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욱 판사, 사건 미루지 않는 분” 마지막까지 컴퓨터 켜져 있었다

양은경 기자 2024. 1. 1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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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별세한 고(故) 강상욱 서울고법 판사
법원 로고

“사건을 남겨두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11일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고(故) 강상욱 서울고법 판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동료 판사들은 강 판사를 이렇게 기억했다.

강 판사는 평소 저녁식사 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구내 탁구장에서 운동을 한 후 다시 서울고법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와 밤 늦게까지 일을 했다고 한다. 한 동료 판사는 “밤새 기록을 봤는지, 아침에 사무실에서 나와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출근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사망 당일인 11일도 강 판사는 저녁식사 후 대법원 구내에서 운동을 했다. 사무실로 다시 돌아올 계획이어서 컴퓨터는 켜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날 저녁 7시 30분쯤 강 판사가 갑자기 쓰러져 심정지 상태가 됐고 현장에서 제세동기를 이용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결국 사망했다.

강 판사가 이날 저녁 6시쯤 재판부 내부망에 올린 한 사건의 항소이유서 제출에 대한 결재요청 서류는 결국 그의 마지막 흔적이 됐다. 그가 소속된 서울고법 민사 24부(가사 2부) 재판장인 김시철 부장판사가 그가 사망한 후인 12일 오전에 이 서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김 부장판사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던 판사”라며 “평소에도 밤에 일을 하다 결재요청을 종종 남기곤 했는데 그 시각이 밤 12시가 다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 강상욱 고법판사는 현대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했고 2001년 제 4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12년에는 UC버클리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밟고 뉴욕주 변호사와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2011년 서울중앙지법 판사 재직 시절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의 법관평가에서 만점을 받으며 우수 법관으로 선정됐다. 2020년부터 서울고법 판사로 근무했다.

강 판사는 2011~2016 서산지원에서 근무하면서 다뤘던 태안 기름유출로 인한 어민들의 손해배상 사건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았다고 한다. 2007년 충남 태안반도에서 허베이 스피리트호에서 유출된 약 1만 톤의 원유가 375㎞에 이르는 서해안 지역을 덮쳐 신고된 피해액만 4조 2000억원에 이르는 국내 최대 해양오염 사건이었다. 당시 서산지원은 6개 전담 재판부에서 12년에 걸쳐 재판을 했는데, 강 판사는 당시 피해를 본 어민들을 일일히 만나 합의를 이끌어냈던 경험을 주변에 종종 얘기했다고 한다.

그가 속한 서울고법 민사 24부는 최태원SK 회장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2심을 맡아 주목받고 있었다. 강 판사는 이 사건의 주심(主審)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중요도를 감안해 재판부 모두가 사건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 최 회장 측에서 재판장의 조카가 소속된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를 추가 선임하면서 연고관계를 고려해 재판부를 바꿔야 하는지가 논의됐다. 서울고법은 11일 재판부를 변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앞두고 양측에서 재판 서류를 여러 번 제출했지만, 당초 이날로 잡혀 있던 재판이 연기됐고 제출된 서류 양도 많지 않아 특별히 이로 인해 업무가 과중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날 고인의 빈소에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해 김상환 법원행정처장,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 등이 조문했다.

고인의 부친은 1992년 민주당 인권위원장이자 14대 국회의원이었던 강수림 변호사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 1녀가 있다. 발인은 14일 오전. 장지는 광주공원묘원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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