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 조작하고 포르노 찍어내는 정부…80년뒤 러시아가 열광한 이 책 [나쁜 책]
학창 시절 자주 언급된 소설 ‘1984’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국가 시스템이 자행하는 ‘인간성 말살’을 날 선 문장으로 비판한 작품이지요.
하지만 소설 ‘1984’의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독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본디 너무 유명한 책이란, 사실 아무도 안 읽는 책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미 고전이 된 ‘1984’가 다시 화제입니다. ‘1984’는 러시아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옆나라 벨라루스는 ‘1984’를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소설 ‘1984’는 왜 아직도 논란의 중심에 자리할까요. 오늘은 조지 오웰 장편 ‘1984’를 여행합니다.
소설 세계엔 오직 세 개의 강대국만 존재합니다. 러시아가 동·서 유럽을 전부 흡수했고(유라시아), 미국은 북·남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호주, 그리고 영국을 통합했으며(오세아니아), 중국은 동남아 국가와 한국, 일본, 대만 등을 10년간의 전쟁 끝에 점령했습니다(동아시아).
전쟁 중인 세 나라는, 그러나 사실 이념이란 게 별반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 국가이며, 일당독재 하 배급 시스템에 의존하는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윈스턴의 주업무인 기록 변조란 국가가 공표한 통계 수치를 사후에 ‘조작’하는 일이었지요.
정부가 발표한 생산계획은 매번 숫자가 틀렸습니다. 제대로 된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예측했던 수치가 미달했는데도 목표치를 초과달성했다는 식으로 기록을 바꿔치기하는 것. 그게 윈스턴의 일과였습니다.
국민은 정부를 맹신하고 맹종합니다. 시민들은 혼재된 과거 기억과 확실한 현재 기록 사이에서, 윈스턴이 저지른 조작을 신뢰하지요. 그 믿음의 결과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이 퍼졌습니다.
정부에게 조작은, 현실을 장악하는 가장 쉽고 빠른 선택이었습니다. 책은 묘사합니다. “서류상으로는 매년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츠가 생산되지만 국민의 거의 절반이 맨발로 생활하고 있다.”(75쪽) 맨발로 생활하면서도 날조된 기록(부츠 생산 증가)이 주는 희망에 안도했습니다.
남매가 자주 하는 ‘체포 놀이’였지요. 엄마는 “아이들이 오늘 ‘교수형 구경’을 못 가서 저러는 것”이라고 말하며 별일 아닌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시장에선 이런 풍경도 보입니다. 한 중년 여성이 정부가 만든 포스터로 물건을 포장하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그 여성의 치마에 성냥으로 불을 붙입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를 모독했다”는 이유에서였지요.
그런 와중에, 포르노는 국책사업이었습니다. 성욕만큼은 절제가 안 되니, 정부가 아예 ‘싸구려 포르노물’을 직접 만든 겁니다. 채용된 포르노 제작자는 전부 여성이었고 남성은 제외되었습니다. 남성들이 보면 ‘오염’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찰싹 때리는 이야기들’과 같은 저급한 제목의 포르노가 밀봉되어 유통됐다고 책은 서술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무지하고 무비판적인 사람들을 보면서, 윈스턴은 서서히 환멸감을 느낍니다. ‘이 나라가 근원적으로 잘못 작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윈스턴의 반골 기질을 알아챈 회사 상사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접근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정부로부터 사회악이자 병폐로 규정된 ‘지하 반군’ 수장 골드스타인의 수하였는데, 그는 윈스턴에게 한 권의 책을 읽게 합니다. 존재한다고 알려졌지만 정말로 실재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골드스타인의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1984’의 가장 핵심적인 매력은, 이 책을 윈스턴이 읽는 대목입니다. 골드스타인은 왜 이 나라가 영원히 전쟁 중인지를 비판적으로 파고드는데, 여기서 작가 조지 오웰의 통찰이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조지 오웰은 주인공 윈스턴이 읽는 골드스타인의 문장을 통해 ①평등을 정의로 내세우는 자에게 권력을 쥐여줘도 세상의 불평등 구조는 왜 사멸하지 않는지를 고찰하고, 이어서 ②인류는 왜 항상 계층화와 강력하게 결합하여 다수의 노예를 낳는지를 함께 사유합니다.
이는 단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라 소설 바깥을 살아가는 인류사의 풍경이기도 하지요.
좀 더 깊게 들어가 볼까요?
골드스타인의 책에 따르면, 세 강대국은 전쟁으로 인해 얻는 경제적인 소득이나 실익도 없습니다. 이들 국가 내에서 생산과 소비는 하나로 묶여 있어서, 새 시장을 개척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원자재는 자국 내에 풍부했고, 이미 소비 주체도 상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비(非)전쟁 상태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두고 골드스타인은 ‘잉여 생산물의 소진’과 ‘계층 사회의 유지’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 ‘오늘날의 전쟁은 ‘전쟁’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것(세 열강의 전시상태)은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뿔이 이상한 각도로 뻗어 있는 반추동물과 비슷한 모양새다. 이러한 상황이 무의미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잉여 소비재를 소진시킬 뿐만 아니라 계층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정서를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이제 전쟁은 철저한 내국적인 상황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전쟁이 영구히 지속되면서 이제 전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설명이 적절하지 않나 싶다.’ (269~270쪽)
생산을 억제하면 경제 불황으로 이어지고 불황은 일자리를 감소시키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국가 보조금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면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정권이 무너진다고 골드스타인은 봤습니다.
그렇다면 생산을 현재 상태로 유지하면서 잉여 생산물을 시민에게 분배하면 해결될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골드스타인이 파악한 사회주의 정부의 속내는 또 달랐습니다.
그 결과, 일당독재 체제의 허구성을 간파하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정부 지도자들이 실은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면서 자신들을 통치하고 있다’는 진실에 가닿는다는 겁니다. 그게 정부의 본성(本性)이라고 골드스타인은 기술합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정부에겐 이런 결론이 타당해집니다. ‘잉여 생산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도록 시민 전체의 노동력을 동원하되 분배는 하지 않음으로써 전(全) 사회의 궁핍을 영구적으로 유지시킨다.’
그걸 가장 손쉽고도 간명하게 진행시키는 방법은,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철저히 무의미한, 그러면서도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전쟁 말입니다.
윈스턴이 살아가는 오세아니아 국가는 세 개의 계층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상징적인 제1 통치자 빅 브라더 밑에는 600만명으로 제한된 내부당(黨)이 자리합니다. 그들은 특권 계층입니다. 인구의 2% 정도로 구성되지요.
내부당 산하에는 총인구의 13%에 달하는 외부당이 있습니다. 윈스턴이 외부당원 중 한 명입니다. 나머지 85% 일반인은 힘없는 대중입니다.(소설에선 ‘프롤’로 지칭, 프롤레타리아란 의미)
저들 세 계층은 비중은 달라도, 구성의 원리는 인류사에서 늘 같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최고위 계층(제1그룹)은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중간계층(제2그룹)은 최고위 계층으로의 진입을 희망했으며. 굶주리고 헐벗은 하위 계층(제3그룹)은 아예 모두가 평등해질 수 있는 전복적 사회를 꿈꿨으니까요.
◎ ‘과거에는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평등이라는 명분 아래 혁명들이 자행되었다. 이들은 옛 독재를 몰아내자마자 또다시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목표는 포기되었다.’ (274~275쪽)
제2그룹은 제3그룹의 평등과 자유를 명분 삼아 기존의 제1그룹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제1그룹으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사회 체제가 바뀌면 사회 전복의 명분으로 사용된 제3그룹은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제2그룹에서 낙오된 사람들과 제1그룹의 잔당이 합세해 ‘새로운 세상의 제2그룹’을 형성합니다. 그 결과, 사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조지 오웰은 골드스타인의 글을 통해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인간들 간의 간격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다.”(273쪽)
오브라이언을 통해 골드스타인의 책을 접했던 윈스턴은 결국 검거되고, 고문 끝에 사랑하던 애인 줄리아를 밀고하고 배반합니다. 그의 애인 줄리아 역시 윈스턴을 배신합니다.
총 3부로 집필된 400쪽짜리 책에서 두 사람의 배반 과정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그 내용은 직접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최근 다시 또 화제가 됐습니다. 러시아 서점가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2022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해로, ‘1984’ 내용이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는 게 서구 외신의 분석입니다. 전쟁의 무의미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음하는 대중들(강제 동원된 병력)이 이미 ‘1984’에 예견돼 있으니까요.
작년 2023년엔 더 웃지 못할 뉴스가 보도됐는데, 2023년 러시아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이 바로 ‘1984’였다고 합니다.
벨라루스 주간지 나샤 니바(Nasha Niva)에 따르면, 벨라루스 정부는 “조지 오웰의 책 판매를 중단하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1984’ 등 오웰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의 대표는 안드레이 야누쉬케비치로, 그는 구금 몇 개월 뒤 출판사 등록을 취소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1984’ 출간과 독서가 권장될 정도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소설 ‘1984’가 러시아 등 동유럽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구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인공 윈스턴의 국적이 오세아니아이고, 오세아니아는 미국과 영국의 서구문명 복합체라는 논리이지요. (하지만 조지 오웰이 생각한 오세아니아가 미국이나 영국을 닮았는지, 구소련과 러시아를 닮았는지의 답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요.)
푸틴과 트럼프, 한때 ‘스트롱맨’으로 불렸던 국가 지도자의 시대에 ‘1984’가 소환된 겁니다.
하지만 오웰의 문학은 이미 그 성취도가 탁월합니다. 개인적으로 오웰의 문학이 걸작인 이유는 그가 항상 세계사의 현장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오웰은 현대사의 현장에 목숨을 걸고 직접 뛰어들었고, 그 경험을 책으로 썼으니까요.
그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파리의 빈민가와 런던 부랑자의 극빈생활을 체험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바르셀로나로 가서 시민군으로 참여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리허설”로 불리게 될 만큼 거대한 이념의 각축장이었습니다.
당시 오웰은 교전 과정에서 목에 관통상을 당할 만큼 크게 다쳤지만, 현장을 중시했던 그의 스페인 내전 경험은 훗날 ‘카탈로니아 찬가’로 기록됐습니다. (앞서 영국 식민지 제국 경찰 경험은 책 ‘버마 시절’로 집필됐습니다.)
대신 ‘옵서버’에서 종군기자로 2개월간 활동하며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지요.
식민지에서 또 전쟁터에서 조지 오웰이 걸었던 걸음은, 한 개인이 선택한 여유롭고 흥미로운 산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완전한 실체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지요.
오웰의 도정은, 비극적인 세계를 직접 온몸으로 걸으면서 감추어진 진실을 파악하고 인간이 비극을 견딜 수 있는 돌파구를 발견하려는 한 인류의 걸음이기도 했습니다.
격변의 시대는 오웰 자신의 소설적 독무대였던 셈이지요. 우리가 조지 오웰에게 감화되고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저 ‘현장성’에 있을 겁니다.
20세기 초의 또 다른 명작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쓴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조지 오웰의 이튼 칼리지 재학 시절 프랑스어 교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미래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멋진 신세계’는 ‘1984’와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하지요. 통제된 사회의 암울함이란 뼈 아픈 공통점 말입니다. 사제지간인 둘은 미래사회를 그리면서 인간 세계에 펜과 종이로 경고음을 울렸습니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떠나 개인과 사회는 영원히 대립하기 마련이며, 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모든 개인이 당면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조지 오웰의 소설은 바로 저 위기의 징후를 파악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진실한 종(鐘)인 것이지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초저음 주파수처럼 말입니다. “완전히 비정치적인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오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공시성(synchronicity)은 ‘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들의 보편성’을, 통시성(diachronicity)은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시대에나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보편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공시성과 통시성은 문학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문학은 한 시대의 독자를 감동시킬 때 위대한 문학으로 도약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한 공시적 문학은 놀랍게도 통시적 문학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시대의 독자를 움켜쥘 가능성을 획득하니까요. 조지 오웰의 문학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오웰의 소설 ‘1984’가 다시 회자되는 이유는 전체주의의 출몰에 대한 1940년대 시민들의 불안감을 움켜쥐면서도, 동시에 2020년대 현대사회의 불안감까지 동시에 증거하기 때문이겠지요. 공시적이면서도 통시적인 감각을 유지하는 문학, 그게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책의 유일한 조건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금서기행, 나쁜 책]에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독자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3년 7월 15일 첫 연재 이후 6개월간 주말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했더니 다소 지쳤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 댓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형식, 새로운 글이 담긴 시즌2로 찾아뵙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쁜 책’은 없습니다. 연재에서 다룬 책은 전부 ‘좋은 책’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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