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정치?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갈등 보도에 멈춘 것

한겨레21 2024. 1. 16. 10:5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표지이야기]드라마화한 정치, 의제 설정 시스템 붕괴, 사회적 무력감… 증오 정치의 원인 극복해야
2021년 10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야가 책상에 붙인 손팻말에 대한 의견이 충돌해 회의가 중단됐다. 공동취재사진

그가 언론 보도를 보고 증오에 눈이 멀어 이재명을 죽이려 했다고 믿는다면 미디어의 효과를 과대평가한 것일 수도 있다. 같은 뉴스를 본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맘을 먹지 않았다. 그가 봤던 뉴스가 특별히 좀더 선정적이거나 증오를 조장했을 수는 있다. 커뮤니티 사이트일 수도 있고 유튜브 채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뭔가를 읽거나 보고 살의를 품거나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미디어 효과에 관한 이론들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이론 가운데 ‘마법의 총알 이론’(Magic Bullet Theory)이 있다.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입하면 총을 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난다고 보는 이론이다. 약물 주사를 놓는 것과 같다고 ‘피하주사(Hypodermic Needle) 이론’이라고도 하고 ‘기계적 자극-반응(Medhanistic Stimulus-Response) 이론’이라고도 한다. 1939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오슨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각색한 드라마를 내보냈는데, 화성인 침공이 실제 상황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법의 총알 효과’를 입증한 사례라고 이야기됐지만 실제 방송을 들은 1600만 명 가운데 속아 넘어간 사람은 100만 명 정도였다. 심층 연구에서는 개인의 비판 능력과 종교 유무, 사회적 맥락에 따라 미디어의 몰입 정도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 뒤늦게 라디오를 켠 사람은 속는 비율이 더 높았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복잡하다. ‘마법의 총알 이론’이 일찌감치 폐기된 건 우리의 신념이 ‘총 맞은 것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남들의 생각에 따라 우리 생각을 바꾸는 일도 많다.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 이론’에서는 하나의 의견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상황에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고립과 배척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본다.

이재명 피습 사태 이후 증오의 정치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지만, 증오의 원인과 배경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게 된다. 언론이 이재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주입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재명을 싫어하게 됐다고 말하려면, 먼저 그게 어떻게 잘못됐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단순히 “증오의 정치와 대결의 정치를 끝내자”는 제안은 동어반복일 뿐만 아니라 공허하다. 원래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고 승자독식 구조를 피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지난 3~4년 동안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경험했다. 조국 사태부터 시작해서 대장동 사건과 50억 클럽 논란,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재명 검찰 수사와 체포 동의안 부결, 이태원 참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과 복귀,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임명과 사퇴, 해병대 사망 사건과 은폐 의혹, 방송 3법 등 거부권 행사, <뉴스타파> 김만배 인터뷰 논란, 김건희 여사 디올백 사건에 이르기까지 첨예하게 의견이 충돌하고 진영을 나눠 갈라섰다. 한국은 명백히 정치 과잉의 사회다. 언론도 정치 의존도가 높고 뉴스 소비도 정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정치 과몰입이 유발하는 극도의 피로가 사회 전반에 누적된 상태다. 이재명 피습 사건은 정치 과잉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우리가 빠뜨린 게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김건희 아니면 기사가 안 읽힌다

이재명이 퇴원하면서 한 말이 “상대를 죽여 없애야 하는 전쟁 같은 정치를 종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4월 총선은 윤석열과 이재명의 정치생명을 건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굳이 되짚어보자면 극단적 상황을 피할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검찰이 일찌감치 김건희 여사 수사를 진행해서 기소든 무혐의든 처리했다면 특검법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보수 언론까지 나서서 특별감찰관 도입을 요구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명박의 괴벨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동관을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전쟁을 선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장관급 인사를 청문보고서 없이 임명한 게 벌써 24번째다. 집권 초반의 정치적 동력을 이재명 구속에 올인하다시피 했고 그 반사이익을 봤던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역시 대결 정치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의석수 180석을 확보하고도 지난 4년 동안 개혁 입법은 뭐 하나 성과를 보인 게 없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밀어붙여놓고 꼼수로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병립형으로 돌아가느니 마느니 하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노란봉투법과 방송 3법도 정치로 풀었어야 했다. 문재인 정권 때는 방치해놓고 왜 정권이 바뀌니 밀어붙이냐는 질문에 해명도 필요했을 것이다. 정치의 실종에 어느 쪽 책임이 더 큰지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 도긴개긴이다.

문제는 갈등이 아니라 갈등 보도에 멈춘 것이고 증오의 정치가 아니라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언론사 데스크들은 언젠가부터 ‘김건희 아니면 기사가 안 읽힌다’고 하소연한다. 이재명 구속 여부에 온 나라의 이슈가 블랙홀처럼 빨려들었던 게 몇 달 전이다. 우리는 분노하면서 기사를 소비하고, 언론은 분노에 편승해서 기사를 쏟아냈다. 시궁창을 뒤져서 더럽다 말할 것 없다. 공론의 장은 원래 엉망진창이기 마련이고 언론은 언론의 일을 하면 된다. 증오의 정치가 극단적인 유튜브 채널 탓이라고 보는 건 단편적인 접근이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문제는 언론이 정치를 드라마처럼 중계하고 의제를 뭉개면서 우리 토론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끝까지 파고들지 않기에 문제다. 윤석열과 이재명은 총선 결과에 따라 탄핵을 당하느냐 마느냐 감옥에 가느냐 마느냐의 절체절명의 상황이니 그렇다 치고, 한국 사회가 이들과 정치적 운명 공동체가 돼야 할 이유는 없다.

“증오 정치 끝내야” 동어반복 벗어나려면

드라마를 다루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드러난 쟁점을 가볍게 다뤄도 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증오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는 동어반복을 벗어나려면 언론이 몇몇 플레이어가 주도하는 드라마에 질질 끌려가기보다는 계속 의제를 복원하고 우선순위를 일깨우면서 쟁점에 뛰어들어야 한다. 방송 3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게 드러난 문제지만, 애초에 우리가 방송 3법을 두고 제대로 토론한 적이 있나. 연금개혁에 사람들의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원래 지루한 이슈여서인가, 아니면 우리가 적당히 포기했기 때문인가.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 같다. 언론이 후진 정치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무너진 의제 설정 시스템이 정치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인가. 냉소와 환멸이 증오로 번지지 않으려면 지리멸렬한 윤석열과 이재명의 다툼을 넘어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려면 갈등과 대결을 피하기보다는 쟁점에 더 깊이 뛰어들어야 한다. 계속해서 무엇이 본질인지 묻고 간극을 좁히면서 한 발짝 나아가는 토론을 제안해야 한다.

이정환 <슬로우뉴스> 대표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