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밖의 고사성어…'내로남불'부터 '개권유득'까지[책볼래]

CBS노컷뉴스 김민수 기자 2024. 1. 1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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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고사성어(사자성어)처럼 쓰이는 이것의 뜻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의미로 국어와 영어, 한자어가 뒤섞인 국적불명의 표현이다.

2021년 4·7 재보궐선거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에 'naeronambul'로 소개될 정도로 국내 정치계에서는 위선적인 상대 정치인을 비판하기 위해 빼놓지 않고 쓰인다.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이미 비슷한 표현이 등장한다.

'기독교 100년과 한국 교육'(김인회·기독교사상 1984년 5월호)에는 요즘 학생들의 농담이라며 '내가 하는 연애는 로맨스이고 남이 하는 연애는 스캔달'이라는 표현을 소개하고 있다. 실제 대중화된 탓인지 이문열이 1987년 발표한 단편소설 '구로 아리랑'에도 등장한다.

1993년에는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이영미 외·모아도서출판)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2005년 1980년대 신군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김재익이 갈등이 심했던 허화평에게 하는 말의 일부로 나온다.

일설에는 1996년 6월 12일에 국회본회의장에서 당시 신한국당 박희태 의원이 야당을 비판하면서 "야당의 주장은 내가 바람을 피우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부동산을 하면 투자, 남이 사면 투기라는 식"이라고 한 말이 뉴스에 크게 보도되면서 대중화됐다. 이를 줄여 '내로남불'이라는 희대의 신조어가 만들어지고 관용적 고사성어 형태를 띄게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예스24 갈무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지만 좀 더 정리해보면 80년대 표현처럼 '내연남불'이거나 90년대 표현처럼 '내로남스'가 되어야 했지만 90년대 후반 정치계 은어처럼 사용된 이 말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며 국적불명, 기원불명의 '내로남불'이 된 것도 모자라 일부에서는 고사성어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부족한 것은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새해를 상징하는 고사성어(사자성어)를 선정해 온 교수협회가 근본도 유래도 없는 '내로남불'을 대체하고자 2020년 말 내놓은 신조어 사자성어 '아시타비'(我是他非)는 또다른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로는 복잡하고 자극적인 '여의도식 언어'를 대체하기 힘들었던가 보다.

2018년 6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TV 토론 중 당시 자유한국당 정태옥 의원이 '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는 지역 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된 '이부망천'(離富亡川)도 마찬가지다.

2021년 4월 12일자 문화일보 칼럼에서는 '내로남불'을 다루며 "나와 남으로 갈라치기 해 놓고 시비를 가르는 위선적인 정치인과 그 주변 세력들로 인해 만들어진 내로남불은 조어법상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말, 시쳇말로 귀태어(鬼胎語)"라며 교양 없음을 비판했다.

'내로남불'만이 아니다. '낙장불입'(落張不入)은 화투 용어이고 관료와 공무원 사회를 비판하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은 1990년대 전후에 등장한 말이다. 이 외에도 IMF 외환위기 이후 확산 된 '신토불이'(身土不二), 온라인 은어로 회자되는 '회유불탁' 등도 사회상의 변천에 따라 고사성서의 관용적 표현을 차용해 만들어진 용어들이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사성어가 내포한 성현의 경험적 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중국이 혼란하던 전국시대, 제자백가들과 위정자들이 자신들이 겪은 일화와 깨달음을 근거로 이를 한데 모아 관용어처럼 쓰던 것이 고사성어다. 네 글자로만 이루어진 사자성어를 포괄한다.  

추수밭 제공


'상식 밖의 고사성어'(추수밭·2024)의 저자인 연세대 중국연구원 채미현 전문연구원은 "불과 10~20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사용하던 말이나 표현을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기도 하고, 어제까지는 없던 신조어가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며 "이러한 말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고사성어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을 굳건하게 견디면서 살아남았다. 네 글자의 표현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던 고사성어의 의미가 사실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됐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릎을 칠지도 모른다.

'구우일모'(九牛一毛)는 아홉마리 소 가운데 털 하나라는 뜻으로 매우 많은 것 가운데 적은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한 죄로 궁형에 처해졌는데,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었다. 당시에는 궁형을 받으면 궁형과 사형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명예와 자존심을 존중하려 했던 것 같다. 물론 50만 전의 돈을 내면 사형도 면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택하고 거액의 돈을 빌려 죽음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왕의 노여움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으니 결국 궁형을 선택하기로 하고 고민에 빠진다. 저자는 삶과 죽음, 존재의 가치, 죽음의 무게라는 깊은 고민 끝에 사마천이 얻은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본다. 치욕을 감내하고서도 살아야 했던 이유에 대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이렇게 전한다.

"만일 제가 법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마치 아홉 마리 소 중에서 털 하나가 없어진 것처럼(若九牛亡一毛) 하찮을 텐데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친구 임안의 무고 사건으로 투옥돼 사형을 앞두고 있던 중 사마천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 자신의 처지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가 사형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답장을 보낸 편지이다. 이때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史記)를 저술하던 중이었다.

구우일모는 단순히 수많은 것 중의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하찮게 하지 않으려는 사마천의 뜻이 담긴 표현이다.

교수협회가 선정한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 '견리망의'(見利忘義)는 '눈 앞에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가족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정치인·법조인·언론인·기업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이익을 쫓기에 바쁘고 의로움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정당한 이유로 얻어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논어 헌문편 13장의 '견리사의'(見利思義)와 상반되는 내용으로 채택한 사자성어다.

이는 장자가 조릉의 정원에 갔다가 얻은 깨달음에서 나온 말이다. 장자가 큰 새를 향해 활을 쏘려는데 큰 새가 꿈쩍하지 않는다. 큰 새는 제비를 노리고 있었고, 제비는 나무 그늘의 매미를 노리고 있었는데 매미는 그것도 모르고 울어대고 있었다. 모두 눈 앞의 이익에만 마음을 빼앗겨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몰랐다. 장자 자신도 정원사가 나타나 '이 정원에는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책망하자 이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 '견리망의'다.

휴머니스트 제공


최근 서점가에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자기계발 도서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경제나 재테크 지침서보다 삶에 대한 고찰과 지혜를 얻고자 자기계발과 철학 서적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성현들은 난세와 스스로의 인간적 고민 앞에 어둠 속의 등불처럼 책을 놓지 않았다. '암구명촉'(暗衢明燭) '미진보벌'(迷津寶筏) '개권유득'(開卷有得) 등 지혜를 더하는 말로 책을 찬미했다.

이중 '미진보벌'은 논어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문구로 불교 표현에서 따왔다. '나루가 어디인지 알면 뭐하나, 건널 배가 있어야 하지 않나. 나루를 몰라 헤매는데 좋은 뗏목이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느냐며 삶에 가르침을 주는 책(冊)을 이르는 말이다.

'개권유득'은 중국 진나라 시절 유명 시인 도연명의 '도잠전'에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친구와 더불어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 얻은 것이 많았다는 '소년래호서 유애한정 개권유득'(少年來好書 偶愛閑靜 開卷有得)에서 유래했다.

'고사성어 : 한마디의 인문학'을 펴낸 김원중 단국대 교수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고사성어는 당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고 평했다.

혹자는 온라인과 디지털 문화가 확산하며 책과 같은 이해가 필요한 문자를 피하고 시선의 흐름에 의식을 맡기는 영상 자극의 시대를 가리켜 문해력 저하의 시대라고 꼬집는다. 신조어가 난무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명심보감 권학(勸學) 편에 '소년이노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라 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의식을 흐름에 맡기기보다 책장을 넘기는 소근육부터 다시 키워야 하지 않을까.

임진왜란으로 쫓기던 선조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남긴 말(선조실록 27년 9월 6일 기사)처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아닌가.

■기독교 100년과 한국 교육
김인회 글|기독교사상|1984년 5월호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
이영미 지음|모아도서출판|절판

■상식 밖의 고사성어
채미현 지음 | 추수밭|264쪽

■고사성어 : 한마디의 인문학
김원중 지음 | 휴머니스|872쪽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55권
비변사에서 왜적을 이간하는 문제를 아뢰다
선조 27년 9월 6일 신사년(辛巳年) 5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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