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손' VIP들 다 놓칠라"…콧대 높던 명품도 '백기' 왜?

안혜원 2024. 1. 1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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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어도 못 사는 '슈퍼 갑'이었는데…180도 바뀐 명품업체들
오픈런 사라지고 '큰손' VIP도 해외서 돈 써
백화점 명품 매출, 20년만에 '4개월 연속 역성장'
국내 한 롤렉스 매장 전경. /사진=한경DB

“원하시는 물건 말씀만 하시면 구해다 드릴게요.”

국내 한 백화점의 롤렉스 우수고객(VIP)인 강모씨(59)는 최근 매장 점원으로부터 이 같은 연락을 받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오래 기다려도 인기 제품을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는데 불과 1년 만에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매장이 먼저 고객에게 구매를 유도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강씨는 “이 매장을 10년 넘게 찾았지만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시기 이후로 이런 내용의 연락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명품 장사가 예전만 못한가 보다 생각이 들더라”라고 했다.

콧대 높던 명품 브랜드들이 VIP 모시기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이어진 명품 열기가 한풀 꺾이면서다. 고물가·경기침체 여파에 해외여행 등으로 수요가 분산돼 명품 소비심리가 줄자 소비 여력이 있고 충성도 높은 VIP를 통해 매출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서울의 한 백화점 에르메스 매장 앞. /사진=연합뉴스


14일 업계에 따르면 럭셔리 브랜드들이 앞다퉈 VIP 할인·서비스 혜택을 대폭 늘리며 고객 관리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일부 명품 매장은 선물 꾸러미를 준비해 단골 고객을 초대하는가 하면 한정판 제품을 VIP에게만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VIP 대상으로 비공개 할인을 해주기도 한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고야드는 VIP 고객에게만 벨하라 토트백 한정판 제품을 팔았다. 고야딘 캔버스와 쉐브로슈 카프스킨 가죽를 조합해 터콰이즈 블루 색상으로 제작한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자랑하는 제품이다.

‘대기 마케팅’으로 유명한 에르메스도 한정된 VIP에게 초고가 제품을 판매하는 전략을 강화할 방침이다. 지금도 버킨백, 켈리백 등 대표 제품을 사기 위해서는 VIP 고객들도 에르메스 제품을 꾸준히 구매하는 식으로 2~3년간 공을 들여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재고를 줄이고 판매 비중을 VIP 고객에게 집중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린다”고 전했다.

혼수 예물로 인기를 끄는 불가리는 VIP 할인 혜택을 당분간 유지하기로 했다. 불가리는 구매 금액에 따라 사파이어·에메랄드·루비 등 등급을 나누어 할인율을 차등 적용한다. 예를 들어 누적 구매금액이 2억원을 넘으면 에메랄드 등급을 부여하고 10% 할인을 제공하는 식이다.

코로나19 시기 동안 구매 고객이 늘어 VIP 수가 늘자 구매 실적 기준을 대폭 상향하겠다고 공지했지만, 기존 VIP고객에게는 혜택을 기존대로 부여할 방침이다. 까르띠에 수입사는 일부 VIP 고객을 대상으로 몇 가지 제품을 동시에 구매할 경우에 한해 5~10%가량 값을 깎아 판매했다.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 명품 매장이 한산하다. /사진=한경DB


롤렉스·반클리프앤아펠·루이비통·디올·구찌 등은 단골들에게 개별로 연락을 취해 매장 방문을 요청해 구매를 유도하고 있다. 매장 직원이 개별적으로 VIP 고객과 연락해 신규 브랜드나 상품을 소개하고 문의를 받는 사례도 확연히 늘었다.

주요 브랜드 명품매장에 VIP 고객으로 등록돼 있는 박모씨(38)는 “1~2년 전까지만 해도 물량이 달린다는 이유로 제품을 풀지 않아 물건 사기가 힘들었다”며 “명품 마니아들이 오히려 매장 직원에게 커피나 다과 등을 선물하며 원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식으로 ‘을(乙)’을 자처했는데 최근엔 매장 직원들이 선물 공세를 하며 판매에 열 올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처럼 명품 브랜드들이 VIP 모시기 경쟁에 사활을 걸게 된 데에는 매출 신장률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명품 시장 호황을 이끌던 ‘보복 소비’가 완전히 끝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롯데·신세계·현대 등 백화점 3사의 해외 유명 브랜드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1.6% 감소해 4개월 연속 역성장했다.

백화점 명품 매출이 4개월 연속 역성장한 것은 2003년 7∼10월 이후 20여년 만이다. 

업계 관계자는 “작년 초까지만 해도 성행하던 명품관 오픈런이 거의 자취를 감췄고 ‘큰손’ 고객들도 국내 매장 대신 해외로 빠지는 추세”라며 “주요 브랜드도 역성장 우려가 나오는 등 시장 수요 자체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믿을 건 VIP뿐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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