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규의 작살]남 치적 시샘 정치인, 용인의 이순신 ‘안홍국’ 칼날에 목 날아간다

2024. 1. 23. 07:4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략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서브주인공 양규와 흡사
가덕도 해전서 전사(수장)
바다에 수장된 충혼, 옷무덤과 말 무덤만 용인에 남아
‘남 치적 시샘정치인’ 안홍국 칼날에 목 날아갈 수 있어
왼쪽부터 안홍국 장군 무신상, 고려거란전쟁역 양규{KBS홈페이지 캡처)

[헤럴드경제(용인)=박정규 기자] #1. 노량, 명랑, 한산 등 수많은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 흥행에 성공했다. 흥행 성공 비결은 간단하다. 우리 역사속 인물 중 이순신 장군 만큼 드라마틱하고 웅장한 기품과 제갈공명같은 지략으로 해전((海戰)에 성공한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인물은 드물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한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이 흥행하면서 이순신 장군이 재조명받고있다.

#2. 이상일 용인시장은 지난해 초 부터 용인 역사를 공부하다 안홍국 장군을 발견했다. 그는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지만 기자경력을 이용해 끝까지 파헤쳤다. 드디어 용인소식지 8월호 커버에 등장했다. 커버 제목이 ‘용인의 이순신, 안홍국 장군을 아십니까’이다. 안홍국(1555-1597년)장군의 삶이 용인소식지에 공개되면서 용인 시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졌다. 용인 이동면 어비리 마을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기 어디쯤에 안홍국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 있었고 그가 죽기로 결심하고 수군(水軍)으로 나아가던 날, 말 잔등에 돌려보낸 군복이 당도했던곳이 있었으니라, 말이 쓰러진 자리, 가족의 통곡이 환청처럼 들렸다”고 이상일 시장은 회상했다.

#3.그의 삶을 조명해보니 국민 모두 결코 잊어서는 안될 만큼 뜨겁게 빛나는 삶을 살았다. 임진왜란때 피난길에서 갈피를 잃은 국왕을 위해 사지( 死地)를 뛰어다녔다. 남쪽으로 내려와 이순신과 함께 승전보를 올렸다. 정유재란에는 불리한 전세속에서 죽음으로 왜를 물리친 ‘불사신( 不死身)같은 장군이다. 왜란 당시 나라가 이순신과 함께 3대 장수로 모셨던 분, 중국 기록에까지 ‘안홍국이 죽기 전까지 일본도 범접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그는 가덕도 불사신이었다

#4. 정유년(1597년) 여름, 왜군이 다시 침공했다. 6월19일 권율 장군이 보성 군수 안홍국에서 종사관을 보내 병력지원을 요청한다. 안홍국은 이에 응해 수군에 들어가 3도 도지사 원균 휘하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참전했다. 안골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안홍국은 왜군을 역습해 선단을 재배열해 가덕도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새롭게 꾸린 두 줄의 선단이 다가왔다. 이들은 측면에서 집요한 협공을 펼쳤다. 일시에 아군이 불리해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군들은 당시 “장군, 우리는 숫자가 적어 잠시 물러섰다 기회를 보아서 다시 공격하는게 좋을 듯 합니다”라고 건의했지만 안홍국은 소리쳤다. “어림없다, 우리는 적과 6년을 서로 싸웠다. 조선 수군이 내내 이길 듯하다가 결국 못이기지 않았는가, 적을 보고 후퇴하면 언제 결판을 낸다 말인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말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길이고, 이기는 길”이라고 호통쳤다. 치열한 가덕도 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조선 후기, 이조참의, 예조참판,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강현 (姜鋧.1650-1733)은 안홍국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그때 저쪽에서 적탄 하나가 날아와 눈썹을 쳤다. 그는 활을 한 아름 당기고 화살을 굳게 잡은채 돛대 옆에 기대 앉았다. 그의 나이 42세다. 전사한 후에도 그는 생시처럼 눈을 부릅뜨고 노여운 안색을 풀지않았다”고 적혀있다. 왜적이 궤멸된 후에나 주저않은채 쓰러졌다. 이순신 장군과 비슷하다.

#5.안홍국 장군은 임진년에 이순신과 함께 세번의 승전을 거뒀다. 국민 상당수가 충무공은 알아도 충현공을 모르고있다. 요즘 TV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 장군을 조명했다. 이 드라마속에는 양규가 등장한다. 양규는 ‘흥화진의 늑대’라는 별칭이 있다. 3만의 고려인 포로를 구해낸 고려의 영웅이다. 드라마가 아니었으면 일반 국민이 잘 몰랐을뻔한 위대한 장군이다. 양규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당도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곳. 흥화진. 양규는 서북면 도순검사라는 막중한 책무를 가지고 흥화진으로 향한다. 40만의 거란군이 흥화진을 에워싸고 며칠 밤을 지새우며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성벽 아래로 거란군의 시체가 쌓여갈 뿐, 거란군은 이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거란의 대군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남쪽을 향해 진군했다. 늑대처럼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던 양규는, 고려 정예병을 이끌고 다시 적진을 향해 달려간다. “절대로 싸우지 말라는 명이 있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양규는 마침내 거란의 황제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달려든다.

#6. 고려거란전쟁 드라마 속 서브주인공인 양규를 안홍국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안홍국은 1592년 임진란때 보성군수로 내려가 있었는데 전란을 맞아 전라좌수사 이순신 수군에 합류하게 된다. 안홍국은 군사훈련과 작전관으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이순신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때론 이순신 직무를 대리했다. 5월7일 옥포해전에서 왜적 30척을 발견하고 선봉에 나서 모두 침몰시켰다.

가덕도서 적탄 맞고 숨진 뒤 눈 부릅뜨고 버텨

#7. 안홍국은 임진왜란 초기에 육지 장수로 활동하다 수군으로 발령하던날 운명을 예감했다. 자신의 애마의 고삐를 풀고 만장등에 그의 철릭(天翼)을 벗고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나의 말이여, 이제 네 신세는 지지않아도 될 것 같다.대신 할 일이 있다. 너는 이 길로 반드시 나와함께 오고갔던 용인 고향마을로 달려가라, 나는 살아서 그 곳에 갈 전망도 미련도 없다. 너라도 가서 유품인 이 옷을 가족에게 전해다오”. 말은 천리 길을 달려 용인 이동면 어비리에 있는 그의 본가에 닿았다. 안홍국의 말은 집 앞에 도착해 마치 힘을 다한 듯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서는 못했다. 용인 이동면 묘봉리 산 26번지엔 작은 무덤 하나가 있다. 앞에는 ‘충신 안홍국 애마비’라고 씌어진 비석이 서 있다. 안홍국의 철릭을 목숨 바쳐 전한 말의 충직한 뜻을 기린 것이다. 가덕도 앞바다에 수장( 水葬)된 장수이니 몸이 올 수가 없었고 그의 묘는 다만 그의 뜻을 담아 보낸 철릭이 묻힌 옷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안홍국은 순흥안씨 가문의 자부심이다. 용인은 이동면 제일리, 백암면 박곡리, 남사읍, 삼가동을 중심으로 순흥 안씨들이 세거해오고있다. 1642년 인조는 용인에 안홍국 충신정려문을 세웠다. 용인사람들은 충무공 이순신은 알고있어도, 충현공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안홍국을 모르면 위대한 용인정신을 놓치는 일이 된다. 사후 200여년이 걸쳐 그의 공훈을 제대로 인식해야한다고 외쳤던 이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모른다. 그건 용인 땅에 ‘옷가지’하나만 비통하게 묻힌 위대한 장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상일 용인시장은 왜 위대한 인물 발굴작업을 올인할까

#8. 이상일 용인시장은 묻혀버린 용인의 위대한 인물을 발굴하고있다. 안홍국도 용인소식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시장은 “이순신 장군만큼 위대한 가덕도 불사신이 용인에서 배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인 시민은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고 했다. 고향 용인 짓밟은 왜장의 선단을 궤멸하고 피난길 왕을 모시고 필사의 미션을 수행한 안홍국 장군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1583년(선조 16년) 24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스토리를 보면서 요즘 스물네살 젊은이는 뭘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긴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흙탕물로 변해 국민들은 정치뉴스를 외면한다. ‘그놈이 저놈, 저놈이 그놈’이라는 정치인식이 그렇다. 4.10총선을 앞두고 그래도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인물이 실존해 역사는 흐른다. 그들이 후세에 목숨걸고남긴 것은 헛소리,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 아니다. 안홍국은 ‘아니면 말고 식’의 요즘 정치판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듯 싶다. 이상일 시장은 360조 국가산단을 용인에 유치했다. 역사에 남을 지략가이다. 국가산단 유치는 지략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 시장을 시샘하는 정치인도 보인다. 왜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심한 정치인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바퀴벌레처럼 뛰어난 생존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남의 치적을 가로채고 싶어하고, 과잉홍보에 물든 정치인은 우선 퇴출대상이다.그러면 안홍국 장군의 칼에 목이 날아간다.

fob140@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