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어디까지 아세요 머체왓숲길] 거친 잡곡밥처럼 꼭꼭 씹듯 걷는 길

이승태 여행작가, 오름학교 교장 2024. 1. 1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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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남원읍 한남리의 향긋한 삼나무숲 걷기 7km
머체골 근처의 삼나무숲을 지나는 탐방객. 슬프고도 아름다운 숲이다.

숲을 둘러보는 것은 꽤 괜찮은 제주 여행법이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대부분이 숲을 끼고 펼쳐지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과 백록의 전설이 깃든 한라산국립공원이 그렇고, '숨 쉬는 땅' 곶자왈도 제주의 원시 숲으로 채워진 신비의 공간이다.

많은 이가 찾는 사려니숲길과 그에 못지않게 멋들어진 숯르편백숲길, 한라산의 허리께를 따라 걷는 한라산둘레길, 봄·가을 후회 없는 선택인 갑마장길도 놓칠 수 없다. 서귀포 치유의숲, 절물자연휴양림 장생의 숲길, 삼다수숲길, 동백동산 등 저마다 빼어난 숲길은 걷는 내내 제주가 지닌 아름다움의 넓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한껏 보여 준다. 서귀포시 남원읍의 '한남리 머체왓숲길'이 딱 그렇다.

한남리 머체왓은 날것 그대로의 제주 숲이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물론 온갖 활엽수와 사철 푸른 나무가 뒤섞여 울울창창하다. 그 사이로 깊고 사나운 모양으로 흐르는 서중천은 이 숲의 야성미에 방점을 찍는다.

들머리에서 본 한라산. 가운데 목초지를 휘감으며 머체왓숲길이 지난다.

정신 사납지 않아 너무 좋은 곳

제주도 방언인 '머체'는 돌이 무덕진 땅을 가리킨다. '머체왓'은 머체로 채워진 밭(왓)이 많아 붙은 이름으로, 옛날 이 부근에 '머체골馬體洞'이라는 작은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대여섯 가구가 목축하며 오순도순 살던 머체골 주민은 4·3사건의 격랑에 휘말리며 학살당하고 마을은 터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머체왓숲길은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던 머체골 사람들의 한 맺힌 삶의 흔적을 품고 이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풍광은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길은 정겹고 걷기 좋다. 머체왓에는 숲과 초지대가 조화로운 머체왓숲길을 중심으로 서중천을 따라 오르내리는 머체왓소롱콧길, 서중천 탐방로까지 세 코스가 있다. 사람들은 이 중 7km의 머체왓숲길과 6km의 소롱콧길을 즐겨 찾는다. '소롱콧'은 일대의 지형이 작은 용을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서성로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가 있다. 센터 건물엔 식당도 있으며, 뒤쪽에 주차장도 갖췄다. 주차장 너머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널찍하게 펼쳐진 초지대가 숲의 들·날머리 역할을 한다.

머체왓숲길에서는 삼나무나 편백나무 조림지도 만난다. 산림욕으로 최고의 구간이다.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 바로 앞이 서성로다.

입구에 서 있는 시비詩碑. '…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 봄꿩으로 우는 저녁'

사라진 마을 머체골의 슬픈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시인 오승철의 '터무니 있다'의 시어가 가슴에 떨어진다.

머체왓숲길은 제주의 얼굴인 한라산을 조망하며 시작된다. 길은 이 거친 숲에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려는 듯, 인공적인 시설이 거의 없이 좁게 이어진다. 느쟁이왓, 방애혹, 제밤낭 같은 제주어 지명이 곳곳에 나타나며 길에 신비로움을 더한다. 몇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제주 숲의 온갖 좋은 기운으로 샤워를 하는 듯 상쾌함이 밀려온다.

머체왓숲길은 포장된 코스를 따라 걷는 사려니숲과는 다른, 제주 자연의 거친 매력으로 넘친다. 포장되거나 매트가 깔리지 않은 바닥은 여기저기서 돌이 툭툭 튀어나와 울퉁불퉁하고, 직선 구간이 거의 없이 구불댄다. 그러나 길은 대체로 완만하며, 한겨울이라도 사철 푸른 나뭇잎이 가득해 눈이 즐겁다. 덕분에 걸음이 가볍고, 걷는 기분은 최고다.

목장의 드넓은 초지대와 상록수림지대, 삼나무와 편백나무 조림지대, 덩굴에 뒤덮인 수풀지대도 나타나며 다양하고 흥미로운 풍광을 보여 준다. 그중 눈길을 끄는 곳이 '제밤낭'이다. 노출된 뿌리가 커다란 바위를 문어처럼 감싸 안은 채 높이 솟은 제밤낭은 이 오랜 숲에 대한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운치 가득한 머체왓전망대. 한남과 의귀리 너머 남원 앞바다가 훤하다.
서중천과 나란한 숲길. 짙은 활엽수가 뒤덮은 쪽이 서중천이다.

오래 머물고픈 머체왓전망대

제밤낭은 '구실잣밤나무'의 제주어로, 이 일대의 당산나무 역할을 해온 듯하다. 앞에 돌무더기가 꽤 쌓였다 . 이 숲에 터를 잡고 살던 이들이 오가며 소원을 빌었을 터. 숲길 안내도엔 '제밤낭기원쉼터'라고 소개한다. 몇 그루인지 구분이 힘든 구실잣밤나무가 서로 뒤엉키며 크고 작은 둥치를 하늘로 쭉쭉 뻗어 올린 모양새가 범상치 않다.

중간쯤에서 만나는 머체왓전망대는 이 길을 더욱 인상 깊게 만든다. 햇볕이 들지 않는 숲길을 한참 걷다가 갑자기 눈앞이 훤히 열리며 나타나는 쉼터. 남원 앞바다까지 보인다.

목장 초지대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전망대는 멋지게 가지를 펼친 팽나무 한 그루와 그 주변으로 나무데크가 널찍하게 깔려 있어서 조망을 즐기며 쉬기에 더할 나위 없다. 통나무 벤치도 두 개나 있어서 휴식을 겸해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기도 좋은 곳.

머체왓전망대에서의 하룻밤 한뎃잠. 제주를 제대로 느낀 멋진 밤이었다.
제밤낭기원쉼터. 숲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제밤낭(구실잣밤나무)이 신령한 기운을 내뿜는 곳이다.

데크 바닥에 벌러덩 누워 파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이 일대의 넓은 초지대는 가을이면 제주 메밀이 가득 피어나 환상적으로 바뀐다. 밭 가운데 둥근 산담을 두른 무덤이 이집트 파라오의 피라미드보다 더 멋져 보인다.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풍광이다.

600년 제주 목축문화의 유물인 상잣성을 넘나들다가 들어선 숲속, 4·3사건으로 사라진 마을, 머체골의 집터가 시선을 끈다. 문씨와 김씨, 현씨 등이 작은 동네를 이루고 살았다는 이곳엔 화장실과 텃밭 등을 구분하던 담장만 남아 옛 모습을 가늠케 한다. 머체왓숲길이 아름답기만을 바라지만 아픔의 나이테도 고스란히 새겨진 우리네 인생을 닮은 것 같다.

머체골 집터를 지난 숲길은 곧 서중천을 만나 아래로 방향을 꺾은 후 출발했던 방문객지원센터로 향한다. 한 바퀴 도는 데 3시간 반쯤이면 충분하다.

위미동백군락
머체왓숲길에 핀 동백꽃.

교통

머체왓숲길 앞을 지나는 1119번 지방도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 064-805-3113

주변 볼거리

위미 동백나무군락 동백나무가 이리도 높게 자라는 나무였던가 싶어서 깜짝 놀라게 되는 숲이다. 구한말, 열일곱 되던 해에 이 마을로 시집 온 현병춘 할머니가 해초 캐기와 품팔이 등을 하며 어렵게 모은 돈 35냥으로 '버둑'이라는 이곳 황무지를 사들인 후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서 뿌린 것이 지금의 거목 동백 숲을 이뤘다. 10m는 족히 넘을 만큼 높게 자란 동백 거목이 커다란 원형의 숲을 이뤄 둘러보는 재미가 좋다. 남원읍 위미리 904-3번지 일대다.

테라로사 서귀포점 쇠소깍에서 가까운 귤밭 한가운데에 들어선 카페로, 공간 자체로 커피문화를 보여주려는 테라로사의 건축철학이 고스란히 적용된 건물이 특별한 공간을 펼쳐놓았다. 제주 귤밭의 사계를 감상하면서 마시는 최고 수준의 커피 한 잔이 제주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곳이다.

서귀포시 칠십리로658번길 27-16

테라로사 서귀포

맛집

머체왓숲길 주변은 동네는 물론, 민가도 없다.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의

'머체왓 식당(064-805-3112)'이 거의 유일하다. 머체왓비빔밥(1만 원)과 흑돼지불백(1만2,000원), 흑돼지김치찌개(1만 원) 등을 내놓는다.

머체왓 식당의 머체왓비빔밥.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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