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해봐”하며 정주영에 건넨 ‘독배’…4개월뒤 올림픽 성배가 됐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4. 1. 1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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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과 서울 도시구조의 변화사를 따라 걷다 (2)
1982년 4월 강남구 삼성동에서 탄천을 향해 바라본 서울종합운동장 건설 현장의 모습이다. 중앙에 주경기장, 오른쪽에 야구장, 왼쪽 상단에 잠실주공5단지 아파트가 보인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올림픽 조사단의 방한
1981년 3월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조사단의 한국 방문을 시작으로 미·영 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조사단, 국제경기연맹(ISF) 대표단의 방한이 잇따랐습니다. 올림픽 유치를 신청한 서울의 개최 능력 평가를 위함이었습니다. 조사단은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이 될 서울종합운동장 건설현장을 첫 순서로 둘러보았고, 그 다음으로는 경기시설복합체와 선수촌, 기자촌이 들어설 몽촌토성 일대를 살펴보았습니다. 관련 시설의 공사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고,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최신 시설을 갖춘 롯데호텔과 신라호텔, 워커힐은 방문객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이어져온 미덕에 맞게 외빈들에 대한 대접은 극진했습니다. 조사단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만 하더라도 다들 반신반의한 모습이었지만, 출국할 때는 모두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1981년 조상호 KOC 위원장(왼쪽 세번째)이 방한한 국가올림픽연합회(ANOC) 대표단을 맞아 환담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NOC 조사단이 서울과 나고야를 연달아 다녀간 후 작성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담겼습니다. ‘서울시가 유치 신청을 하는 데에는 국내적으로 전혀 반대가 없었지만 나고야시에서는 시민의 일부가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고 있으며 반대를 하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소 있다.’, ‘서울시는 필요한 제반 시설이 대부분 건설 중에 있었다. 예컨대 주경기장은 한창 건설 중이고 수영장은 이미 완성되었는데, 나고야시의 제반시설은 그 내용이 우수했지만 계획 단계에 불과했다.’ 전반적으로 서울시가 나고야시보다 올림픽 개최 능력이 앞선다는 평가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이후 유치 활동에서 타국을 설득하는데 좋은 근거자료가 되었습니다.
‘독이 든 성배’를 ‘축배’로 바꾼 기업인들
하지만 세계 경제대국 2위 일본의 벽은 높았습니다. 1980년, 일본의 국민소득총액은 대한민국보다 17.6배 높았고 1인당 소득수준도 5배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일본은 나고야 올림픽 유치를 위해 약 500만 달러의 거금을 쏟아 부은 상태였습니다. 소니와 도요타, 닛산, 혼다, 캐논 등 범지구적인 판매와 공급체계를 갖춘 글로벌 기업들도 유치전에 참여했습니다. 수출입이나 차관, 원조 등 일본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은 나고야 지지를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날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에게 유치전에서 진다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못해도 열 표 이상의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이처럼 개최국 선정 투표가 열리는 IOC 총회가 4개월여 남았던 1981년 5월, 대세는 나고야로 기울어진 듯 보였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2인자였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올림픽 유치 총책임자로 임명해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뒤에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발로 뛴 ‘공신’은 바로 대한민국의 기업인들이었습니다. 올림픽 유치는 어느 하나의 공적이 아닌 모두가 이룬 결과이지만, 그중에서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활약을 소개합니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 활동중인 정주영 회장(왼쪽). 오른쪽은 유치단과의 기념사진. [아산정주영닷컴]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불러 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쥐어줍니다. 후에 출판된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사전에 일언반구 협의가 없었던 일방적인 임명이었습니다. 사실상 정권에서 위급상황임을 깨닫고 민간에 SOS를 친 것입니다. 이에 더해 유치가 불발되어 망신을 당해도 정주영 네가 당하라는 떠넘기기의 목적이었습니다. ‘독이 든 성배’를 손에 쥐었지만, 정 회장 현대그룹 차원의 인력과 네트워크를 총 가동하여 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듭니다. 본인 스스로도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며 IOC 위원들을 만나 설득했습니다.
정주영 회장과 조중훈 회장(앞줄 오른쪽부터)이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고 있다. [매경DB]
정주영 회장은 회고록에서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의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기여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의 회고록에 등장한 유일한 경제인의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항공사였고, 대표는 조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IOC 위원들의 한국 방문을 주선하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소속 위원들에게는 왕복 항공권을 기꺼이 제공했습니다. 또한 조중훈 호장은 한·불 경제협력위원장을 지내며 쌓은 정·재계 인맥을 바탕으로 프랑스 위원들을 설득하는데 앞장섰습니다.

1981년 7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131개 IOC 회원국 스포츠 지도자들이 참가하는 국가올림픽연합회(ANOC) 총회가 열렸습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물론 총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위원들도 열다섯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대표가 나고야 지지를 바라는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연설로 참석자들의 빈축을 산 반면, 조상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은 서울의 순조로운 올림픽 개최준비와 탄탄한 치안과 안보 상황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올림픽은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닌 개발도상국에서도 개최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큰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그해 8월 중간 점검으로 유치 가능성을 분석했는데, 접촉한 IOC 위원 81명 중 적극 지지는 5명, 지원 표명 위원은 16명, 호의적 고려 17명, 중립 27명이며 나고야 지지는 16명이었습니다.

‘쎄울, 코레아!’… 올림픽 유치의 순간
1988년의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게 될 IOC 총회는 1981년 9월 독일의 휴양도시 바덴바덴에서 열렸습니다. 박영수 서울시장(단장), 조상호 KOC 위원장, 정주영 올림픽위원장, 유창순 무역협회 회장 등 여섯 명의 공식대표단과 올림픽총회 대표, 민간유치위원, KOC 지원단, 실무지원단 등 총 106명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현지에 도착한 지원단은 여정을 풀 새도 없이 각자 활동지침에 따라 마지막 유치 활동에 돌입했습니다. ISF 회장단과 NOC 위원장단, 그 밖에 국제 스포츠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과 접촉하며 서울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며 활발한 유치 활동을 펼쳤습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를 앞두고 꾸며진 서울관. 서울관은 올림픽 주경기장의 모형도를 중심으로 한국의 전통과 문화, 경제발전상이 담긴 패널과 영상물로 채워졌다. [대한체육회]
서울을 소개하는 전시관은 대한민국의 스포츠 및 문화와 예술, 발전상을 홍보하는 내용으로 다채롭게 채워졌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와 세계적 축구선수인 차범근 선수의 즉석사인회를 비롯해 부채·담뱃대·마패 등 한국 전통 기념품 증정 이벤트가 열려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습니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박영수 서울시장, 정주영 올림픽위원장을 비롯한 인사들이 환호하고 있다. [아산정주영닷컴]
IOC 총회에서의 개표 결과가 발표된 것은 9월 30일 오후였습니다. 82명의 IOC 위원들이 진행한 비밀 투표에서 유효 표 79표 중 52표를 획득한 서울이 최종 개최지로 선정되었습니다. 27표를 받은 나고야와는 두 배 가까운 표차가 나는 압승이었습니다.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 도시로 서울이 선정되었다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공식 선언이 들리자 박영수 서울시장을 비롯한 대표단들은 환호하며 서로를 얼싸안았습니다. 이로부터 두 달 후에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 총회에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까지 유치를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이 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뒤 정주영 서울올림픽 추진위원장과 김택수 IOC 위원이 축배를 들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유치위원장 자격으로 유치확정서에 서명 중인 정주영 회장. [AP 자료사진·아산정주영닷컴]
1988년 10월 서울올림픽 유치를 확정하고 돌아오는 대표단을 맞아 시민들이 환영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태극기와 오륜기를 들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남북의 동상이몽
올림픽을 유치했지만, 개최까지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정권 탄생의 문제와 소요사태, 분단상황 등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한 점을 들어 유럽 내 공산 국가들은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나라인지 의구심을 제기합니다. 이 틈을 타 인도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이 88올림픽을 인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1984년 넬슨 파이유 프랑스 NOC 회장은 개최지를 바르셀로나로 옮길 것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개최국 변경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자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경각심을 느껴 서울올림픽의 대안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이 스스로 개최권을 반납하거나 대회를 한차례 연기하는 안, 개최지를 그리스로 고정하고 앞으로 변경 없이 개최하는 안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우리 정부가 IOC에 강력하게 개최지 변경 불가 입장을 전달해 이 논란은 잦아들게 되었습니다.

서울올림픽 개최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85년 10월 스위스 로잔에서 만난 김종하(오른쪽부터)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과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김유순 북한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이 손을 붙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신 공산주의 국가들은 88올림픽이 분단국가에서 치러지는 만큼 올림픽을 남북 양 지역에서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1984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서울올림픽을 남북 양 지역에서 개최하자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공산권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IOC에서는 남북체육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85년 남북한의 대표들을 스위스 로잔으로 소집합니다.

1985년에서 1987년까지 네 차례 열린 남북체육회담은 남북의 동상이몽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남한은 북한이 개별팀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길 바랬지만, 북한은 단일팀으로 참가하고 올림픽을 공동 개최해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길 바랬습니다. IOC가 북한에 많게는 5개 종목까지 떼어줄 의사를 보였으나 북한은 23개 종목 중 인구 비례를 들어 8개 종목을 원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단호히 거부해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1988년 9월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소련 선수단이 김포공항을 통해서 입국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같은 시기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이 탑승한 하일 솔로호프호가 인천항에 입항하는 모습. [매경DB]
이처럼 대회를 준비하며 가장 큰 어려움은 동구권 국가들을 설득하고 포섭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공산 국가들과 제대로 된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협상이 틀어진 이후 북한은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성공을 막기 위해 공산 국가들에게 대회의 불참을 유도하는 로비까지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공산권의 맹주인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었기에, 소련의 영향력이 미치던 다른 공산 국가들마저도 참가를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외교·체육계 관계자들이 총력을 기울여 대회를 반년 앞둔 1988년 1월 소련의 참가를 이끌어냅니다. 소련의 서울올림픽 참가로 헝가리와 폴란드, 몽골과 라오스를 비롯해 아프리카 공산 국가들까지 참가를 선언합니다. 이렇게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동서 양 진영의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며 올림픽 역사상 최대 규모인 160개국이 참가하며 화려한 막을 올리게 됩니다.

서울올림픽을 밝혀줄 성화가 1988년 8월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광장 안에 안착되고 있다. [연합뉴스]
<참고자료>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5」, 한울출판사

ㅇ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솔

ㅇ「88올림픽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ㅇ「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서울역사박물관

ㅇ「제24회 서울올림픽백서」, 서울시

ㅇ 「서울스포츠」2022년 9+10월호, 서울특별시체육회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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