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음이 능력인 사회…간접음주 피해는 모두가 나눠 갖는다

서혜미 기자 2024. 1. 2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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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커버스토리
술 없이 일·관계 어려운 한국의 음주 비용 ‘15조원’
최소 열 명 중 한 명은 알코올사용장애 겪는 문화 바꿔야
서울의 한 술집에서 폭탄주를 만들어 건배하고 있다. ‘술은 좋은 것’이란 문화가 알코올중독에 너그러운 사회를 만든다. 윤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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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말술’을 마실 것처럼 생긴” 회사원 서수빈(32·가명)씨에게 사람들은 술잔을 내밀었다. 일행과 콜라 한 잔과 술 한 잔을 시키면 식당 종업원은 아무 질문 없이 서씨 쪽으로 술을 내려뒀다. 대학과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동호회 모임에 들어가도 사람들은 당연히 서씨에게 술을 따라주려 했다. 정작 그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술찌(찌질이)’다. 여러 번 술을 마시려고 해봤지만, 어느 날 소주 한 잔에 토사물이 코로도 쏟아지는 경험을 한 뒤 단념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음주문화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직장 상사들은 “술도 마시다보면 늘어난다” “회식 분위기를 위해 탄산음료 말고 무알코올 맥주라도 시켜라” 같은 말을 꼭 한마디씩 얹었다. 서씨는 “사람들이 비음주인이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못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반드시 술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음주가 희로애락 함께하고 규범인 사회

전세계적으로 술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기쁘거나 슬플 때, 힘들거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친목을 도모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자리엔 언제나 술이 함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숨 쉬듯 술을 마실 수 있는 한국인의 술 사랑은 유독 더하다. 음주가 일종의 사회규범처럼 작용한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은 개인의 능력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개개인의 알코올사용장애를 부추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김치수(가명)씨는 2021년 12월 송년회에 갔다가 ‘블랙아웃’(알코올성 기억장애)이 돼서, 가족이 실종 신고를 해 경찰 도움으로 귀가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영업직이어서 술자리가 많았고 그만큼 과도한 음주로 기억을 잃은 게 수차례였다. 가족에게 ‘금주 서약서’를 쓴 것도 여러 번이었다. 끝내 이혼 위기에까지 다다르자 김씨는 재차 서약서를 쓰고 정신과 상담 치료를 받으며 술을 끊었다.

2021년 기준, 최근 1년 동안 월 1회 이상 술을 마신 성인의 비율은 57.4%였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한꺼번에 많은 양의 술을(남성 7잔, 여성 5잔) 마시는 월간 폭음률은 35.6%였다. 성인 3분의 1은 최소 한 달에 한 번씩 폭음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폭음하는 ‘고위험 음주율’은 13.4%다. 평생 살면서 한 번 이상 알코올사용장애로 이환된 사람의 비율은 11.6%다. 우울, 불안, 니코틴 사용 등 주요 정신장애 가운데 평생 유병률이 가장 높다.

알코올사용장애는 천천히 진행되는 만성 진행성 질환이다. 술을 마실수록 남용 및 의존, 중독 가능성이 커지기에 의사는 환자에게 술을 끊도록 권한다. 김씨도 매달 정신과를 찾아 상담하고 약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임원으로 승진한 김씨에게 ‘술 권함’의 강도는 전보다 훨씬 세졌다.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데다, 만나는 사람도 직급이 높은 사람이 많아 마냥 거절하기가 힘들다. 병원에서 조언한 대로 금주 이유를 설명하면서 양해를 구하지만, 계속 이렇게 할 수 있을지 장담하긴 쉽지 않다.”

알코올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지정한 1군 발암물질로, 인간에게 암을 유발한다는 근거가 확인된 물질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은 2019년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연 15조806억원으로 추산했다. 사회경제적 비용은 환자가 의료기관을 이용하면서 지출한 의료비, 간병비, 교통비, 조기 사망으로 발생하는 미래소득 손실액, 일하지 못해 생기는 생산성 손실액 등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김광기 인제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실제 음주는 건강보험 재정 지출의 주요 원인으로, 흡연이나 비만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결국 건강보험료 인상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술을 안 마신 사람이 겪는 간접 폐해

이렇게 추산한 사회경제적 비용도 술을 마시지 않은 제3자가 겪는 ‘간접음주 폐해’를 전부 포괄하진 못한다. 간접흡연처럼, 음주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피해를 끼친다. 음주운전 사고, 주취 폭행,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성희롱·성추행 등이 대표적이다. 40대 직장인 김아무개씨는 일 때문에 거래처 과장과 술을 마시다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술김이라는 핑계로 김씨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다음날 직장 상사에게 이를 고발했다. 상사는 “왜 그런 자리에 갔느냐”고 오히려 김씨를 탓했다.

당시 김씨는 “단순히 술 때문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정상적으로 일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자, 술김을 핑계로 자기 권력을 확인하려는 젠더 위계의 문제를 느꼈다”고 했다. 이 밖에 길에서 취객을 볼 때 느끼는 두려움, 모욕과 폭언, 가정 내 돌봄 방임, 과음한 동료의 일을 대신 떠맡는 것도 간접음주 폐해에 속한다.

최근 들어 질병관리청도 국민건강영양조사와 청소년건강행태조사 등 기존 조사에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간접음주에 따른 폐해 경험을 묻는 항목도 포함했다. 2021년 19살 이상 성인이 경험한 폐해는 소란이 5.5%로 가장 많았고, 폭행 0.8%, 작업 또는 일상생활 중 사고 0.3% 등의 순이었다. 성인보다 음주폐해 인식이 더 큰 청소년의 경험률은 더 높았다. 특히 성별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졌는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는 여성 청소년은 44.6%인데 남성은 14.7%에 그쳤다. ‘공공장소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비율도 여성은 48.5%, 남성은 21.4%로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김광기 인제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간접적 영향까지 고려하면 음주폐해는 공중보건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음주 문제의 요인을 술·사람·환경으로 나눠서 살폈을 때, 그동안 한국 사회는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술은 좋은 것’이라는 문화 속에 내가 사회에 잘 적응하려 음주했는데, 그로 인해 본인과 제3자에게 피해가 생긴다면 누가 보호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음주가 미치는 영향은 음주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가 개입해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제도와 환경이 술을 권장하고, 개인의 문제 음주 행동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당국이 발표한 적정 음주량은?

한국은 다른 선진국과 달리 주류 접근성을 제한하는 정책이 거의 없다. 도수가 높은 증류주인 소주 가격은 저렴하다. 술을 사고 마실 수 있는 시간대, 장소를 제한하는 규제도 거의 없다. 주류판매업 면허도 받기 쉬워서 판매업자 자격도 크게 제한받지 않는다. 독주를 동네 골목마다 있는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이와 대조적으로 엄격한 음주 정책을 펼치는 캐나다는 실내 밖에선 아예 술을 마실 수 없고, 주류 판매가 허가된 식당이나 주류 전문점이 아닌 곳에선 술을 살 수도 없다. 2년 전 캐나다 여행을 떠난 이아무개(50)씨는 슈퍼마켓에서 주류 판매대를 발견해 환호성을 올렸지만, 줄줄이 늘어선 술들의 도수는 모두 ‘0%’로 무알코올 맥주, 무알코올 와인 등 무알코올 주류가 즐비했다. 이씨는 “새삼 한국에서 너무 편하게 술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2023년 1월 캐나다 보건 당국은 성인의 적정 음주 섭취량은 일주일에 술(맥주, 와인, 독주 등) 두 잔 이내라고 발표했다. 한 잔의 음주도 몸에 해로울 수 있고 1회에 두 잔 이상의 술을 마시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공식화했다. 이 보고서에서 제일 처음 내세운 핵심은 “술은 적게 마시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롭다”는 것이다.

국내의 알코올 관련 정책은 음주자 개개인을 치료하는 전통적 방식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개인에게 개입하는 정책보다, 제도와 환경변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접근한다. 제도와 환경을 바꿔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행동양식도 바뀔 수 있다고 본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는 이 관점에 따라 음주폐해 예방과 감소를 위해 각 회원국이 시행해야 할 다섯 가지 전략인 ‘SAFER’ 전략을 권고했다.

△주류의 이용 가능성 제한 강화(Strengthen restrictions on alcohol availability) △음주운전 방지를 위한 대책 강화와 단속(Advance and enforce drink driving counter measures) △음주 문제 선별, 상담 및 치료에 대한 접근성 확대(Facilitate access to screening, brief interventions and treatment)△주류 광고, 후원, 판촉 금지 혹은 종합적 규제 시행(Enforce bans or comprehensive restrictions on alcohol advertising, sponsorship, and promotion) △세금 및 가격 정책을 통한 주류 가격 인상(Raise prices on alcohol through excise taxes and pricing policies) 등이다. 선진국에서 음주폐해 감소 효과를 입증한 정책들이 밑바탕이 됐다.

한국도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음주폐해가 줄어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2021년 ‘국민건강증진법’이 개정되며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공공장소를 금주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다. 도시공원, 하천·강 구역 및 시설, 버스정류소 등 대중교통시설, 어린이 놀이시설, 청소년 활동시설 등이 대상이다. 서울시는 한강공원을 금주구역으로 지정하려 했지만, 시민 반발에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음주 대명사였던 중랑구 대표 쉼터 변화

2024년 1월8일과 15일, 두 차례 찾은 서울 중랑구 면목역광장은 조용하고 취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랑구는 서울에서 고위험 음주율이 높은 대표적 지역이었다. ‘벤치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싸움이 났다’ 등 민원이 쇄도했다. 이런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중랑구는 ‘서울시 중랑구 건전한 음주문화 환경조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개정하고 2023년 7월 면목역광장을 금주구역으로 지정했다. 본격적인 시작은 2024년이다. 2024년 1월14일 계도기간이 끝나 이제는 술을 마실 경우 과태료 5만원이 부과된다.

2024년 1월8일 재정비사업을 마친 서울 중랑구 면목역광장에서 주민들이 산책하고 있다. 손고운 기자

이는 2021년 중랑구에서 시작된 ‘노마드 프로젝트’(NoMAD·No More Alcohol till Drunk)의 일환이다. 음주와 관련해 국내 최초의 지역사회 중재사업으로, 질병관리청의 지원을 받아 가톨릭의대와 중랑구가 진행한 사업이다. 보건소와 구의회, 경찰, 동네의원과 약국, 외식업소, 교육기관, 시민사회 등 지역사회의 다양한 유관기관이 함께 고위험 음주를 막으려 노력한다. 57개 의약기관은 병원이나 약국을 찾은 사람 중 고위험 음주자를 선별해 술이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절주나 금주를 권고한다. 경찰은 음주단속을 강화하고, 무인민원발급기 화면에선 음주 인식을 개선하도록 관련 영상이 재생되고, 학교에선 청소년에게 음주 교육을 한다.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은 관내 387개 외식업소가 참여한 만취 예방 프로그램이다. 한국외식업중앙회의 협조로 가게 안에 “만취 없이 즐겁게”라고 적힌 포스터나 스티커 등을 배부해 부착하게 하고, 외식업소 사장들을 대상으로 예방 프로그램을 교육한다. 가게 문에 ‘음주의 선을 지키는 당신의 응원 맛집’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면목역 인근 ㅊ술집 사장은 “확실히 만취한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이 동네에서 술집을 운영해온 70대 사장은 “불경기 탓도 있겠지만 가게에서 술을 퍼마시고 왁자지껄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요즘은 거의 없다. 캠페인은 특별한 건 아니고 기관에서 음주 방지에 동참하겠냐고 전화가 와서 하겠다고 했다. 손님들한테 점잖게 마시라 얘기하고, 만약 행패나 실랑이가 생기면 바로 경찰이 와서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지역사회가 변하면 많은 사람이 변한다”

성과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랑구의 연간 음주자 고위험 음주율은 3년간 10.8% 감소했다. 연구팀은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중랑구와 나머지 24개 자치구의 음주문화 변화를 분석했다. 공공장소에서 음주자를 목격한 경험을 조사한 결과, 중랑구 주민은 2022년 33%에서 2023년 23.7%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24개구는 33.7%에서 34.6%로 소폭 늘었다. 음주운전 차량에 동승한 경험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중랑구 주민은 2022년 11.2%에서 2023년 5.4%로 감소했지만, 나머지 24개구는 12.3%에서 12%로 비슷했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조선진 가톨릭의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나 시도 차원에서 제도적 접근을 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작은 지역사회가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또 이론적으로 알던 것보다 지역사회는 지역 고유의 문제를 해결할 자원을 같이 갖고 있었다. 이렇게 지역사회가 변하면 많은 사람이 변하고, 결국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질병관리청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노마드 프로젝트는 2023년 말 종료됐지만, 중랑구는 “이 성과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관기관과 긴밀한 협력체계를 유지하며 지역사회 음주문화 개선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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