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5>] 삶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에는 삶이 있다

박혜진 2024. 1. 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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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연말이 되면 비평가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바빠진다. 각종 문학상 심사를 요청받기 때문이다. 나도 2023년 몇몇 문학상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문학상도 업무인지라 심사 과정이 기다려지지는 않는다. 작가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건 벅찬 일이지만 기쁨은 찰나고 고통은 길달까.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그런데 예외적으로 기다려지는 심사가 있다. 바로 한미수필문학상이다. 이 문학상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의료인이어야 할 것. 의료 현장에서 경험한 일을 소재로 한 글이어야 할 것. 출품된 글은 대체로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환자와 그들을 지켜보는 의료진에 대해 다룬다. 거기엔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병명도 있고 극한의 고통을 겪는 내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강한 마음도 있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죽음을 실감하며 벌이는 사투를 읽다 보면 고개가 숙어진다. 지금 내게 주어진 보통의 날들에 더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이내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들의 사투가 곧 나의 싸움이 될 거라는 예감이 엄습하면 안도는 금세 공포로 바뀐다. 죽음이 무서워지고 죽음을 포함하는 삶이 두려워진다.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 가는 자에게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는 삶의 의미까지 도려낸다.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삶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런 공포라면, 그토록 최선을 다했던 삶의 시간은 다 뭐란 말인가. 죽음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삶과 죽음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레프 톨스토이가 쓴 죽음에 대한 보고서이자 탐구서이며 이론서이자 혁명서다. 이반 일리치는 45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한다. 법관으로서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상승세가 주춤할 무렵 건강에도 이상 신호가 온다. 그때부터 시작된 질병의 시간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없이 악화 일로를 걷는다. 질병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가장 먼저 가져가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다. 그는 몸이라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 가족과 동료들로부터의 소외 속에 먼저 갇힌다. 그는 세상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충분히’ 불쌍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냉소적으로 규정한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가 전해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자신의 인사이동과 이해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다음 소설은 그의 재산 관리에 온 신경이 집중된 아내를 보여 준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타인의 부고 앞에서 사람들은 기쁨을 느낀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이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조차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같이 죽어 갈 수 없다는 사실, 죽음은 철저히 고독하고 지독히 고립된 과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작가는 그의 삶 전반을 보여 준다. 그의 삶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혹은 변질되어 왔는지를 그린다. 인사 문제, 가족과 불화, 건강 등 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삶이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상상해 본다. 그가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이 그의 삶에 대한 일종의 대가, 혹은 벌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기에 그의 삶은 너무나도 평범했는데? 그의 죽음은 그의 삶에 대한 죗값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잊은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삶에 항상 죽음이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법률학교를 졸업할 때 제복을 맞춘 다음 시곗줄에 ‘레스피케 피넴(respice finem)’이라고 적힌 메달을 단다. 그 말은 ‘끝을 생각하라’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때의 마음과 달리 그는 사는 내내 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질병이 그를 고통스러운 끝에 데려다 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이른다.

“모든 것이 한결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죽음 같다.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산을 오르는 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반 일리치가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다. 죽기 직전에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죽음은 없다고도 생각한다. 삶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고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순간이다. 요컨대 삶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에는 삶이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역설적 주장은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당부한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 고통은 그 둘을 구분하고 하나가 없는 듯이 살아가는 무심함에서 비롯된다. 삶에 죽음이 없고 죽음에 삶이 없을 때, 우리는 이반 일리치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레스피케 피넴. 끝을 생각하라.

Plus Point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회에 비판을 가하며 ‘교의 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 ‘부활’을 완성했다. 사유재산 및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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