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트] 수십억 부자된 반란군‥하나회 정말 사라졌나?

구민지 2024. 1. 14.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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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0의 심박수 챌린지

[서울의 봄 예고]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1979년 그날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9시간을 담았습니다.

44년이 흐른 2023년 12월 11일.

감독과 배우들이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전두광'을 연기한 황정민 배우.

마이크를 넘겨받자마자 사과부터 합니다.

[황정민/배우 ('전두광' 역)] "죄송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반란군 역 배우들의 사과 릴레이.

[박해준/배우 ('노태건' 역)] "죄송하고요. 끝까지 말렸어야 되는데."

[박 훈/배우 ('문일평' 역)] "도청해서 죄송합니다."

신군부의 학살이 있었던 광주에서, 황정민 배우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황정민/배우 ('전두광' 역)] "되게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작품에 임했었어요, 저희도 배우들이‥감사합니다."

영화는 개봉 33일 만에 누적 관객 1,000만을 돌파했습니다.

지금 1,300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흥행은 12·12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가 이끌고 있습니다.

예매자의 절반이 20대와 30대입니다.

[김남규] "역사에 큰 관심은 없었는데 그냥 전체적으로 몰입도도 높고 연기도 다 잘하시고 그러다 보니까 화도 나고요."

[강승희] "이태신 장군님이 정말 혼자서 힘들게 싸우셨구나 했던 거를 다시 보니까 더 그게 마음에 더 와닿더라고요."

여러 번 보는 'N차 관람'도 많습니다.

[임설아] <오늘 몇 번째 영화 보시는 거예요?> "이제 4차 보고 5차 보러 가는 중이에요. 근현대사를 알아야 저희의 앞으로 미래도 알 수 있잖아요. 너무 슬픈 얘기고 답답한 얘기지만 또 그 메시지가 너무 좋아서 매주 보고 있습니다."

영화의 흥행은 실제 역사를 공부하는, 에듀테인먼트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승민] "새벽까지 계속 실제 역사를 찾아보면서 정말 이런 일을 또 젊은 세대가 몰라서는 안 되겠구나. 그냥 역사책에서도 정말 한 줄로 나와 있을 정도고 그래서 그냥 몰랐다는 것 자체로도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던 것도 있었고요."

정서희 씨는 등장인물들의 계급을 정리해 SNS에 올렸는데, 조회수 9만, 재게시 1천 건을 기록했습니다.

[정서희] "실제 친구들한테도 보여줬는데 '직원이냐' 이런 반응이 있었어요. 근데 그냥 공부하려고 만든 거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스마트워치로 심박수를 측정해 올리는 '심박수 챌린지'도 유행합니다.

서울의 봄을 8번 봤는데도 여전히 화가 난다는 고등학생.

"181까지 올라갔어요."

[전은율] "그냥 저 사람들만 없었어도 우리가 민주화를 빨리 이루고 민주화 운동 때 희생되는 학생분들이 많이 없었을 텐데 너무 화났던 것 같아요."

[박민준] "분노, 분노가 제일 크지 않았나."

[선승희] "황정민 씨 웃을 때 진짜 악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왜 2030은 이 영화에 분노하고 열광할까요?

[김헌식/문화평론가] "지금 20·30세대들은 공정 세대라고 주로 불리거든요. 그러니까 공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이것에 대한 어떤 현실 변화를 담론화하는 데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는 세대거든요."

■ 수십억 부자된 반란군

◀ 이휘준 ▶

안녕하십니까, 이휘준입니다.

영화 <서울의 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이제 사회 현상이 된 것 같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열광하는 걸까요?

스트레이트는 1979년 군사반란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의 오늘을 돌이켜 보겠습니다.

구민지 기자 나와 있습니다.

저도 영화 보면서 정말 화가 많이 났습니다.

심박수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 구민지 ▶

특이한 건 2-30대 젊은 세대들이 흥행을 이끌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역사는 어땠는지, 실존 인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역사를 공부하는 20~30대가 정말 많습니다.

◀ 이휘준 ▶

44년 전 사건이지만, 등장인물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겠죠?

◀ 구민지 ▶

전두환, 노태우 씨는 이미 사망했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찾아가 봤습니다.

◀ VCR ▶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두환 사망 2주기 추모식.

한 남성이 연단에 섭니다.

전 씨를 참 군인이자 구국의 영웅이라 추켜세웁니다.

"전두환 대통령님은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내신 구국의 영웅이시며."

가장 큰 업적이, 민주주의 실현이라고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의 으뜸가는 공적은 무엇보다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실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남성은 누구일까요?

박희도 씨입니다.

영화 속 도희철의 실존 모델입니다.

군사 반란 당시 제1공수여단장.

공수부대를 이끌고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습니다.

반란 이후 육군참모총장까지 초고속 진급했습니다.

박희도 씨는 지금 한 보수단체 대표입니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12·12는 쿠데타도, 군사 반란도 아니라고 써놨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박희도/전 육군참모총장 (12·12 당시 1공수여단장), 2013년 8월 26일] "80년 5월 광주에서 학생 시위로 시작하여 무장 폭동으로 확대된 것을 진압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를 찾아가 봤습니다.

시가 30억 원 하는 서울 서초동의 90평형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박희도/전 육군참모총장 (12·12 당시 1공수여단장) <방금 전화드렸던 구민지 기자입니다.> "나 할 말 없어요."

대신 박 씨의 부인이 나왔습니다.

[박희도 씨 아내] <5·18 관련해서 좀 왜곡에 앞장서고.> "5·18은 우리하고 상관도 없고." <12·12도 군사 반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군사 반란 생각 안 하지. 우리는 그 사람한테 만약 그때 출동하지 않고 있었으면 우리는 역적이 되는 거야. 안 그래요?"

군사반란 직후 성공을 자축하며 찍은 기념사진.

모두 34명.

10년 넘게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었습니다.

대통령 2명, 국회의원 6명, 안기부장, 감사원장, 그리고 장관도 3명입니다.

14명이 군 최고 계급인 대장에 올랐습니다.

반란군들은 대한민국 정부, 국회, 군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경기도 과천 청계산 자락에 자리 잡은 단독주택 부지.

집 3채와 땅 1만 제곱미터가 한 가족 소유입니다.

주인은 정호용 씨 일가.

[정호용 자택 관리인] <장군님 지금 어디 가셨어요?> "모르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정 씨도 쿠데타 성공 기념사진 맨 앞줄에 있습니다.

정 씨는 반란 당시에는 대구의 50사단장이라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반란 주축이었던 군 사조직 하나회 핵심 멤버였습니다.

반란 직후, 정병주 장군의 뒤를 이어 특전사령관이 됐고, 5·18 광주 학살에 관여했습니다.

이후 국방과 내무장관,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내란과 반란모의로 징역 7년형을 받았지만, 곧바로 사면됐습니다.

정 씨는 부동산 부자입니다.

스트레이트가 확인한 정 씨 일가 소유 건물과 땅은 서울 강남, 용산, 경기, 전남, 충남, 강원 등 전국에 32곳입니다.

공시가격만 170억 원이 넘습니다.

2020년에는 서울 강남의 건물을 415억 원에 팔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요?

1984년 육군참모총장이던 정 씨의 아내는 10대 두 딸과 함께 경기도 양주의 군사시설 보호구역 땅 43만제곱미터를 사들였습니다.

이후 군사보호구역이 해제되면서 땅값이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정 씨 등 5공화국 실세들이 몰려 살던 과천 '장군마을'도, 과천 정부청사와 택지 개발로 땅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진압군 통화를 도청하던 전두광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실존 모델은 허화평 씨입니다.

허 씨는 전두환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고, 국회의원도 두 번 지냈습니다.

1997년 징역 8년형을 받았지만, 곧바로 사면됐습니다.

그 뒤에도 왜곡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허화평/12·12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2005년 6월)] "쿠데타가 아니죠." <그럼 그것은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그거는 정당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일어난 일이에요."

허 씨도 부동산 부자입니다.

청와대 근처에 살면서 배우자 명의로 서울 강남에 공시가 130억 원짜리 건물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공익법인 미래한국재단 대표를 17년째 맡고 있습니다.

재단 자산은 357억 원.

서울 종로구와 송파, 경기도 일대에 땅이 있고, 임대 수익이 한 해 10억 원 넘습니다.

재단 설립 자금은 전두환 정권이 대기업들에게 거둔 돈입니다.

재단에 대해 질문했지만,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하승수/공인회계사·변호사] "정권의 비호 아래서 어떻게 보면 기업들 돈을 받아서 사실상 그렇게 재원이 만들어진 재단인데 그 재단을 그냥 개인이 계속 소장도 하고 이사장도 하고 계속하고 있다는 건 그건 사실 어떻게 보면 공적인 성격으로 출발한 재단이 사유화됐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영화에서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러 간 4공수여단장.

최세창 당시 3공수여단장이 실제 모델입니다.

3공수여단은 5·18 때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한 부대입니다.

발포 명령은 누가 내린 걸까요?

[최세창/12·12 당시 3공수여단장 (전 국방부 장관)] <장군님 안녕하세요. 저 그때 전화드렸던 MBC 구민지 기자인데요.> "난 거기 얘기할 게 없어, 난." <12·12, 5·18 관련해서 발포 명령 내리신 거잖아요.> "아니, 아니야." <그럼 누가 내리신 거예요?> "누가 내렸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말씀해 주시면. 아무도 말씀 안 해주시는데.> "아니, 아니야."

영화에서 반란군 지휘부가 모인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당시 30경비단장 장세동 씨도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5·18 일주일 전에는 특전사 작전 참모로 광주에 급파됐습니다.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 안기부장을 지냈습니다.

전두환의 심복이었습니다.

[☎장세동/전 국가안전기획부장] <군사 반란에는 왜 근데 가담하신 거예요?> "그렇게 이해를 하세요. 더 잘 아시잖아요." <5·18 사과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장군님.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

장 씨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 "역사는 모든 게 때가 되면 자연스레 밝혀지는 거"라며 "본인은 그 답을 위해 또 기다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재의/5·18 기념재단 연구위원] "진상 규명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죠. 그리고 하더라도 '나 죽고 난 뒤에 해라' 지금 그런 이야기죠. '나 있을 때는 나 좀 괴롭히지 마세요' 지금 그런 이야기죠. 절대 될 수가 없는 내용이죠. 왜? 피해받은 사람들은 평생 대대손손으로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을 겪고 가정들이 파괴돼 버리고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죠."

■ 사죄 없었다

◀ 이휘준 ▶

당시 반란 가담자들이 지금은 수십억대 부자가 돼 있다는 게 참 기가 막힙니다.

저런 재산들은 환수할 수도 없는 겁니까?

◀ 구민지 ▶

1997년에 반란과 내란으로 처벌받긴 했지만, 곧바로 사면됐습니다.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 이휘준 ▶

전두환 씨의 가장 큰 공적이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말도 정말 황당합니다.

전두환 씨는 생전에 사죄나 반성도 한 번 없었잖아요?

◀ 구민지 ▶

군사반란 직후 벌어진 5·18민주화운동에서,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두환 씨는 2년 전 사망했습니다.

국가가 받아내지 못한 추징금은 1천억 원 가까이 됩니다.

◀ VCR ▶

경기도 파주 장산 전망대.

유해 안장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습니다.

전두환 씨는 "북녘땅이 바라다보이는 전방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민과 시민단체들이 반대했고, 결국 땅 주인은 땅을 아예 팔지 않기로 했습니다.

[함덕형/인근 주민] "모든 국민이 지금 다 꺼려하는 사람을, 꺼려하는 그 유해가 저희 동네에 온다는 게 좋지 않죠."

[서울의 봄 예고] "인간이라는 동물은 안 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기를 바란다니까."

군사 반란에 성공하고, 저항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일당.

[전두환 (국회 5공비리특위 청문회, 1989년 12월 31일)] "12·12 사태는 시해 사건의 수사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들을 처음 고소한 사람은, 정우성 씨가 연기했던 이태신 장군의 실존 인물,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입니다.

1993년 장 씨는 전두환, 노태우 등 34명을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죄가 인정되지만, 처벌은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5·18단체도 이들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장태완/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1994년 10월 29일)] "고소 결과가 이렇게 나올 때 다시 반란이라는 것이 우리가 안 일어난다고 볼 수 없거든요."

그러다 1995년 국회에서 4천억 원대 노태우 비자금 폭로가 터져 나왔습니다.

여론이 악화되자 특별법이 추진됐고, 검찰은 재수사로 전두환 씨를 전격 체포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 씨에게 무기징역, 노태우 씨에게 징역 17년형을 확정했습니다.

전 씨는 반란수괴, 내란수괴, 상관살해, 초병살해, 내란목적살인, 뇌물 등 9가지 죄가 인정됐습니다.

모두 14명이 처벌받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8개월 뒤, 김영삼 정부는 국민대통합을 한다며 이들을 모두 사면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씨는 수감 2년 만에 풀려났지만, 반성과 사과는 없었습니다.

[전두환 (특별사면 석방, 1997년 12월 22일)] "교도소 생활이라는 게 여러분들은 교도소 가지 마시오, 그것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SBS '뉴스추적', 2003년 2월)]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서울의 봄 예고 ] "열차가 앞만 보고 달리는데 여기서 뛰어내릴 사람 있습니까?"

노태우 씨는 어땠을까요?

퇴임 후인 1995년,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5·18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태우 (1995년 10월)] "문화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그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 저거는 아무것도 아니야."

노 씨가 죽고 난 뒤, "용서를 바란다"는 그의 유언이 아들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노재헌/노태우 씨 아들 (2021년 10월 27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또 역사의 나쁜 면은 본인이 다 짊어지고 가시겠다."

노재헌 씨는 "현대사의 아픔에 공감하며 착잡한 마음으로 서울의 봄을 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2·12와 그 후의 일들은 충심으로 시작됐지만 뜻하지 않게 흘러가 현대사에 그늘을 남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12·12 사태에 대해서 또는 5·18에 대해서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국민들에게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하는 것을 하지 않고 다 사망했잖아요. 도대체 역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참군인들의 비극

◀ 이휘준 ▶

반란군에 맞섰던 군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 구민지 ▶

12월 12일 그날 밤, 모두 세 명의 군인이 죽었습니다.

반란군에 맞선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 그리고 또 한 명, 전두환 일당의 반란에 동원된 박윤관 상병입니다. 이들의 나이가 각각 35살, 23살, 23살이었습니다.

◀ 이휘준 ▶

반란군이든 진압군이든 어느 쪽에 섰건 간에 모두가 신군부 세력의 피해자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명예 회복이나 처우는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 구민지 ▶

더딥니다.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병장의 경우 재작년에서야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고 전사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살아남은 군인들도 쿠데타 이후 더 비참한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 VCR ▶

[서울의 봄 예고] "오늘 밤 승부처는 누가 먼저 서울로 전투병력을 진입시키는가에 달려있다."

반란군을 어떻게든 끝까지 막으려 했던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

결국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가 45일 동안 조사받습니다.

실제 모델인 장태완 당시 사령관이 실제 겪은 일입니다.

충격을 받은 장태완 씨의 부친은 1980년 세상을 떠났고, 서울대생이었던 외아들도 1982년 겨울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도서관에 간다고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발견된 겁니다.

[장태완/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1995년 11월 13일)] "제 어미한테 그 참혹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제가 입김으로서 녹이면서 침으로 얼굴을 혀로 씻으면서 하다가 그놈 눈알에서 참 이만한, 사탕만 한 얼음덩어리가 제 입으로 들어오더만요."

[서울의 봄 예고] "너희가 지금 서울로 진입하면 그 즉시 전쟁이야."

반란군을 막으려다 믿었던 부하들에게 총상을 입고 체포된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

정 사령관도 보안사로 끌려갔고, 강제 전역을 당했습니다.

1987년 김진기 전 헌병감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12·12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아직 전두환 정권 때였습니다.

[정병주/12·12 당시 특전사령관 (1987년 11월 24일)] "모든 국민들이 이걸 올바르게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충정이고 이걸로 인해서 군도 좀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보자는 충정입니다."

이듬해 정 전 사령관은 갑자기 실종됐고, 다섯 달 뒤 군부대가 있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그가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수사당국은 자살로 결론냈습니다.

특전사령관을 지키려고 총격전을 벌이다 숨진 김오랑 중령.

정해인 씨가 연기했습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김충립 씨.

[김충립/12·12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 "안쪽에다 사령관하고 김오랑이 들어있는 데 대놓고 수백 발 쏴버리면 그건 사살하는 행위잖아. 직속상관 살해죄야."

반란군은 죽음도 왜곡하려 했습니다.

[김충립/12·12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 "(당시 허삼수 처장이) '정호용 사령관이 오는데 사령관한테 사실대로 보고하지 말고 김오랑 소령이 먼저 총을 쐈기 때문에 사살했다고 보고를 해'. 그래 그러면 은폐하고 김오랑 소령은 사살한 걸로 끝나고 이제 모든 걸 없는 걸로 만드는구나."

시각 장애가 있던 김 중령 부인은 충격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노태우 정권이던 1991년, 전두환 노태우 일당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다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실족사라고 했습니다.

유족들은 믿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김영진/김오랑 중령 조카]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하면 어디 금세 감금시켜서 없애버리고 하니까."

2013년, 국회는 고 김오랑 중령의 추모비를 건립하자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국방부가 거부했습니다.

결국, 흉상은 지인들이 육사가 아닌 고향에 세웠습니다.

[김지관/김오랑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정말 안타까웠던 부분은 정권이 바뀌어도 안 되는 거예요. 아마 12·12를 통해서 기득권을 누린 그 세력의 힘이 아직 우리나라에 많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육군본부 벙커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정선엽 병장.

제대를 석 달 남기고 있었습니다.

군은 총기 사고로 순직했다고 조작했습니다.

[정영임/정선엽 병장 작은누나] "여기로 들어갔어요 총이. 그래갖고 여기로 나왔어. 그랬는데 분명히 총 맞고 거기서 쓰러졌는데 죽었는데 왜 순직이라고 해놨지?"

정 병장 어머니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이유도 모른 채 200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정자/정선엽 병장 큰누나] "눈만 감으면 아들, 아들만 부르고 죽은 아들만 부르고 '선엽아' 아들만 부르고 화병으로 돌아가셨어."

진실은 43년이 지난 2022년이 돼서야 밝혀졌습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는 정선엽 병장이 무장해제를 거부하다 사살됐다고 밝혔습니다.

군은 그제서야 순직을 전사로 바꿨습니다.

[서재일/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총괄과장]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예우, 이미 너무 늦어서 유족들이 다 돌아가셨는데 국가가 어떻게 예우를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됐잖아요."

유족들은 진실을 은폐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미 유족 연금을 줬으니, 은폐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추가로 배상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설사 배상을 하더라도, 진실이 밝혀진 2022년 이후의 정신적 고통만 계산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김정민/정선엽 병장 유족 소송대리인] "진실이 밝혀진 건 최근이래. 그러니 손해가 얼마 안 됐지 않냐는 거야. 그래서 전사를 해줬지 않냐는 거야. 그러니 손해가 많이 감축됐지 않냐는 거야. 그거는 물리적인 얘기죠. 수학 공식과 같은 얘기지. 그렇잖아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모르고 죽으면 피해도 없게?"

반란군 쪽에서도 억울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점령한 수경사 33헌병대 박윤관 상병.

초소를 탈환하려던 진압군 쪽 해병대의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김오랑, 정선엽, 박윤관.

같은 날 숨진 세 젊은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혀 있습니다.

반란군 출신 백운택 중장도 이곳에 묻혔습니다.

전두환의 육사 동기로 반란에 적극 가담했지만, 1982년 사망해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반란군을 진압하려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묘도 있습니다.

그의 묘비는 텅 비어있습니다.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냐"는 유족들의 뜻이라고 합니다.

■ 끝나지 않은 반란

◀ 이휘준 ▶

아 반란군들은 수십억대 재산을 모아서 여전히 잘 살고 있는데, 정작 반란을 막으려고 했던 참군인들은 너무 큰 비극을 겪었네요.

◀ 구민지 ▶

이들의 명예가 회복된 게 2022년입니다.

40년이 넘게 걸린 셈입니다.

◀ 이휘준 ▶

정의를 실현한다는 게 이렇게 더디고 어렵다는 게 참 답답합니다.

◀ 구민지 ▶

역사 청산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군사반란과 학살을 옹호하는 왜곡된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 VCR ▶

서울의 한 중학교 앞.

극우, 보수단체들이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역사 왜곡이라며, 단체 관람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세의/가로세로연구소 대표] "역사 왜곡 영화를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 교육의 일환으로 한다는 게 이게 말이 됩니까?"

단체관람한 학교 교장을 직권남용죄로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단체 관람을 취소한 학교들이 속출했습니다.

일부 극우 단체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3성 장군 출신 신원식 국방장관.

그는 12·12 군사 반란을 옹호했습니다.

[신원식 (유튜브 '신인균의 국방TV', 2019년 9월 4일)] "12·12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는 그 공백기에 서울의 봄 일어나고 전 그때 당시에 '나라 구해야 되겠다' 나왔다고 봐요."

군사반란을 옹호한 그는, 지금 대한민국 국방장관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위원장에 임명한 김광동 씨.

그도 5·18 역사를 여러 번 왜곡했습니다.

[이형석/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 행안위, 2023년 3월 13일)] "왜 그러면 자꾸 북한 북한군" [김광동/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북한군이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고 북한이 개입했을 가능성까지 제가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국민의힘 소속이던 허식 인천시의회 의장이 올해 초 배포한 인쇄물.

"5·18은 DJ 세력과 북한이 주도한 내란"이라는 왜곡된 주장이 40면에 걸쳐 실렸습니다.

[허식/인천시의회 의장] <그 기사 그 특별판이 5·18 폄훼가 아니라고 보시는 건가요?> "그거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전혀 없어요. 일부 의원들은 '달라는 대로만 줄까 아니면 그냥 다 줄까' 이렇게 해가지고 그냥 한 거예요."

일부 극우, 보수 단체들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정부 여당 안에서까지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걸까?

[이재의/5·18 기념재단 연구위원] "과거 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만약에 그때 당시에 정말 책임자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아직 지금 제대로 된다면 지금까지도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죠. 근데 한번 처벌을 솜방망이 처벌이네 그렇게 정치적으로 해놓고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네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도 이런 일 해도 괜찮겠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 제2, 제3의 하나회

◀ 이휘준 ▶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는 걸 보니까, 민주주의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1,200만 명이 영화를 봤는데, 그냥 잘 만든 영화여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구민지 ▶

네,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 담긴 1979년 그날, 사람들은 그 속에서 2024년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보기도 합니다.

◀ VCR ▶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하나회는 그런 독재정권이 키운 군내 비밀 사조직이었습니다.

1991년 특전사 보안반장 출신 김충립 씨는 '하나회 파워게임'이라는 글을 통해, 하나회의 존재를 처음으로 폭로했습니다.

[김충립/12·12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 "리더십 강하고 가장 우수 좋은 사람을 뽑아서 전 하나회 회원이 만장일치로 가입을 시켜. 그리고 선서를 해. '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신명을 바친다, 의리를 지킨다, 그래서 비밀 절대 비밀로 한다.'"

국가와 민족을 내세웠지만, 하나회는 철저하게 우두머리에게 충성하며, 자기들끼리 밀고 끌어주던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김충립/12·12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 "군과 국가 이전에 전두환이 최고의 보스야. 쉽게 말하면 마약단이나 범죄 집단 마피아 같은 조직으로 만들어버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1일 만에 전격적으로 하나회 척결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하나회는 역사 속 유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하나회는 없는 걸까요?

관객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고봉서] "정치하는 분들이 서로 편 먹고 이제 그렇게 하잖아요. '민족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하나회도 그렇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상 아니잖아요."

형님 동생 하며 자기들끼리 밀고 끌어주는 엘리트들의 사조직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구정우/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특정 대학의 특정 학과 출신들이 정계,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것들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이니까 직장에서도 그런 학연, 지연의 영향력이 아직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들이 있고."

[서울의 봄 예고] "김일성이 때려죽여도 안 내려옵니다. 오늘 밤은 여기가 최전방이야."

전방 부대까지 반란에 동원했던 하나회 세력.

정보와 권력을 독점한 집단은, 공익이 아닌 조직의 이익, 탐욕스런 사익을 추구했습니다.

[정근식/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특정 권력 기구에 권력이 집중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측면도 있는 거죠. 그래서 권력은 항상 분산되어 있어야 하고 기본적으로는 국민들의 손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서울의 봄>을 주제로 한 관객들의 토론회.

가장 화가 난 건, 정의가 승리하지 못했던 현실입니다.

[한리야] "마지막에 하나회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한 명 한 명 이 사람들이 나중에 뭐가 됐는지 이렇게 다 보여주잖아요. 그게 마치 이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고도 어떤 것들을 누렸는지 잊지 말아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

이기는 쪽이 곧 정의라는 이 천박한 논리는, 여전히 한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조휘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저는 이제 그 쿠데타라는 단어만 빼면 여전히 한국 사회의 한 절반 정도가 믿는 가치이지 않나. 기업인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고 특정 시기에 어떤 부정한 방법을 썼더라도 어떤 궤도에 오르고 경지에 오르면 이 사람은 이제 처벌할 수 없다. 이 사람의 공만 봐줘야 된다는 심리가 있는 것 같은데."

12·12 군사반란 44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제2, 제3의 하나회로부터 자유로운 걸까요?

[홍순권/동아대 사학과 명예교수] "민주적인 의식이 발전하다 보면 그런 세력들이 이제 발붙일 틈은 자꾸 작아지겠죠. 그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그걸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는 게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은 필요하죠. 그런 것들을 없애도록 하는 없애는 노력들."

◀ 이휘준 ▶

민주주의는 더디지만 분명하게 전진해 왔습니다.

서울의 봄은 여전히 우리 모두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구민지 기자(nine@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replay/straight/6562353_289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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