역 1번 출구 인근에서 만난 건물 청소원 홍모(65)씨와 A(55)씨는 검은색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운 채 바닥을 쓸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이마엔 불빛이 들어오는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새벽 서울 기온은 영하 13도였다.

홍씨는 “오늘만 해도 화단으로 날아 들어온 유흥 주점 광고지를 200장 정도 치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25년간 종합 쇼핑몰에서 폐기물 처리를 하다 작년 12월부터 청소를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서울 성북구 정릉에서 3시 50분에 버스를 타고 역삼역으로 출근한다. 홍씨는 “오늘같이 살을 에는 추위가 있는 날이면 택시를 타고 편히 출근하고 싶은 생각이 수백 번은 든다”며 “그래도 몇 푼 번다고 택시를 타겠나 싶어 꾹 참는다”고 했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사는 A씨도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 4시 5분쯤 심야 버스를 타고 일터에 도착한다고 한다. 가락시장에서 물건 싣고 내리는 일을 하던 A씨는 작년 8월부터 건물 청소를 시작했다. A씨는 “야외 일을 주로 해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그래도 손가락 끝이 시큰시큰하긴 하다”고 웃었다.

찬바람 견디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 서울을 비롯한 전국 기온이 23일 올해 들어 최저를 기록했다. 이날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두꺼운 외투를 입은 시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왼쪽). 대설 특보가 발효된 광주 서구 5·18 기념문화센터 앞에서 한 시민이 우산을 쓰고 걷고 있다(가운데). 같은 날 대구 북구 칠성 시장에서는 한 상인이 모닥불을 피웠다(오른쪽). 한파에도 시민들은 각자 삶의 현장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박상훈 기자·연합뉴스·뉴시스

16년째 역삼역 인근 유흥업소에서 청소 일을 하는 여성 이모(77)씨는 유흥업소들이 영업을 마친 새벽 5~6시쯤 근무를 시작한다고 했다. 여섯 층짜리 유흥업소 건물 방을 돌며 깨진 술병과 먹다 남은 안주, 취객들이 남긴 흔적을 치우다 보면 5시간이 훌쩍 지나간다고 한다. 이씨는 경기 의정부에서 2시간 정도 지하철을 3번 갈아타고 역삼역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이렇게 일하고 일당 5만원, 한 달에 150만원을 번다. 이씨는 “오늘 같은 추위에는 의정부에 있는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걷는 20분이 2시간 같다”며 “트레이닝복 바지 두 벌, 티셔츠 두 벌, 조끼에 외투까지 제일 따뜻한 옷으로 겹겹이 무장했다”고 했다.

이씨는 남편이 하던 시계 부품 공장이 1997년 금융 위기 때 폐업하면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씨는 “원래 성질이 편히 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며 “아직은 몸이 팔팔하니 오늘처럼 추운 날이든 더운 날이든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일하며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달동네 주민들도 갑작스러운 한파에 떨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에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오르막 골목길에 판잣집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판잣집 대문 옆에는 다 타고 재만 남은 연탄이 5~6개씩 쌓여 있었다.

20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김수일(65)씨는 1년에 9개월 정도 구청 계약직 조경 일을 하며 월급 22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일감이 없는 12~2월에는 수입이 없다. 김씨는 연탄과 전기 장판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는 “요즘 같은 한파에 기름 보일러를 쓰려면 일주일에 두 번은 기름을 채워야 하는데 난방비로 한 달에 40만원은 나간다”며 “기름값이 워낙 올라 요즘은 그냥 전기 장판으로 버틴다”고 했다.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인왕산 등산로변에 있는 개미마을의 한 주민이 난방비를 아끼느라 냉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고 있다./고유찬 기자

주민 김모(72)씨는 다 탄 연탄을 집 밖에 버리고 있었다. 김씨는 아내와 아들 부부, 두 손주와 15평짜리 집에 살고 있었다. 집 안에서도 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은 김씨는 “우리는 3대가 살아 연탄과 기름 보일러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며 “한 달 난방비로 60만~70만원 정도를 쓰고 있다”고 했다. 아들 부부의 벌이는 생활비로 쓰고, 김씨가 일용직 노동으로 버는 돈은 난방비로 주로 쓴다고 한다.

김씨는 “한 달에 대여섯 번 일용직 노동을 갈 때마다 15만~17만원 정도를 버는데 네댓 번 수입은 모두 난방비에 쏟아붓는 셈”이라고 했다. 김씨는 해마다 복지 시설에서 연탄 1000장 정도를 기부받지만, 한겨울을 나려면 1000장 정도가 더 필요해 따로 산다고 한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연탄 한 장이 600원대였는데 물가가 오르면서 이제는 장당 700~800원이 됐다”며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김모(82)·임모(75)씨 부부는 매달 고엽제 전우회에서 나오는 지원금과 노령 연금을 포함해 100만원으로 장애가 있는 딸과 생활하고 있다. 월남 참전 용사인 김씨는 “기름값이 비싸서 목욕할 때만 기름 보일러를 쓰고 평소에는 복지 시설에서 지원받는 연탄으로만 난방한다”고 했다. 서울 노원구의 또 다른 달동네인 백사마을도 이날 강추위로 골목을 다니는 행인이 거의 없이 휑한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이발원을 운영하는 이달수(71)씨는 “오늘은 너무 추워서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며 “한파가 오면 오후 5시에 일찍 가게를 닫고 들어가 버린다”고 했다. 이씨 가게 문 옆에는 다 태우고 누렇게 변한 연탄 12장만이 쌓여 있었다.

서울 용산역 아이파크몰 인근 고가도로 밑 텐트촌에는 노숙인이 20여 명 모여 있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김모(59)씨는 부탄가스 버너로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데우고 있었다. 텐트 안에 놓아둔 생수는 한파로 얼어붙었다. 김씨는 “6년 넘게 여기 살았는데 이런 강추위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5년 전 겨울에는 이곳에서 살던 주민 2명이 동사한 것도 봤는데 어젯밤에는 너무 추워 그날 악몽이 떠올랐다”고 했다.

이모(54)씨는 용산역 대합실에서 따뜻한 물로 1.5L 페트병 3개를 채워 가져왔다. 이씨는 “어젯밤에는 너무 추워 부탄가스도 얼어 가스 버너도 작동하지 않았다”며 “내복과 패딩을 몇 겹이나 껴입고 핫팩 몇 장 지닌 채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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