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찬 의원과 강규태 판사가 드러내 보인 ‘자존심 근육’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1. 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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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멸망의 첫번째 이유로 엘리트 군인이었던 근위대의 타락을 꼽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 제국 쇠퇴의 첫 번째 징후이자 원인으로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근위대’의 타락을 꼽았다. “근위대는 황제의 약점과 악행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경멸하게 됨으로써, 명확한 실체가 없이 가상적으로 형성되는 권력에 대해 적당한 거리감과 신비감이 있을 때만 유지되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었다.”

서기 193년 황제 페르티낙스를 암살한 후 한 근위대원이 방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근위대원은 로마황제 자리가 공매에 부쳐졌으며 근위대에 최고액을 제시하는 입찰자에게 낙찰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이때 입찰에 응한 귀족이 두 명 있었으니 한명은 근위병 한명당 5000드라크마의 하사금을 약속했고 나머지 한명은 6350드라크마로 값을 올렸다. 값을 높여 부른 인물이 로마 열아홉번째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다. 그 후 로마 제정은 개혁군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출현하기 전까지 약 100년 동안 대체로 시시했던 황제들과 그런대로 괜찮은 황제 마저 시시하게 만드는 근위대의 농단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한 나라가 타락할 때는 타락의 징후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최근 한 국회의원과 판사에게서 그 징후를 보고 마음이 언짢았다. 타락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기율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회의 타락이란 무엇인가. 그 나라 국민의 기풍, 특히 엘리트의 수준이 급전직하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나 판사라고 해서 모두 엘리트인 것은 아니지만 평균에 못 미치면 튀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무형의 진리가 엘리트 조직내 비엘리트들의 돌출을 억지하고 그 결과 세상은 그럭저럭 상식을 유지하며 나아간다.

그 상식이 탁 소리와 함께 두절되는 순간이 있다. 방벽 위에 올라선 로마 근위대원이 황제 자리를 공매에 부쳤을 때, ‘원칙과상식’ 4인방 중 한명이었던 윤영찬 의원이 홀로 더불어민주당 잔류를 선언했을 때, 이재명 민주당 대표 선고를 앞둔 강규태 판사가 사표를 제출했을 때 그런 두절음이 들렸다. 모두에게 들리는 것은 아니고 상식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에게는 들린다.

근위대와 윤 의원, 강 판사에게 공통적으로 결여된 것은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이익과 부끄러움이 다툴 때 부끄러움 편에 서서 지지하게 하는 근육이다. 자존심 근육의 발달 정도는 개인적인 문제 같지만 실은 사회적, 문화적 요인이 훨씬 크다. 가령 남성의 성에 관대한 문화권이라면 엘리트가 복잡한 혼외관계에 얽혔다고 해서 자존심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자존심 근육은 배타적 성관계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에 비해 빈약하다. 을이 갑을 접대하는 풍습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공무원이 업자로부터 호텔에서 한 끼 접대받았다고 해서 자존심이 부대낄 일이 없다.

윤 의원과 강 판사의 처신이 씁쓸한 것은 우리 사회의 빈약한 자존심 근육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뜻을 뭉친 네명의 남자가 있다. 통음과 번민의 밤을 무수히 함께 한 사이다. 마침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한 당일 아침, 한명이 쪼르르 빠져나간다. 그 원형에 해당할 캐릭터가 15세기 조선에 있었다. 성삼문 등 사육신과 단종복위 운동을 꾀하다 거사 직전 일러바친 김질. 그 공으로 김질은 좌의정까지 출세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김질을 사람 취급 안 했다. 윤 의원 세대는 다 아는 고사다. 윤 의원이 ‘현대판 김질’의 길을 택한 것은 자존심의 기준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김질이 죽어서도 배신의 아이콘으로 오명을 떨친 것은 조선시대 일이다. 윤 의원은 ‘요즘 세상에 그럴 일 없다’고 봤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자존심 기준을 얕본 것이다. 어쩌면 정확하게 본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판사들이 자존심이 센 직업이라고 생각해 왔다. 20대 때 만났던 서울중앙지법의 어느 단독판사는 ‘기자 따위의’ 말이 공순치 않다고 술잔을 던지기도 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판사의 자존심은 판결문에 담기면 되는 것이다. 강규태 판사는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내가 건 일말의 기대를 무산시켜 버렸다. 자기가 심리한 사건의 판결을 남에게 미루는 판사는 중요한 사실을 취재해놓고 개인적 이해 때문에 쓰지 않는 기자보다 더 문제가 있다. 판사는 당연히 판결문을 ‘기사 따위’보다 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강규태 판사에겐 무엇이 중한지 궁금하다. 강규태 판사 같은 사람이 판사 사회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더 궁금하다.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존심이 결여된 행태를 보일 때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해석하면 안된다. 그것은 집단 타락의 징후이거나 표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집단의 자존심이 낮아지면 문명의 수준이 낮아지고 결국엔 망한다. 로마를 비롯해 다 그렇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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