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밥상] 뽀얀 생선살·얼큰 국물 ‘물가자미찌개’...‘대게’만큼 생각나겠네

김보경 기자 2024. 1. 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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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밥상] (45)경북 영덕 ‘물가자미찌개’
싼값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서민 생선
육수에 양념 풀고 채소와 함께 끓여
매운탕과 비슷…칼칼하고 시원한 맛
상큼한 ‘물가자미밥식해’도 별미 꼽혀
경북 영덕의 향토음식인 물가자미찌개. 부드러운 생선 살과 칼칼한 국물이 조화롭다.

경북 영덕에서 강구항과 함께 2대 항구로 꼽히는 축산항은 올해로 개항 100년을 맞았다. 축산항 일대에서 많이 잡히는 물가자미는 아는 사람만 아는 영덕 특산물이다. 외지인들은 영덕 하면 대게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이곳 사람들은 고향의 맛으로 물가자미를 꼽는다. 시장에서 싼값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만큼 영덕 사람들 밥상에 늘 오르는 단골손님이다. 그중에서도 요리법이 간단하고 자꾸 손이 가는 ‘물가자미찌개’가 대표 음식이다.

영덕에서 물가자미를 부르는 원래 이름은 ‘미주구리’다. 미주구리 어원을 찾아보면 일본어 미즈가레이(みずがれ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일본어 ‘미즈’는 물, ‘가레이’는 가자미를 뜻한다. 영덕에서는 미주구리를 순화해서 물가자미로 바꿔 부르고 있다. 물가자미는 수심 40∼700m 바다 밑바닥에서 서식하며 영덕과 포항 사이 동해에서 많이 잡힌다. 우리나라엔 가자미 30여종이 서식한다. 두 눈이 머리 한쪽에 붙어 비목어로 불리는 가자미는 보통 길이가 40∼50㎝고 몸통은 납작하다. 이 중 물가자미는 어른 손바닥보다 약간 큰 정도로 다른 가자미류보다 작고 뼈가 연해 뼈째 썰어 먹기 좋다. 게다가 비리지 않고 고소해 생선회로도 즐겨 먹는다.

물가자미가 영덕 사람들의 밥상에 오른 역사는 꽤 오래됐다. 1384년 고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밤낮없이 축산성을 쌓은 병사들이 가여워 주민들이 물가자미를 먹였더니 빨리 회복하고 기운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동의보감’에는 성질이 순하고 맛이 달며 허약한 기력을 보충하는 데 좋다고 기록돼 있다.

축산항에서 물가자미 전문점을 운영하는 정성현 ‘천리미항식당’ 대표(41)는 가자미와 관련된 특허를 26개나 낼 정도로 물가자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물가자미는 가장 서민적인 생선이었어요. 시장에서 산 물가자미로 삼시 세끼를 먹었습니다. 아침엔 구이로, 점심엔 회무침으로, 저녁엔 찌개로 끓여 소주 한잔 같이 먹으면 더할 나위 없는 생선이죠.”

물가자미찌개는 생소한 이름과 달리 매운탕과 모양이 같아 익숙하다. 찌개 냄비보다 큰 물가자미를 반토막 내 담고 생선 육수(광어·우럭 등 생선 뼈 육수)에 양념을 풀어 끓인다. 아낌없이 넣은 대파·양파·무·배추가 팔팔 끓어 투명해지면 물가자미도 어느새 뽀얗게 익는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맹물에 생선을 넣어 찌개를 끓이지만 생선 육수를 사용하면 훨씬 국물이 시원해요.”

진한 푸른색 영덕 바다를 배경으로 팔팔 끓는 찌개를 보고 있자니 숟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국물을 한입 먹자마자 채소에서 나오는 달큼한 맛이 혀에 맴돌고 꿀꺽 삼키면 칼칼한 고춧가루 매운맛이 올라온다. 본격적으로 물가자미찌개를 맛보려면 숟가락 기술이 필요하다. 숟가락을 가로로 살짝 눕혀 물가자미 가운데 뼈를 따라 살을 긁는다. 갈치처럼 하얀 살이 숟가락 위에 그대로 떠진다. 살과 국물을 퍼서 그 위에 파와 무를 올린 뒤 한입에 넣는다. 연한 물가자미 살과 개운한 채소맛이 풍미를 올린다. 물가자미찌개 좀 먹어봤다 하는 단골손님들은 크게 한입 삼켜서 입속에서 우물우물해 큰 가시만 툭 발라낸다.

물가자미로 만든 밥식해와 회무침·구이도 빼놓을 수 없는 별미다.

물가자미 살을 바르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식당 손님들이 빈 접시를 가리키며 “이것 좀 더 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손님들이 무엇을 그렇게 찾는가 보니 ‘물가자미밥식해’다. 밥식해는 흰살 생선에 밥과 양념을 버무린 고급 발효음식이다. 무와 고춧가루·설탕·물엿 등 8가지 이상 재료에 밥과 길게 썬 물가자미회를 치대서 2주 정도 숙성시킨다. 워낙 재료와 시간이 많이 드는 반찬이라 일반 가정집에서는 김장만큼 만들기 힘든 요리다. 물가자미밥식해는 농촌문화와 어촌문화가 함께 발달한 영덕지역 특징을 보여준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다에서 잡아올린 물가자미와 서쪽 논밭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를 이용해 만든 밥식해는 시원하고 상큼한 맛이 일품이다.

물가자미 정식을 주문하면 이밖에 물가자미 구이와 회무침도 함께 나와 입맛을 돋운다. 물가자미구이를 먹을 땐 지느러미를 꼭꼭 씹어 음미해야 한다. 물가자미 지느러미는 가시가 연하고 모든 콜라겐이 모여 있어 씹으면 기름이 톡 터져 고소하다. 회무침은 살짝 언 물가자미를 뼈째 썰어서 갖가지 채소를 넣고 새콤한 초고추장 양념에 버무려 만든다. 살이 넉넉한 세고시를 먹는 듯하다. 회무침을 물미역에 싸 먹으면 오독오독한 식감과 바다향이 배로 느껴진다.

“대게는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먹지만 평범한 영덕 사람들이 자주 찾는 건 물가자미예요.” 영덕 토박이라는 택시기사 박석규씨(76) 말대로 물가자미야말로 영덕 사람들의 솔푸드(soul food)라 할 수 있다. 영덕에서 새로운 맛을 찾고 있다면 물가자미찌개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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