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王氣) 서린 현대그룹 계동사옥 터
풍수는 땅에서 나오는 기운을 해석하는 행위다. 땅 기운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풍수 전문가의 몫이라 하더라도, 일반인도 명당과 흉당을 구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터의 내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국내 재벌 창업주들은 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들은 터를 선택할 때 '땅의 역사'도 중요시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그룹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인 옛 삼성생명 본관(현 부영태평빌딩) 터다. 이곳은 조선 고종 때 근대식 백동전을 찍어내던 전환국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도 부영태평빌딩과 바로 이웃한 신한은행 사이에는 '전환국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서울시 중구 태평로2가 69-20). 1984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부를 대표하는 조폐기관 터에 건물을 세움으로써 땅의 재물 기운을 누리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왕기 터에 들어선 현대사옥
터를 사용하기 전에 땅의 내력을 살펴보는 행위는 매우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조선 성종 때인 1477년 당시 세도가 임원준은 왕기(王氣; 왕의 기운)가 서린 터에 자손의 집을 지었다. 임원준이 집터로 선택한 곳은 이미 40여 년 전인 세종 임금 때 지관 최양선이 경복궁, 창덕궁보다 더 나은 '나라의 명당'이라고 호언장담했던 터였다. 당시 이곳에는 나라의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 일대가 바로 그곳이다.이 터에 대한 사연을 더 들여다보자. 당시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조정 대신들에게 최양선의 주장을 검토해 보도록 지시했다. 정통 성리학만 숭상하던 유신(儒臣) 대다수는 최양선을 '망령된 자'로 몰아붙였다. 풍수설 같은 잡된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세종에게 간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종은 승문원 터의 기운을 받아 영웅호걸이 나오면 국가 사직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세간의 소문을 무시할 순 없었다. 세종은 대안으로 100여 간 규모의 별궁 건설을 지시했으나 대신들은 이마저 반대했다. 결국 세종은 아예 승문원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면서, 이 터를 그 누구도 쓰지 못하게 하는 쪽으로 결론지었다.
한동안 '잊힌 땅'이었던 승문원 터는 성종 때 이르러 다시 주목받게 된다. 임원준의 손자가 선왕인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례를 치른 후 이곳에 신혼집을 지었던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즉각 투서가 날아들었다. "임원준이 궁궐을 지을 땅에 자손의 집을 짓고 있으니 이는 반역과 같은 죄"라는 상소문이었다. 급해진 임원준은 성종에게 그곳이 길지가 아님을 납득시켜야 했다. 임원준은 "이 땅이 일찍이 벼락을 맞은 바 있고, 또 시속(時俗)에 독녀혈(獨女穴)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살다가 일찍 과부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고 변명했다. 나라의 대명당인 승문원 터가 졸지에 과부를 배출하는 독녀혈로 둔갑해버렸다.
사실 임원준은 풍수지리설에 매우 밝았던 인물이다. 승문원 자리가 흉지였다면 피붙이 손자가 신혼집을 차리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터다. 성종도 임원준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외척이기에 '믿어주는' 쪽으로 사태를 수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터는 관상감, 흥선대원군의 조카 완림군의 집터, 휘문고교 등으로 활용되다가 1983년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에 의해 현대그룹 계동사옥으로 변신했다.
현대그룹을 상징하는 이곳에 터를 마련한 이후 고(故) 정주영 회장은 왕기를 꿈꾸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통일국민당 창당, 1998년 '소떼 방북' 등 대북사업 등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문원 터의 왕기를 톡톡히 누린 이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옥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00여m 떨어진 윤보선 가옥(1870년 건립)에서 대통령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일대는 기운이 왕성한 명당 혈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것도 사실이다.
풍요 명당에 한옥 분양한 조선의 디벨로퍼
민족의식이 강했던 정세권은 용산과 명동에서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들이 들어선 청계천 북쪽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람 수가 힘"이라고 믿은 그는 이 일대 땅을 사들여 20~30여 평 규모의 작은 한옥들을 지어 조선의 중산층 및 서민들에게 싸게 팔았다. 이런 식으로 다닥다닥 붙은 '퓨전 한옥' 마을들이 종로구 익선동과 북촌 이곳저곳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아무렇게나 땅을 사들인 게 아니다. 몰락한 양반들의 땅과 한옥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는 1929년 고종의 서자 완화군의 사저인 완화궁 터(종로구 익선동 33)를 개발한 이후, 특히 익선동 166번지 일대를 주목했다. 이곳은 원래 '강화 도령' 철종 임금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저인 누동궁 터로 철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정세권은 땅을 매입한 뒤 개량 한옥들을 지어 조선인들에게 분양했다. 옛날부터 명당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곳은 조선 사람들에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지금의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이 탄생한 배경이다. 현재 100여 채의 한옥이 올망졸망 들어선 이곳은 2018년 서울시 한옥 보존 정책에 따라 '한옥밀집지역'으로 지정됐다. 익선동 한옥거리를 걷다 보면 땅에서 풍요의 지기(地氣)가 가득하다.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 거리는 궁중 요리, 궁중 한복 등 다양한 궁중 문화가 흘러나온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가 해체되면서 궁궐 밖으로 나온 궁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종로구 가회동과 삼청동 등 북촌 한옥마을도 정세권의 작품이다. 북촌 한옥역사관에 가면 정세권이 지은 조선집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북촌 역시 조선의 왕족, 양반 가문, 권력층들이 집중적으로 살았던 곳으로 명당 기운이 포도송이처럼 서려 펼쳐져 있다. 이처럼 그는 역사적 내력이 확실한 곳을 개발함으로써 조선의 자존심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개발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풍수는 사람의 삶을 담고 있는 스토리(역사)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땅의 내력을 들여다보면 그 땅의 미래 가치도 파악할 수 있다.
안영배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풍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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