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 12일간의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③

2024. 1. 1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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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공기와 혹독한 추위에 맞서다

파미르 하이웨이 여정의 반이 지났다. 광활한 파미르 고원은 여전히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치 SF영화 속 장면의 연속이다. 영상 40도에서 영하 40도까지 크게 오르내리는 고산지대 마을, 매우 건조한 공기와 강한 찬 바람, 높은 자외선으로 인해 일년 내내 혹독한 기후가 도시를 뒤덮는 고지대 사막도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풍요’가 찾아왔다.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가장 높은 4,655m ‘아크-바이탈 패스’로 가는 길. 예로부터 악명 높은 길로 유명해 ‘지옥으로부터의 길’이라 불렸다.
고립된 존재로서 여행을 새로 쓰다
해발 4,000m를 넘긴 뒤부터는 여행의 요소랄 게 딱히 없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이동하는 것이 전부다. 멀리 보이던 설산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마치 SF영화 속 한 장면에 빨려 들어간 것 같은 비현실적인 파미르 고원은 가도가도 끝이 없고, 황홀감과 더불어 고립감도 찾아온다. 일행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딴 행성에 홀로 떨어져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며 여행을 새로 쓴다.
여정 여섯째 날의 최종목적지이자 이날 밤을 보낼 알리출(Alichur) 마을까지 약 10㎞를 남겨둔 지점에서 호수를 만났다. M41도로와 군트(Gunt)강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크 발릭(Ak Balyk) 호수. 타지키스탄어로 ‘아크’는 흰색을, ‘발릭’은 물고기를 의미하는데, 수정처럼 맑은 호숫물에 말 그대로 물고기가 가득 들어찬 수족관과 같은 호수다. 이곳 현지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이 호수에서는 수영은 물론 낚시도 절대금지다. 오직 눈요기만 가능해서 수족관이라 불린다.
M41도로와 군트강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크 발릭 호수
어차피 이러한 이유가 따라 붙지 않더라도 호수에서의 액티비티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두 뺨을 후려치는 매서운 칼바람과 추위가 호수를 감상할 여유를 빼앗아갔기 때문. 파미르 하이웨이 여정을 시작했던 두샨베(Dushanbe)의 한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했던 것을 떠올리면 같은 땅 같은 나라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엿새 동안 참 멀리도 달려왔다. 그래 봤자 이제 막 여정의 반이 지났을 뿐이다.
알리출 마을에 닿자마자 식당부터 찾았다. 오후 4시가 넘어가는데 아침식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랑가르(Langar) 마을에서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끼니를 해결할 만한 마을도 식당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리출 마을에 문을 연 식당은 오직 한곳, 이곳의 메뉴도 오직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앉아서 기다리면 하나뿐인 메뉴가 후다닥 테이블에 오른다. 식당 주인은 양고기 수프라고 했지만 살코기는 찾아볼 수 없는, 뼈와 기름만 둥둥 떠 있는 고깃국에 가까웠다.
알리출 마을에 문을 연 하나뿐인 식당에서 고산지대 주식으로 통하는 양고기 수프를 먹었다.
며칠째 이런 고깃국을 계속해서 주식으로 먹고 있다. 고지대 마을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기에 어린애마냥 음식투정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다. 새것과 다름없이 남긴 음식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해도 이 또한 어쩔 수 없다. 허기진 배가 저 땅끝까지 닿는다면 얘기가 달라질까.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파미르에 온 건 아닌데 말이다.
알리의 저주가 불러온 최악의 밤
알리출은 땅보다 하늘에 더 가까운 텅 빈 달빛으로 둘러싸인 작은 고산지대 마을이다. 파미르 고원에 자리한 여느 마을처럼 알리출도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생명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량한 첫인상이 불안정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택 외에 생활시설은 하나뿐인 식당과 상점이 전부다. 여행자가 묵을 수 있는 홈스테이도 서너 개밖에 되지 않는다.
알리출 마을 홈스테이 전경
알리출에 당도하고 보니 랑가르는 이곳과 비교해 대도시 못지 않게 규모가 큰 마을이라는 사실에 절감했다. 이곳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고 나면 과연 알리출도 그렇게 여기게 될까.
여름이 오는 길목인데도 바람이 매섭다. 한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이 마을에서 ‘생존’은 어떤 의미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알리출’이라 이름 붙여진 데에는 이곳의 혹독한 기후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리출은 ‘알리의 저주’를 의미하는데, 아주 먼 옛날 선지자의 사위인 알리가 이 지역을 여행하던 중 발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잦은 우박이 쏟아지는 가혹한 기후와 강한 바람을 겪어, 그로 인해 붙은 이름이다.
알리출 마을 홈스테이에서 만난 오토바이 여행자와 마을 전경
알리의 저주는 날이 저물고 깜깜한 밤이 되자 하나둘 출몰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염려했던 고산병이 결국 재발한 것. 머리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두통의 깊이는 이전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랑가르에서 한번 고산병을 겪긴 했지만 해발 4,000m는 처음이기 때문이었을까. 네 명의 일행 중 셋에게 고산병이 찾아와 두통과 함께 미세한 가슴 통증까지 나타났다. 홈스테이 주인이 차려준 저녁 밥상은 눈요기에 그치고 말았다(사실 고깃국이 아니었더라면 한술 뜨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음식은 물론 날씨와 숙소환경 등 온갖 상황에 대한 투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찾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나 자신에 실망감을 지울 수 없었다. 괜스레 서러움에 복받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고산병을 앓고 있는 다른 일행과 얼싸안은 채 얼마간 서로의 울음을 삼키고 나서야 불안한 감정은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알리출 마을에 자리한 하나뿐인 상점
해발 4,655m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밤새 잠을 설치긴 했지만 기나긴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새날이 찾아오는 법. 그리고 반가운 소식도 찾아온다. 일곱째 날 여정 가운데 알리출에서 출발해 M41도로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올라간 뒤 그 다음부터 남은 여정 내내 내리막길만 존재한다는 것. 한나절만 잘 버틴다면 특효약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다행히 밤새 고산병을 앓았던 다른 일행들도 앞장서 힘을 내기 시작했다.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봤던 사진들, 그것의 주된 배경이었던 아크-바이탈 패스(Ak-Baital Pass)가 머지 않았다.
아크-바이탈 패스는 길이가 6.6㎞에 이른다. 고도는 4,282m에서 시작해 4,655m까지 총 373m의 오르막길로 이뤄져 있다.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가장 높은 이 지점은 예로부터 악명 높은 길로 유명해 ‘지옥으로부터의 길’이라 불렸다. 고대 실크로드 당시 이 고갯길은 이곳을 거쳐가는 상인들에게 최악의 장애물이자 고난의 길로 인식되기도 했다.
(위로부터)아크-바이탈 패스로 향하는 길, ‘지옥의 길’이라 불리는 373m의 오르막길(2, 3번째 사진)
땅은 매우 거칠고 건조하며 4륜구동 차량도 운전이 쉽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비포장도로로 덮여 있다. 도로 곳곳에는 오랜 침식과 지진, 산사태와 눈사태 등으로 심하게 파손되거나 파괴된 흔적이 역력하다.
이와 함께 황량하고 초자연적인 파미르 산맥의 풍경은 또 한번 외딴 행성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자아냈다. 인터넷 사진에서 보던 아크-바이탈 패스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길이다. 생명체 하나 없는 넓은 고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표지판이 멋들어진 여느 건축물보다 귀하다. 엄청난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도 표지판 앞에서의 인증샷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해발 4,655m에 서서 강풍을 뚫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마침내 여행의 목적이 바로 선다.
해발 4,655m 파미르 하이웨이 최고점을 알리는 표지판
차디찬 호수와 굳게 닫힌 국경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의 최종목적지는 M41도로의 최고점에서 북쪽으로 약 6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지도상에서만 보던 카라쿨 호수(Karakul lake)를 실제로 맞닥뜨리는 순간이 가까워온다. 파미르 산맥의 반짝이는 보석이라 불리는 호수. 세 개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파미르 산맥 기슭에 가장 혹독한 풍경 속 푸르른 빛을 뿜어내는 카라쿨 호수가 해발 3,960m에 자리한다. 약 2,500만 년 전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부딪혀 그 분화구 안에 직경 25㎞의 웅덩이가 생겨난 것이 현재의 카라쿨 호수를 형성한 배경이다.
호수는 최대 너비 52㎞, 최대 깊이 230m, 표면적 380㎢에 이른다. 호수 주변이 습한 공기 덩어리를 막아주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탓에 연간 강수량이 30㎜도 채 되지 않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호숫물, 차를 타고 산책을 해야 할 만큼 넓은 면적의 호수는 첫인상이 오히려 바다에 가까웠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물의 온도를 제외하면.
파미르 산맥의 보석이라 불리는 카라쿨 호수
카라쿨 호수에서 키르기스스탄 국경까지는 불과 50㎞ 거리다. 평소대로 두 나라 사이 국경 개방이 이뤄졌다면 카라쿨 호수 대신 키르기스스탄 오시(Osh)가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의 최종목적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했던 2023년 6월 당시 두 나라의 국경은 굳게 닫혀 있었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두샨베로 향하는 수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2022년 1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국경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로 인해 두 나라의 국경이 봉쇄된 상황이었기 때문. 닫혔던 국경은 2023년 9월부로 재개되면서 현재는 두 나라를 오가는 일반적인 루트의 여행이 가능하다.
두 나라의 국경이 다시 개방된 데에는 관광 산업에 따른 손실을 막기 위한 키르기스스탄 정부의 움직임이 큰 몫을 차지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카라쿨 호수 마을 전경
그도 그럴 것이 국경이 막힌 이후 오시에서 출발해 두샨베로 향하는 여행자가 전무하다 보니 오시나 키르기스스탄 여러 지역에서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상품을 운영하는 대다수의 여행사들이 파산을 면치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여행자를 상대로 홈스테이를 운영하는 카라쿨 호수 마을 주민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봄여름 시즌이면 활발히 오가던 여행자들의 발길이 뚝 끊긴 것.
그 머나먼 거리를 달려온 우리 일행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이해준 호수 마을 사람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들른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라며 채근하는 이들의 말을 뿌리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환대가 이익을 꾀하려는 장사치의 속마음일지라도 말이다.
카라쿨 호수 주변에 자리한 홈스테이
고지대 사막도시, 풍요로운 무르갑에서
타지키스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 무르갑(Murgab)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파미르 하이웨이 여정에서 호로그(Khorog) 이후 두 번째로 방문하는 도시다. 도시라고 해 봤자 인구가 고작 6,000명에 불과한 곳이지만 파미르 고원에선 이 정도면 도시로 분류된다. 무르갑은 1893년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영국 사이 냉전이 벌어졌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한창이던 때 아프가니스탄과 중국 국경으로 향하는 러시아 제국군의 전초기지로 형성된 지역이다.
이곳 주민들의 대다수는 키르기즈족이 우세하다. 타지키스탄 땅이지만 오랜 세월 키르기스스탄에서 넘어와 정착한 키르기즈족이 터를 잡아 살아가는 도시에 가깝다. 지도상 땅의 주인이 타지키스탄으로 분류되어 있을 뿐 사실상 무르갑의 주인은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도 아닌 두 나라 사이에 걸쳐 있는 주민들인 셈이다.
무르갑의 상징물 레닌 조각상(첫 번째)과 타지키스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사막 도시, 무르갑의 전경
무르갑의 기후는 매우 극단적이다. 매우 건조한 공기, 강한 찬 바람, 높은 자외선으로 인해 일년 내내 혹독한 기후가 도시를 뒤덮는다. 특히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 반대로 한여름에는 영상 40도를 웃돈다. 게다가 고지대 사막으로 분류되어 여름엔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한다. 대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도시가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무르갑에선 통하지 않는 얘기다. 과거 러시아 군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현재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다.
초여름임에도 불구, 잠깐의 산책에도 피부가 금세 말라 퍽퍽하게 느껴진다. 다시 한번 이곳의 극단적인 기후를 실감했다. 하지만 그보다 며칠 만에 도시를 향유할 수 있다는 데 반가움이 더 큰 것도 사실. 중심부에 자리한 레닌 거리를 따라 걸으며 학교, 보건소, 호텔, 은행, 슈퍼마켓, 군사기지 등 제법 갖춰진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고지대 사막도시 무르갑의 풍경
지역 시장 방문도 빼놓을 수 없다. 여러 개의 선적 컨테이너로 만든 시장에서는 값싼 중국 상품과 지역 수공예품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먹거리 풍성하고 왁자지껄한 시장과는 거리가 멀다. 소량의 채소나 과일, 생필품 등 생존을 위한 용품이 즐비하고 너도나도 살아 남기 위해 존재하는 시장에 가까운 풍경이다. 장이 서는 날에는 무르갑 주민들은 물론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장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시장이라곤 이곳 하나뿐이기에, 그만큼 주민들에겐 풍요로움이 넘치는 귀한 시장이다.
이는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며칠 만에 고깃국 대신 오렌지와 사과, 오이 등 날것 그대로의 신선한 음식을 입에 넣는 호사를 누렸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풍요’의 의미를 깨우친다. 살아가는 환경에서 결코 보잘것없는 것은 없다.
여러 개의 선적 컨테이너로 이뤄진 무르갑 시장 전경
챗GPT가 요약한 파미르 하이웨이 여행 3편 한번에 보기
※파미르 하이웨이 마지막 여정이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1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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