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결혼 이어 학업도 금쪽이? 욕하면서도 보게 되는 ‘금쪽이 예능’

배준용 기자 2024. 1. 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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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성적 향상 예능’도 흥행
한국 사회는 왜 열광하나
리얼리티 예능 '티처스'에서 메가스터디 소속의 조정식 영어 강사가 상담 학생을 꾸짖는 장면. /유튜브

“그런 생각이면 약대도 못 가요. 한번 도망치면 계속 도망치게 되거든.”

무조건 의대 진학을 원하는 부모와 달리 ‘의대에 못 가면 약대에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고1 학생에게 일타 강사가 일침을 던진다. 옆에 앉은 또 다른 일타 강사는 “그래서 아버님이 의대 진학을 고집하실 수도 있어”라고 덧붙인다. 의기양양해진 학생의 아빠가 말을 보탠다. “100m 달리기를 하는 선수는 100m만 뛰어선 좋은 성적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 이상을 뛰어야 되겠죠.”

이어 엄마가 “공부하는 거에 비해서는 성적이 나오니까, 공부 머리는 좋은 거 같다”고 말하자 일타 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히 받아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정말 그렇다면 3월에 친 모의고사는 만점이 나왔어야 정상이에요. 상위권 학생들 모아보면 그렇게 특출한 머리는 아닐 거예요.”

◇육아·결혼 금쪽이에 이은 학업 금쪽이의 등장

최근 자녀를 둔 부모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티 예능 ‘티처스(Teachers)’의 한 장면. 작년 11월 방송이 시작된 뒤 자녀 학업에 관심이 큰 부모들은 만나면 일단 ‘티처스 봤느냐’는 말부터 나눈단다. 본방송 시청률은 1%대를 기록하고 있지만, OTT 넷플릭스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들인 드라마와 예능들을 제치고 한국 TV 쇼 부문 TOP 10에 들었다. ‘티처스’에 공개된 일타 강사들의 각종 팁, 공부 노하우 영상은 유튜브에서 조회 수가 수백만회에 이르고, ‘티처스’ 관련 영상 총 조회 수는 방영 7회 만에 5000만회를 넘었다.

‘티처스’는 매회 사연을 신청한 중·고교생과 학부모가 나와 성적 고민을 털어놓는다. 학생의 일상생활과 공부 습관, 성적을 함께 지켜본 뒤 인기 절정 일타 강사들이 학생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1~2개월간 일타 강사의 집중 과외와 멘토링를 받은 학생은 두근거리는 시험 끝에 급상승한 성적을 보며 방긋 웃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화제의 예능 ‘금쪽 같은 내 새끼’의 방송 포맷과 똑 닮았다. 실제로 ‘티처스’를 만든 제작진은 ‘금쪽 같은 내 새끼’를 연출한 바로 그 제작진. 이들은 제작 발표회에서 ‘티처스’를 “금쪽 같은 내 새끼를 졸업한 부모님들이 볼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프로그램의 진정성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방송에는 “무작정 공부하라고 닦달할 게 아니라 올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니 참 좋다”는 호평이 줄을 잇는다. “저기 출연한 학생들은 일타 강사한테 과외를 받는 거니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물론 부정적인 댓글도 있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다른 길이 있다는 것도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 “이미 상위권인 친구보다 형편이 어렵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친구들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금쪽이 예능에 열광하는 한국 사회

방송 업계에선 “‘금쪽이 예능’으로 불리는 설루션 예능이 불패의 기세”라는 말까지 나온다. 2019년 ‘금쪽 반려견’을 동물 훈련사 강형욱이 교정하는 ‘개는 훌륭하다’가 방영되면서 큰 화제가 됐고, 2020년부터 방영된 ‘금쪽 같은 내 새끼’는 이른바 ‘금쪽이 신드롬’을 일으켰고 주인공 오은영 박사는 국민적 멘토로 등극했다. 이어 이혼 위기에 몰린 ‘결혼 금쪽이’를 치유하는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2022년 방영 시작), 최근에는 ‘학업 금쪽이’를 해결하는 ‘티처스’까지 나오기만 하면 흥행하는 양상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금쪽이 예능에 열광하나.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한국 사회가 압축 성장하면서 변화가 너무 빠르다 보니 문제에 대응할 해법이나 원칙, 가이드라인을 구할 공동체나 교육이 부재한다”며 “이런 수요들을 설루션 예능이 파고들면서 인기를 누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티처스’는 사교육 시장, 대한민국 교육의 실체를 그대로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순기능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설루션 예능의 역기능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포맷 자체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긍정적인 양상을 띄지만, 결국엔 사연을 가진 출연자의 문제 상황을 자극적으로 소비하면서 시청자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회의감과 피로감, 반감을 갖게 한다는 것. 김헌식 평론가는 “한 전문가의 설루션이 절대적인 해답처럼 여겨지는 것도 위험한 현상”이라며 “‘티처스’는 학생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학생한테 문제가 있다고 전제하고 접근하는 방식도 위험해 보인다”고 했다.

실제 방송에서는 “상위 1%가 세상을 만드는 거고 그 외는 들러리로 사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 성적 1%가 아니면 공부에 매달릴 이유가 없고 의대가 아니라 약대로 목표를 낮출 거면 방송에 출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부모의 말들이 쏟아졌지만, 출연진은 당혹스러워할 뿐 딱히 반박하진 않는다. 반면 “시험 기간 외에는 공부를 안 한다”는 학생의 말에 “그래선 의대는 꿈도 못 꾼다”는 일타 강사들의 꾸지람이 쏟아진다.

학생을 위한 설루션인지 학부모를 위한 자녀 성적 설루션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의대를 준비한다’며 중1 아들에게 고2 수학을 선행시키는 엄마는 그 이유에 대해 “초등학교 2학년 때 IQ 검사를 해보니 높게 나와서 의대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4형제를 모두 의대에 보내 4층 건물로 병원을 운영하는 설계를 해놨다”는 한 아빠의 말도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김헌식 평론가는 “어떻게든 성적을 올리면 학생도 학부모도 행복해진다는 플롯이 학업 지상주의와 사교육 경쟁,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는 과도한 의대 입시경쟁까지 부추기는 셈”이라며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찾아 해결하고, 본인이 원하는 걸 찾아 주체적으로 성장하는 방향이 아니라 ‘부모가 모든 걸 잘 알고 컨트롤해야 자녀가 잘된다’는 과도한 가족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방송 시작 무렵 감미로운 노래 실력에 기타 솜씨를 뽐내면서 “어릴 때부터 기타, 피아노, 드럼, 미술 등 예체능을 좋아하고 상장도 많이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한 학생에게 누구도 “의대나 약대 대신 다른 진로는 고민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정말 의대가 목표냐’고 묻긴 하지만, 학생은 주눅 든 채로 “지금은 그렇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자주 말해서...”라며 말을 흐린다. 한 평론가는 “‘티처스’는 갖가지 사교육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성적 문제를 일타 강사가 해결해준다는 게 결국 ‘특출 난 사교육’ 말고는 답이 없다는 모순된 결말로 이어진다”며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공교육의 문제는 무엇인지 다루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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