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쫓겨났던 서울 사대문 안에 死者를 위한 공간이 있네

박종인 기자 2024. 1.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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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성공회성당에 있는 무덤의 비밀

‘도성 10리 안으로 들어와 무덤을 쓴 자는 사형에 해당하나 감하여 유배를 보낸다.’(‘대전통편’ 형전 금제(禁制) 경성십리내입장자(京城十里內入葬者))

조선시대 수도 한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사대문 안은 물론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부르는 성밖 10리까지도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거기에 사람을 묻으면 사형에 맞먹는 유배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 엄한 조선 법과 관습에도 불구하고 사대문 안에 무덤이 있는 공간이 있다. 서울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가톨릭 명동성당이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1층에는 성세례요한성당이 있다. 여기에는 이 성당 건물을 건축한 3대 교구장 마크 트롤로프 주교가 묻혀 있다. 천주교 명동성당에도 지하묘지가 있다. 여기에는 2대 조선교구장 라우렌시오 주교와 병인박해의 계기가 됐던 4대 베르뇌 주교 유해가 안치돼 있다. 사대문 안에 유이(惟二)한 매장지다.

서울 정동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안에 있는 성세례요한성당. 바닥에 성공회 3대 조선교구 주교 트롤로프 신부 유해가 안치돼 있다. /박종인 기자

지켜지지 않은 매장 금지

조선왕국 법률에 따르면 사대문 안은 물론 사대문 바깥 성저십리까지 모두 묘를 쓰지 못하는 금장(禁葬) 지역이었다. 성저십리는 일종의 그린벨트다. 법전에는 성저십리 범위가 아주 상세하게 규정돼 있다. 동과 서는 수유리와 마포, 남과 북으로는 용산과 은평까지가 대략 성저십리다.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광희문(남소문)과 소의문(서소문)을 통해 성저십리를 지난 뒤 매장해야 했다. 시신이 나간다고 해서 이 문들을 시구문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 인구가 증가하고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성저십리에 묘를 쓰는 사례가 급증했다. 게다가 풍수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수도 한성이 풍수적으로 명당이라 생각하고 암장하는 사례가 끊임없었다.(다카무라 료헤이, ‘공동묘지를 통해서 본 식민지시대 서울’, 서울학연구15,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0)

결국 사람들은 시구문을 통해 도성을 나가자마자 열려 있는 그 언덕에 묘를 썼다. 구한말에 촬영된 한 사진에는 한성 성곽이 보이는 언덕에 바글바글하게 몰려 있는 분묘 집단이 보인다. 남쪽 시구문인 광희문은 문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무덤이 몰려 있었다.

1903년 남대문 정차장 건설 때 용산 지역 분묘 1600여 기가 문제가 됐다. 1905년 용산 서쪽 둔지미 지역을 일본군이 수용해 군사시설을 만들 때 이장한 분묘가 111만7308기였다.(다카무라 료헤이, ‘공동묘지를 통해서 본 식민시대 서울’, 서울학연구 15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0) 15년 뒤인 1920년 당시 서울 인구가 25만208명이었다.(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인구성장추이’) 법에 충실하자면 자그마치 100만 명이 유배형을 받아야 할 물증들이다.

성저십리 옛 무덤들이 양성화된 때는 1912년이다. 그해 6월 20일 총독부는 공동묘지에 관한 법을 만들었다. 총독부는 “조선시대부터 자연적으로 생긴 공동묘지도 여유가 있으면 이용하라”고 지시했다. 1913년 9월 1일 옛 성저십리 지역에 공동묘지 19군데가 개설됐다.(1912년 6월 20일, 1913년 9월 6일 ‘총독부 관보’) ‘공동묘지’라는 용어가 이때 처음 사용됐다. 1936년 이들 공동묘지는 경성 도시 확장으로 망우리, 미아리 등지로 이전됐다.

한양 도성 바로 바깥에 형성된 무덤들. 조선 법률에 따르면 도성에서 10리까지 '성저십리'는 무덤을 쓸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이같은 금지령은 실질적 효력이 없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성공회주교좌성당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덕수궁 북쪽 돌담길 건너편에 있다. 1890년 12월 21일 영국 성공회 존 코프 신부가 이곳에 있던 한옥집에 장림성당을 세웠다. 식민시대엔 1912년 대한제국 구황실은 총독부 요청에 따라 왕실 교육기관인 수학원 땅을 성당에 무료로 빌려줬다.(1912년 3월 28일 ‘순종실록부록’) 성당은 덕수궁 북쪽 수학원 부지까지 확장됐다. 지금은 이 자리에 수학원 시절 건물인 양이재가 복원돼 있다.

10년 뒤인 1922년 당시 주교 트롤로프 신부는 영국왕립건축협회 소속 건축가 아더 딕슨 설계를 토대로 지금의 성당 건물을 지었다.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 성당도 트롤로프 신부가 만든 건축물이다. 사회주의자였던 트롤로프와 딕슨은 장식미와 장엄미를 버리고 눈높이를 낮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성당을 만들었다.(강영지, ‘20세기 초 성공회의 강화성당과 서울주교좌성당의 설계와 건립에 관한 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석사논문, 2017)

1926년 자금 사정으로 4년 만에 공사가 미완으로 끝났다. 십자가 형태로 설계됐던 건물은 일자형에서 멈췄다. 아쉬워했던 트롤로프 신부는 정해뒀던 ‘성모 마리아와 성 니콜라스성당’이라 부르지 않고, ‘예비 대성당(pro-cathedral)’이라고 불렀다. 트롤로프는 1930년 일본 여행 도중 고베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세상을 떴다. 첫 삽을 뜨고 71년이 지난 1993년 딕슨이 만든 설계도가 그의 고향인 영국 버밍엄에서 발견됐다. 1996년 마침내 딕슨의 설계에 거의 일치한 모습으로 성당이 완공됐다.

풀려난 금기, 무덤

성당 1층 ‘성세례요한성당’ 바닥에 성당을 책임지고 성당 건축을 주도했던 트롤로프 주교가 안치돼 있다. 성공회, 가톨릭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매장 방식이다. 개신교계에서는 ‘함께 묻힌다는 공동체로서 소속감’이기도 하고 성공회와 가톨릭에서는 ‘성인들 무덤 자리에 제단을 만든 전통’이기도 하다.(이정구, ‘교회건축에서 죽은 자의 공간’, 장신논단 40집,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 문화연구원, 2011)

1996년 원설계대로 교회가 완성되고 이듬해 납골당 ‘안식의 집’이 성공회 주교좌성당 안에 설치됐다. 사대문 안에 유일한 납골당이다. 유골 1080기를 수용할 수 있다. 현재 서울 용산구 산천동 용산성당, 성북구 정릉3동 여래사, 은평구 진관내동 흥창사, 강남구 포이동 능인선원이 납골당을 운영한다. 이들 종교시설은 모두 옛 성저십리 바깥 공간이다. 어느 틈에 서울 정동은 전(前) 근대적 금기가 완벽하게 사라진 공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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