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도 티 안나는 천막 관리… 재수 없어 ‘경신환국’ 꼬투리 되기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4. 1. 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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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4) 장막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전설사
햇빛 가릴 때 사용했던 차일
우천시 쓰는 기름칠 한 유악
예식 때 쓰는 장막 관리 관청
세조 땐 유악에 빗물 새 처벌
성종 땐 엉뚱한 장막 펴 국문
유악은 왕 소유의 ‘군수물자’
남인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
집안 행사에 유악 몰래 사용
숙종, 왕을 능멸한 사건 간주
남인 세력 쳐내는 빌미 삼아
#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은 관청
정조가 화성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과 여러 행사를 치른 장면을 담은 ‘화성행행도’ 8폭 병풍 중 3폭. 그림 속에 넓게 펼쳐진 장막과 차일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일이 전설사의 몫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전설사(典設司)는 예식을 할 때 쓰는 장막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고려시대의 상사국에서 비롯되었다. 상사국은 고려 목종대에 설치되어 충렬왕 때엔 사설서로 불리다가 공양왕 때는 상사서로 개칭된 곳이다. 이후 조선 왕조에 들어와 사막(司幕), 즉 장막을 다루는 관청이라는 뜻으로 불리다가 세조 때에 전설사로 굳혀졌다.

관원으로는 제조 1인과 정4품의 수(守) 1인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제검 2인, 별좌 2인, 별제 2인이 있었다. 그리고 하급 관원으로 서원 1인, 일꾼 14인, 사령 4인, 군사 2인이 있었다.

이들의 주 업무는 장막과 유악, 차일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유악은 기름칠을 한 장막인데 비가 올 때 사용하는 것이고, 차일은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는 것이다.

전설사는 오로지 장막에 관련된 일에 한정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의외로 전설사는 사건 사고에 많이 휩쓸렸다.

전설사 관원에게는 단순히 장막을 관리하는 임무뿐 아니라 장막을 설치하는 임무도 있었다. 장막은 대개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사용했고, 큰 행사에는 고관대작이나 임금이 참석했다. 이 때문에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전설사 관원들은 몹시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특히 행사가 있는 날에 비가 내리게 되면 십중팔구 문책을 당하곤 했다. 비가 내리면 유악을 설치해야 하는데, 유악이 조금 오래되면 찢기거나 기름기가 날아가서 비가 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세조 13년(1468년) 8월 11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전설사 별제 강거정을 죄 주는 내용이 있다. 이날 비바람이 몹시 불자, 세조가 환관 안중경을 시켜 장막과 유악을 점검하게 했는데, 빗물이 새는 것이 많아 벌을 줬던 것이다.

사실, 유악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비가 올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도 않는 데다 기름칠을 아무리 잘해도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새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그저 보관만 해두고 수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유악에 바른 기름이 휘발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비와 바람이 동시에 몰아치는 날씨라면 웬만큼 잘 만든 유악이라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유악 관리에 늘 신경을 써야만 했지만, 전설사에 속한 일꾼은 고작 14명뿐이었다.

이 14명의 인원이 그 많은 장막과 유악을 제대로 관리하고 수선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전설사 관원들은 날씨가 좋기만 빌어야 했다. 그들이 바라는 좋은 날씨는 너무 맑아 해가 쨍쨍한 것도 아니고 비가 오는 것도 아닌 적당히 흐린 날이었다. 물론 바람이 불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날씨란 것이 하늘에 달린 조화이니, 결국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성종 6년(1475년) 9월 15일에는 전설사 관리를 국문하게 했는데, 이유가 황당했다. 성종이 광릉에 행차하는데 장막을 엉뚱한 곳에 설치한 것이다. 이날 날씨도 괜찮았고, 비도 내리지 않았지만 정말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일로 전설사 관리들이 모두 국문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필시 일꾼들에게 전달이 잘못되어 벌어진 일일 텐데, 그야말로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이렇듯 전설사 관원들은 날씨나 운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무리 잘해 봤자, 별다른 포상이 이뤄지는 곳도 아니었다. 또한 임무를 잘 수행해봤자 눈에 띄지도 않았고, 눈에 띄어봤자 잘못이나 지적받고 벌이나 받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 전설사 관원이 되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말하자면 전설사는 관원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는 대표적인 관청이었던 것이다.

# 유악 하나 때문에 졸지에 죄인이 된 전설사 관원들

조선의 정치사를 살피다 보면 전설사에서 관리하는 유악 때문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장막을 관리하는 전설사에 웬 정치 사건이냐고 의문을 가질 만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 벌어지는 곳이 바로 전설사였다. 그 정치 사건은 1680년에 남인 일파가 대거 축출된 경신환국인데,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680년 3월, 당시 집권당이던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이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그래서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油幄)을 내어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미 유악은 허적이 빌려간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심하게 분노하며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것)로 군권 책임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사실, 유악은 엄밀히 따지자면 군수물자였다. 이 때문에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유악이 필요할 때는 왕이 선처하여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다. 대개 고관대작들이 유악이 필요하면 전설사에 요청하여 빌려 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관행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이 관행을 문제 삼았다. 숙종은 군수물자인 유악을 왕의 허락도 없이 빌려 간 것을 두고 왕을 능멸하는 일이라며 분노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당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들에게 넘겨버린다. 훈련대장직은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서인 김철을, 수어사에는 서인 김익훈을 임명한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서인 김석주가 맡고 있었으므로 보직을 유임시켰는데, 이로써 서인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을 구실 삼아 일거에 정계 개편을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왕 남인들을 대거 몰아내기로 작정한 숙종은 남인들을 또 하나의 사건에 엮어버렸다. 이른바 ‘삼복의 변’과 남인을 엮어 대대적인 남인 숙청 작업을 감행했다.

서인이자 외척인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했던 것이다.

고변 내용을 살펴보면 허견과 삼복 형제들은 숙종이 즉위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또한 도체찰사부에 소속된 군대에 몇 차례에 걸쳐 특별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골자였다. 도체찰사부의 군대를 사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도체찰사였던 영의정 허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요소였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 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중앙 군영의 지휘권도 거의 남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인데, 허적의 유악남용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중앙 군영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한편, 허적의 아들 허견과 복창, 복선, 복평군 삼형제의 모반 행위에 대한 고변의 주요 내용이 도체찰사부의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역모에 연루되게 되었다. 그래서 허견과 삼복 형제뿐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 중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또한 고변자 정원로 역시 역모자의 하나로 지목받아 처형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대폭 등용되어 조정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처음에 단순히 유악남용사건에 불과했던 이 사건은 대대적인 남인 숙청으로 이어져 정권이 바뀌는 환국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대대적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관행대로 유악을 내줬던 전설사 관원들은 졸지에 엄청난 형벌을 받고 쫓겨나야만 했다. 아무 죄도 없었던 그들은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사건으로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죄인으로 전락해야만 했으니, 지독하게 재수가 없었던 셈이다.

작가

■ 용어설명 - 도체찰사(都體察使)

조선시대 의정이 맡은 임시관직. 왕의 명을 받아 할당된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해 다스렸다. 보통 1개 이상의 도(道)를 관할했고, 종사관이 휘하에 있었다. 도체찰사라는 직명은 고려 공민왕 때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면서 처음 등장했고 조선시대에 이러한 봉명출사(奉命出使) 체제가 계승됐다. 품계에 따라 정1품은 도체찰사, 종1품은 체찰사, 정2품은 도순찰사 등으로 부르다가 세조 때 품계와 관계없이 모두 순찰사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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