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스타 건축가들 서울로 몰려온다…박수보다 걱정 앞서는 이유

노형석 기자 2024. 1. 1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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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페로가 설계에 관여한 서울 압구정 아파트지구 재건축 2구역 투시도. 디에이(DA) 건축 제공

노먼 포스터는 내년이면 90살이 되는 영국의 건축 거장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1999년 수상한 포스터는 컴퓨터를 이용한 고차원 산술적 설계와 생태적 형상의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홍콩섬 마천루들 가운데 돋보이는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점 빌딩을 1980년대 설계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브이(V)자형 트러스 얼개가 중첩되는 독창적인 외관에다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는 풍수지리상의 돈줄기를 잡았다는 입지로도 화제를 모았다. 2000년대 이후 영국 런던 뱅크 지구에 자리잡은 알 모양의 거킨 빌딩과 스티브 잡스의 유작으로 불리는 애플 사옥을 만든 이도 그다.

이 대가의 이름이 지난해부터 한국 건축판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건축가 김종성씨의 1980년대 작품으로 서울과 남산 사이 언덕배기에 지어진 밀레니엄힐튼호텔 재건축 프로젝트 때문이다. 이 호텔이 2021년 한 자산운용사에 매각된 뒤 건물터에 초대형 오피스 빌딩을 짓기 위한 철거계획이 지난해 확정되면서 포스터가 서울 남산 경관을 좌우할 빌딩 설계자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건축계 한켠에서는 사실상 그가 내정됐다는 설까지 흘러 나온다.

힐튼호텔 재개발 정비계획 시안은 지난해 11월 서울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해 건축위원회 심의를 앞둔 상황이다. 기존 호텔보다 층수를 올리되 약간 옆쪽으로 옮겨 남산 조망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덴마크 건축사무소 헤닝 라르센의 설계로 서울역 역세권에 최고 40층의 복합 업무단지를 건립하는 서울시의 대형 재건축사업 예정구역이 바로 힐튼호텔 권역과 이웃해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 두 건축 프로젝트를 유기적으로 접목시키면서 서울 강북 도심경관을 재편할 해결사로 포스터가 등장할지, 그가 등장한다면 어떤 역할을 할지가 중요한 관심사다.

그는 지난해 9월 방한해 서울대에서 학생들과 대화하는 행사를 열었고, 11월엔 서울시가 기획한 서초구 서리풀 수장고형 미술관 설계 국제공모에 응해 여러 대가들과 함께 응모작 설명회(프레젠테이션)에도 참여했다. 더욱이 서울시 산하 서울시립미술관이 올해의 전시 의제를 ‘건축’으로 잡고 오는 4~7월 서소문 본관에서 국내 최초로 포스터 기획초대전을 여는 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엔 예사롭지 않다.

장미셸 빌모트(작은 사진)가 설계를 맡은 서울 여의도 공작아파트 재건축 단지 써밋 더 블랙 에디션 조감도. 대우건설 제공

포스터뿐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은 ‘헤어초크 & 드뫼롱’, 장미셸 빌모트, 도미니크 페로, 리처드 마이어 등 세계적인 국외 건축 거장들이 디자인 경쟁을 펼치는 유력한 무대로 떠올랐다. 코로나 사태가 지난 뒤인 지난해를 기점으로 이들이 국내 일감을 찾아 대거 몰려들고 있다.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을 만든 일본 출신 안도 타다오나 서울 동대문 디디피의 유선형 건축물 단지를 만든 이라크 출신 여성작가 자하 하디드처럼 2000년대 이후 국내 공공건축프로젝트에서 외국인 건축가들은 큰 몫을 차지해왔다.

다만 지금 벌어지는 국외 건축가들의 한국 붐은 과거와 결이 사뭇 다르다. 국내 건축계를 의식해 공공건축물 설계자를 선정할 때는 국내외 작가들의 자유공모를 원칙으로 했던 2010년 이전과 달리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들은 최근 아예 내놓고 국외거장들을 지명해 공모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지닌 권위와 명성을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이다. 이에 더해 유한층 소비고객들의 선호 욕구를 업고 국내 부동산업체와 건설사들이 서울 강남, 부산 해운대 등의 초고층 초고급 주거단지 등 민간 부동산 사업에 스타건축가들을 경쟁적으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트렌드도 나타나고 있다.

공공 건축물의 경우 거장들의 공모 경쟁을 앞세운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도시론을 앞세운 서울시가 이런 흐름을 이끌고 있다. 특히 서울 서초구 옛 정보사 터에 건립을 추진 중인 서리풀 수장고형 미술관 국제설계경기 공모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국외 건축가들을 대거 지명해 이들의 응모작을 받고 공개 프레젠테이션까지 벌여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12월1일 동대문 디디피에서 열린 설명회에는 포스터와 엠브이아르디브이의 비니 마스, 자크 헤어초크 등 쟁쟁한 거장들이 조민석, 유현준, 임재용 등 국내 건축가들과 신경전까지 펼치며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최종 설계자는 ‘헤어초크 앤드 드뫼롱’으로 확정됐다. 지난해 5월 서울시가 공모전을 연 노들섬 복합문화공간 국제 디자인 공모에도 토마스 헤드윅, 위르겐 마이어 등 세계적인 건축디자이너들과 국내 스타 건축가 김찬중씨 등 7명이 경합중이다. 올해 안에 설계자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건축 비용은 1조원대를 넘어갈 것이란 관측이 많다.

시쪽은 지난 연말엔 미국 대형건축설계회사에 설계를 맡긴 성수동 일대 고층 업무주거단지 계획도 발표했다. 성수동 옛 삼표레미콘 공장 부지에 4조원을 들여 조성할 예정인 최고 56층짜리 고층건물군 건립안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163층짜리 건축물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와 여의도 63빌딩을 설계한 미국 건축 회사 솜(SOM)이 낙점됐다. 국외 거장들로 진용을 꾸려 추진했다가 2013년 좌초했던 용산 국제업무도시 개발 계획도 올해를 기점으로 재추진을 본격화할 방침이어서 한국에서 국외건축가들의 프로젝트 규모는 당분간 거침없는 확장일로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초고층 주거단지 더팰리스73 건축물 완성 예상도. 시행사 더 랜드 제공

거장 모시기 경쟁엔 부동산개발업자들도 뛰어들었다. 서울 강남 노른자위 땅으로 꼽히는 반포동 옛 팔래스호텔 자리에 지어질 초고층 주거단지 ‘더팰리스73’의 설계자로 미국 엘에이 게티뮤지엄을 만든 백색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 리처드 마이어가 초빙됐다. 서울 압구정동 2지구 재건축에 이화여대 지하 캠퍼스 건축으로 알려진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자로 들어갔고, 여의도 공작아파트 재건축에는 프랑스 건축가 장미셸 빌모트가 참여했다. 빌모트는 부산 해운대에 건립을 추진중인 최고급 주거단지 설계도 맡았는데, 지난달 12일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가로 손꼽히는 제프쿤스와 함께 부산 현지 설명회에 참석해 협업 구상 등을 밝혀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건축계에선 외국 거장들이 한국의 건축시장을 더욱 선호할 수밖에 없는 안성맞춤의 여건이 형성됐다고 분석한다. 고금리 불황에다 전쟁과 테러, 난민 문제 등의 영향으로 건축경기가 내려앉은 서구에 비해 한국은 지자체의 대형 공공건축 수요가 계속 커지고, 거처 등의 공간적 차별화를 원하는 재력가들의 과시적 욕망도 건재하거나 점증하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장들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로 건축계에 새로운 자극을 줄 것이란 긍정적 시각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명성에만 기대어 ‘묻지마’ 식으로 벌이는 맹목적인 초빙과 지명공모는 재고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송하엽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는 “코로나 이후로 국내 건축계는 시공단가가 올라가면서 가성비 있는 저가의 설계 작품을 해달라는 압박이 더욱 커지는 데 비해 국외 거장들은 알아서 거액을 주고 지자체의 경우 건축 예산을 더욱 증액하는 호기로까지 이용하는 악순환이 심화하는 추세”라며 “건축계의 작업 풍토가 이렇게 양극화 양상로 치달으면 한국 건축의 문화적 정체성은 흐려지고 중국 상하이 푸동이나 아부다비 같은 중동의 신흥도시들처럼 디자인만 특이한 건물들의 군집소처럼 변할 공산이 크다”고 우려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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