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경비원… 3시 50분, 8146번 버스가 새벽을 깨우며 달린다

구아모 기자 2024. 1.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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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15분 앞당긴 8146번 첫차 직접 타보니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강남구 논현동까지 운행하는 ‘8146번’ 버스는 매일 새벽 3시 50분에 첫차가 출발한다. 서울에서 가장 일찍 움직이는 출근 버스다. 5분 간격으로 3대가 출발하는데, 손님들은 이 3대를 묶어 ‘첫차’라고 부른다. 손님은 서울 강남 빌딩에서 청소부나 경비원으로 일하는 50~60대가 많다. 이른 시간이지만 자리가 없어 강남까지 1시간 20분쯤 선 채로 가기도 한다.

그래픽=백형선

19일 오전 3시 50분 상계동 차고지에서 출발을 준비 중인 8146번 버스에 승객이 하나둘씩 올라탔다. 두 정거장쯤 지나 오현서(62)씨가 탔다. 첫차로 출근하는 그는 군자역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청소 일을 한다. 오씨는 과거 경기 구리시의 재래시장에서 농산물 유통을 하던 사장님이었다. 그는 “항상 새벽같이 나가야 하니까 스스로가 불쌍하고 짠하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그래도 몸 안 아프고 일할 수 있어서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매일 새벽 8146번 버스를 타는 손님들은 서로 얼굴을 안다. 어디에서 타고, 어디에서 내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서로 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서로 인사도 한다.

상계동을 출발한 버스가 20분쯤 지나 중계역을 지날 무렵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앞문까지 손님이 가득 차 뒷문으로 한두 명이 내려야 앞문으로 한두 명이 탈 수 있을 정도였다. 매일 출근길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을 본 승객은 “가방 이리 주세요” “여기다 놓아요” 하며 다른 승객의 가방을 받아줬다.

다른 시내버스의 첫차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8146번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노원구 하계동 차고지까지 가는 버스 운전기사 최회만(66)씨는 새벽 4시 30분 첫 출발 하는 버스를 운행한다. 최씨는 “미리 가서 차도 빼 놓고, 돈 통도 점검해야 한다”며 “예전에는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있는 교통편이 없어 자가용을 타고 다녔는데, 작년부터 8146번이 생겨 참 좋다”고 했다.

매일 새벽 3시 50분 노원구 상계동에서 출발하는 '8146번 버스'. 서울에서 가장 빨리 출근하는 시민들이 탄다. 19일 새벽 버스는 수락산을 지나 중계역쯤 가니 붐비기 시작했다. 영동대교 북단쯤에선 승객을 더 태울 수 없을 만큼 꽉 찼고, 한강을 건너 삼성동, 봉은사 등 강남 빌딩 숲을 지나자 버스는 순식간에 텅 비었다. /구아모 기자

8146번 버스의 첫차 출발 시각이 새벽 3시 50분으로 당겨진 것은 작년 1월 16일부터다. 원래는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146번 버스였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새벽 만원 버스’ 체험을 하려고 146번 버스를 탔는데, “첫차 시각을 앞당겨 달라”는 승객들 요구가 쏟아졌다. “어차피 일찍 가야 하는데 5분이라도 빨리 가야 믹스 커피 한 잔 마시고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람도, “첫차 출발 시각을 15분 당기면 버스 3대가 더 다니게 되니 자리에 좀 앉아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부터 출발 시각을 당기고, ‘맞춤형 노선’을 구분하는 8자를 붙여 8146을 만들었다.

8146번 버스에서 만난 김모(65)씨는 “전에는 버스가 너무 붐벼서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친 적도 있었고, 뛰어서 버스를 잡아 타거나 밀고 들어가야 겨우 타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제 한결 여유로워졌다”며 웃었다. 또 다른 승객은 “출발 시각이 15분 당겨지니 차가 덜 막혀 출근에 걸리는 시간이 30분가량 줄었다”며 “회사에 일찍 도착해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나눠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버스가 영동대교 북단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4시 50분쯤. 이때부터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승객들 틈에 끼여 인사를 못 나눴던 이들이 “언제 거기 있었어?” “처음부터 서서 온 거야?” 하며 내리는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오전 5시 10분쯤 회차 지점인 강남구 신논현역에 다다르자, 승객 대부분이 앞다퉈 버스에서 내렸다. 승객들은 “벌써 금요일이네. 언니, 월요일에 봐”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 일터로 향했다. 5년째 신논현역 근처 빌딩에서 청소 일을 하는 박창분(67)씨는 “첫차 타는 사람들은 다 강한 사람들이에요”라며 “자식들이 아무리 성공해도 용돈을 그만큼씩 많이 주겠습니까. 힘들기는 한데 제가 직접 벌어서 지내니까 떳떳하고 좋아요” 하고 웃었다.

8146번 버스를 운행하는 운전기사 윤종수(64)씨는 “내 출근 시간이 더 빨라졌지만 가족보다도 자주 보는 승객들이 시간 당겨졌다고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좋다”며 “커피나 귤, 유자차 같은 걸 쥐여주는 승객도 있고, 늘 타던 손님이 안 타면 ‘어디 편찮은가?’ 걱정도 된다. 올해도 손님들 모두가 건강하게 버스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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