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돈의문 복원

채희창 2024. 1. 1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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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敦義門)은 조선 한양의 4대문 중 서(西)대문이다.

돈의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11년(숙종 37년) 재건됐지만,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차 궤도를 복선화하면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서울시가 2035년까지 총 4000억원을 들여 종로구 정동사거리 인근 새문안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돈의문을 복원하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어제 밝혔다.

돈의문이 제자리에 복원되면 4대문이 완성돼 '역사도시' 서울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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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敦義門)은 조선 한양의 4대문 중 서(西)대문이다. 1396년(태조 5년)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축조됐다가 1422년(세종 4년) 종로구 신문로2가 쪽으로 옮겨졌다. 유교의 기본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의(義)의 뜻을 담은 돈의문은 문밖의 경사가 유난히 가팔라서 문을 새로 냈다고 한다. 지금의 돈의문박물관마을과 강북삼성병원 사이 정동사거리 일대가 돈의문이 있던 자리다. 이때 백성들은 새로 만들어진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新門)’이라고 불렀다. ‘신문로’나 ‘새문안’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돈의문은 외교사절이 오면 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고 조선 외교사절이 중국으로 갈 때 이용하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 갈 때 이 문을 이용했다. 1624년 반란을 일으킨 평안병사 이괄이 도성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곳도, 반란이 사실상 막을 내린 곳도 여기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비롯한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도성에 들어온 곳도 이 문이다.

돈의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11년(숙종 37년) 재건됐지만,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차 궤도를 복선화하면서 철거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표지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4대문 가운데 숭례문(남), 흥인지문(동), 숙정문(북)은 보존·복원됐지만 돈의문만 복원되지 않았다. 2009년 복원이 추진됐지만 예산과 교통 체증 등의 문제가 지적돼 무산됐다. 정부는 2016년 서울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했으나 실사과정에서 완전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자진철회했다.

서울시가 2035년까지 총 4000억원을 들여 종로구 정동사거리 인근 새문안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돈의문을 복원하는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어제 밝혔다. 이번에는 새문안로를 지하 차도(왕복 8차로)를 뚫어 교통 체증 같은 걸림돌을 해결하겠다고 한다. 돈의문이 제자리에 복원되면 4대문이 완성돼 ‘역사도시’ 서울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이를 통해 한양도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를 바란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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