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인의 연구 공간에서 만난 시와 인생

리빙센스 2024. 1. 2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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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이 만난 문인의 서재 4

허름한 고독이 너울거린다. 환하고 빛나는, 그런데 조금 슬픈 섬. 장석남 시인의 연구 공간에서 만난 시와 인생.

연구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오늘 할 종강을 생각하고 있다. 학교를 떠나는 제자들의 앞길이 내리막길처럼 편하고 오르막길처럼 힘차길 바란다고 했다. 

거기에 섬이 있었다. 한양여자대학교 교수회관 8층. 공중에 떠 있는 연구실에는 새 같은 시인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칠판과 분필, 풍경, 텔레풍켄 장전축, 거문고, 기타, 전각, 바람에 어지러운 난蘭 그림, 그리고 시인이 읽고 있는 보들레르와 소월, 음악 사이에서 탁구채가 조약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 물건들은 모두 그의 시가 되었다. 장석남 시인이 20년 이상 함께한 대학교의 연구 공간은 허름한 고독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 섬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갔다. 모든 것이 환하고 빛난다.

나의 시어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

빈 그릇에 시인이 쓴 분필이 담겨 있다. 시를 담아 놓은 마음 그릇이다.

오래전에 석남이 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 조금 취한 술자리였던 것 같다. 석남은 웃으면서 시란, 손이 닿지 않는 등 어디 가려운 곳에 있다,라고 했다. 그 가려운 자리에, 손가락이 잘 닿지 않은 그런 아슬아슬한 거리에 시가 있는 거라고. 참 적당한 비유다. 석남은 나와 총명한 에디터를 데리고 학교 근처에 있는 뼈해장국 집으로 갔다. 그때 시 이야기가 나왔는데, 석남은 창 밖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눈 내리는 밖을 바라보다가,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네,라고 두 번 말했다고 합시다. 두 번째 '눈이 내리네'부터 시가 되는 거지요…. 첫 번째는 기상현상이고, 두 번째는 마음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연이 있겠지요. 그가 살아온 만큼 말입니다. 그 마음에 혼의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겁니다. 시란 이렇게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아주 일상적인 순간을 잡아내어 자신의 공간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래서 시어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이고 평범한 단어가 적당합니다. 뭘 짜내려고 하면 음, 좀 그래요."

석남은 과거에는 자신의 몸을, 지금은 세상을 보면서 시 이야기를 한다. 그가 살아낸 세월의 힘이다. "내가 써 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일 뿐이다. 나의 시어는 어머니에게 배운 말과 신문에서 배운 시사어 범위 안에서 제한되고 있다."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시어를 정의한다. 어머니에게 배운 말이란 무엇인가? '어머니'가 시어가 되는 것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것은 생래적이다. 가장 위대한 시어는 어머니, 혹은 엄마이다.

어머니는 시인을 낳았고, 시어를 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위대하다. 어떤 작가는 각별하게 의지했던 모친이 돌아가시자 오랜 기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최근에 그와 통화하면서 울컥했다. 나 역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갑자기 눈물이 난다. 아… 그렇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내 마음에 눈이 내린다. 나의 슬픔과 고통을 어머니는 미소로 덮어준다. 이것이 시의 정서일 것이다. 정서는 밖에 사물이 사라지는 순간, 눈처럼 마음에 내린다. 젊은 릴케는 너무나 아름다운 로마의 유적을 보고 슬피 울었고, 옆에 있던 늙은 프로이트가 그를 달래주었다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모든 것은 사라지고 스러진다면서.

그는 칠판과 분필을 쓰지 못하는 강의실이 불만이다. 그래서 칠판을 연구실에 놓고 메모를 하면서 즐긴다. 그날은 이서구의 시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시를 설명해 주는데, 노루와 인삼에 빗대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묘한 구절이 좋다고 했다.

"칠판과 분필"

섬 같은 연구실에 등대처럼 칠판과 하고로모 분필이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유물처럼 보인다. 고대의 유물, 그는 말 이 생기기 전 고대의 융융한 세계를 꿈꾼다고, 그땐 삶이 덜 모순적이고 넓었을 거라고, 그래서 다시 한 살씩 어려져 말을 배우지 않는 어린아이의 세계로, 그저 울음소리로만 말하는 그런 시를 쓰고 있다고 최근에 낸 시집에서 '말' 했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더는 칠판과 분필을 쓰지 못해서 안타깝다고 한다. 시인은 분필의 물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분필을 손으로 잡을 때 느껴지는 촉각, 씨를 쓸 때 슥슥거리는 소리, 지우고 다시 쓰는 여백의 미, 칠판과 분필은 시인이 사랑하는 물성의 촉각, 청각, 시각이 모두 들어 있다. 그 칠판에는 조선 후기 문신인 이서구의 시가 한 자로 두 줄 적혀 있었다. 석남은 노루와 인삼씨에 빗댄 그 시를 읽어주면서 시란 노루처럼 길들이기 힘든 짐승 같다고도 했다. 이서구 선생은 이란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 하는 것에서 나와야 가장 좋다,라고 했다. 석남이 그러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물성에서 글이 나오게 한다. 글이 나온다는 것은 그가 기르던 '소슬'이라는 개가 새끼를 낳는 것과 비슷하다. 새끼보다 친한 물성은 없다. 지금은 전자장치로 차트를 띄우고 미끄러운 매직펜으로 강의해서 재미가 없다고 한다. 고양이를 쓰다듬을 때 털의 온도와 꺼칠함을 생각하면 되겠다. 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거기에서부터 깊어진다. 만약에 핸드폰 사진을 쓰다듬을 때 느낌을 생각해 보자. 매끄럽고 재미없다. 거기에 무슨 사랑이 있겠는가, 사랑하고 싶다면 손으로 만져야 한다. 그것이 오물이건 보물이건 간에. 시인은 만지는 사람이다. 석남은 시를 만지면서, 기타와 거문고, 전각, 탁구공을 만지면서 살아왔다. 그가 물성을 지닌 시를 만지게 된 순간이 있을 것 이다. 그건 사춘기다.

" 학교 공부가 싫어서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던 시절이 있잖아요. 그때는 간절하게 혼자 있고 싶었죠. 잔소리하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이나 읽게 놔두는 그런 공간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가 어디 있어요? 절에 들어가 중이라도 될까 싶기도 했어요. 그런 심경을 달래준 것이 시였어요. 세상에 이런 게 있구나 싶었지요. 기댈 만한 것이 이거다 싶었어요."

"고치 속에 제 몸을 들여놓은 누에가 그 안에서 계속 고개를 저어가면서 집을 두터이 하는 모습을 봤어요. 누에에게 먹일 뽕잎을 따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그 시퍼런 물결 같은 뽕잎을 따던 기억에는 청각과 시각과 촉각까지 아직도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 있죠. 가난한 아이는 누에처럼 참 답답했을 겁니다. 누에고치를 수습해서 어머니는 돈을 만들어왔지만, 늦된 누에들은 그 자리에서 집을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동안 살면서 내 육신은 고통과 증오와 치욕과 방황을 먹고 살았고, 그것으로 집을 지었어요. 그게 시가 될 수도 있겠고, 그러다가 죽으면 나에게도 혼이라는 게 있어서 날개를 펴고 날아올 수 있을까 싶어요. 그런 거죠." 어머니와 함께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먹이던 기억이 그토록 선명한 것은, 잎의 질감과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가난과 햇볕 때문이 아닐까. 살면서 각인되는 기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고, 더욱더 많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런 생을 살면서 좁은 골짜기 같은 기억의 물길이 머물다가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흐르는 물가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노는 송사리 같은 기억들, 계곡 바위에 새겨진 전각 작품 같은 기억들, 몇 기억들이 있다.

여운 화백의 판화와 이중섭의 '은지화' 복제품이다. 신경림, 황석영 선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민족혼을 그린 여운 화백. 선생은 석남과 함께 같은 대학 교수로 만나 각별하게 지내다가 2013년 돌아가셨다. 판화 속의 길이 마치 여운 선생이 걸어간 길 같다. 
기타와 오디오가 고요하다. 이것들이 소리를 내면 예술이 된다. 시도 그런 것이다. 종이 위는 조용하지만, 기타 연주를 하듯이 쓰면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음악을 사랑하는 시인의 즐거운 풍경이다. 

손톱을 깎아 펜으로 만들어라

"요즘엔 정말 시가 안 되네요. 마치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그래서 원고 청탁도 다 '빵구'내고. 그런데, 하나는 꼭 써야만 되는데, 정말 잘 안 나와서 걱정이네요. 그것 참. 잠시 쉬면서 써야지 했다가 1년, 2년이 지나니까, 이젠 정말 힘들어요."

석남은 시를 잘 쓰는 사람이다. 김수영문학상을 시작으로 미당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시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노벨문학상 빼고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를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시인으로서는 참 좋은 일이다. 그 상금으로 생활도 했을 것이다. 그것도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시를 보면 단행본 계약금 300만원을 받고 그걸 어떻게 써야 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것을 모조리 시로 만들어냈다. 카메라, 탁구, 거문고, 기타 등등, 하여간 물성을 지닌 물건들이 석남의 손을 거쳐 시의 혼을 받은 것이다. 시란 그가 좋아해야 나오는 것이다. 설마 석남이 시 쓰는 법을 모르겠는가. 그건 육체에 새겨진 버릇이기도 하다. 죽어가더라도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으면 시인은 손톱을 깎아서라도 시를 쓴다. 유럽의 지성인 카사노바는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는 이상한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베네치아의 피옴비감옥에서 손톱을 깎아 비밀편지를 썼다고 고백했다. 기타 줄을 튕기듯, 손톱을 깎아 글을 쓴다. 뭐 이런 게 시가 아닐까? 울림이 크다. 요즘엔 석남에게 울림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엔 뭐 그리 좋은 물건도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고양이처럼 찾아올 것이다. 그건 분명히 시가 된다.

연구실에 도착한 시집들이 큰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처럼 쌓여 있다. 요즘엔 모들레르의 ‹‹악역 꽃››이 좋다고 한다.

큰 눈이 오면, 눈이 모든 소란을 다 먹으면,

설원과 고요를 밟고 와서 가지 않을 추억이 있다.

– ‹큰 눈› 중에서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새벽길에 나서서 서리 앉은 한길에 앉아 보았지

갈비뼈가 가지런하듯

겨울은 길어 차분하게 정이 들고

긴 겨울 동안 매일의 새벽은

이러한 고요를 가지고 왔던가

매 새벽마다 이걸 가져가라 함이었던가

왜 그걸 몰랐을까

겨울은 가면서

매 새벽마다

이 깨끗한 절망을

가져가자 했던가

꽃씨처럼

꽃씨처럼

–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그는 한때 전각 작품에 심취하기도 했다. 조각칼로 도장을 만들어 인주를 찍어 흰 종이에 누른다. 도장이 사라진 시대에 '고대의 유물'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도장을 쓰는 사람이 많다. 돌에 이름을 새기면 이름이 단단하게 보인다.

한겨울에 겨울의 시를 읽는다. 석남은 이 겨울에 무언가를 쓸 것이다. 단 한 줄이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를 쓰지 말고 인생을 쓰라고 해요. 눈치 보지 말고, 자기를 보라고 말이죠. 시를 써서 즐거워야 하는데 마치 숙제처럼 해요. 입시 준비하듯이 말이죠. 학생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문창과에 왔겠지요. 기준점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는 절대 좋은 시인, 예술가가 되긴 어렵겠지요.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본인이 지겨워서는 안 돼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잘 먹히질 않아요. 그게 좀…."

그의 인생길을 만들어준 서재의 책들, 그리고 잠시 쉬는 소파의 두꺼운 목덜미가 묵직하다. 소파 왼쪽 책장 속에 그의 대학 스승이었던 오규원 선생의 ‹현대시작법›이 보인다. 많은 시인이 읽었을 책이다. 나는 요즘에도 가끔 저 책을 들여다본다.

시를 쓰지 말고 인생을 쓰라고

"절을 좋아해요. 강원도 백담사에서 2년 머물며 건강도 좋아졌고 말이지요. 절이 좋은 건 체질인 것 같아요. 목탁 소리, 새벽 예불 소리도 좋고. 그렇게 절을 다니다 보니 좋은 손님들도 만나고 재미있는 경험도 했어요. 어느 절에서 묵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는 소녀가 절에 들어왔대요. 그리고 거기서 일생을 지내신 거예요. 그렇게 70년 이상을 보내다가 돌아가셨대요. 그 수행만으로도 부처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절 사람들 말이, 그 보살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선한 귀신이 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잠을 자는데 누군가 문을 툭 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바람도 없는데, 사람 그림자도 없는데… 좀 서늘했죠. 그게 바로 할머니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재미있죠? 아, 그리고 거기에서 탁구도 치기 시작했어요."

석남은 참 많은 걸 지닌 시인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텅 빈 그릇 같다. 그는 영화배우가 될 뻔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철수 감독의 영화 <성철>을 찍었는데, 마지막 촬 분을 남기고 IMF가 터지는 바람에 아쉽게도 개봉을 하지 못했다. 정말 다행이다. 만약 영화배우가 되었다면 석남이라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하긴 뭐, 정우성 같은 배우가 될 수도 있었겠지. 기타와 음악을 좋아하니 뮤지션이 될 수도 있었다. 절을 좋아하니 스님이 될 수도 있었다. 참 재주가 많은데 그 재주를 싹 비워버리는 묘한 능력이 있다. 참 부럽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는 예술가다. 그가 이번 겨울에 시를 한 편이라도 썼으면 참 좋겠다. 절 할머니의 한을 예쁜 이야기로 만들어내듯이, 그는 내면의 목탁 소리를 듣는 사람이기에.

뼈해장국 집에서 나와 강의실로 종강을 하러 갔다. 제자들이 참말을 하는 사람으로 사회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참말'이란 그가 생각하는 시의 씨앗일 것이다. 참말의 씨앗을 뿌리는 석남과 그의 제자들, 그것은 봄의 씨앗이다. 그 대지 위로 그날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원재훈 등단한 지 35년이 됐다. 그보다 긴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1988년 가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 발표를 시작으로, 시집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소설 «만남», «망치», 산문집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착한 책»을 비롯해 동화, 번역서 등을 냈다. 문학 관련 TV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국악방송 ‹행복한 문학› MC로도 활약하며 시의 쓸모를 말하고 있다.

CREDIT INFO

editor이승민

words원재훈

photographer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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