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손대범 칼럼 : 모든 것의 1쿼터 ① 3점슛 등장! 그때 그 분위기

손대범 2024. 1. 1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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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손대범 편집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농구야?” “이제 백도어 플레이 대신 3점슛만 노릴 게 분명해!” 3점슛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농구인들의 반응이다. 대한민국 농구인들의 반응이냐고? 그렇지 않다. 미국 농구인들의 반응이었다.

1979년 6월 21일 NBA가 구단주들로 구성된 이사회 투표를 통해 3점슛을 채택했을 때도, 1986년 4월 2일 미국 대학농구(NCAA)가 3점슛 도입을 결정했을 때도 단장과 감독 등 농구인들은 농구가 나쁜 쪽으로 바뀌게 될 것을 우려했다. 대한민국 농구 경기에서 3점슛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1985년이다. 과연 우리 농구인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3점슛의 등장

3점슛이 농구에 채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흥행을 위해서였다. 두 가지다. 첫째는 농구는 점수가 많이 나야 재밌는 스포츠다. 종종 감독들이 ‘수비 전략에서도 농구의 재미를 찾아달라’고 하지만, 그걸 즐기는 대중이 10명 중 몇이나 될까. 농구계는 멀리서 한 골을 넣으면 1점을 더 준다는, 경기에 새로운 ‘무기’이자 흥미 요소를 더함으로써 시선을 끌고자 했다. 두 번째는 흥미와 연결된다. 이전에도 중, 장거리에서 슛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플로어에 라인이 그려지고 ‘여기는 먼거리’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며 관중들에게는 일종의 ‘묘기’로 다가갔다.

지금이야 218cm의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NBA 보스턴 셀틱스), 213cm의 칼 앤써니 타운스(NBA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도 3점슛 2, 3개는 가볍게 넣는 시대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 시도이다 보니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NBA는 TV 중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3점슛이 처음 채택된 1979-1980시즌 NBA 파이널은 매직 존슨이 처음으로 결승에 올랐지만, 주관방송사 CBS는 녹화중계를 택했다. 시청률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재정난으로 매각 혹은 합병을 노리는 구단도 있었다. 한마디로 재미를 위해서 뭐든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같은 이유로 NBA보다 12년 먼저 이 3점슛을 시도한 리그가 있었다. NBA의 경쟁 리그였던 ABA가 1967년에 채택한 바있는데 당시 농구인들은 ‘농구의 홈런’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런데, 이조차도 처음은 아니었다. 1945년 2월 콜롬비아 대학을 중심으로 뉴욕 지역 대학팀들이 3점슛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연구 자료들은 훗날 3점슛 채택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농구인들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쇼’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이 지향했던 팀 농구와도 맞지 않는다고 봤다. 무엇보다 감독들은 ‘가까운 곳에서 시도하는 슛이 확률이 더 높다’는 기본 철학에 대치되는 것을 우려했다. 초창기 가장 적극적으로 3점슛을 택한 구단은 바로 1979-1980시즌의 샌디에이고 클리퍼스(현 LA 클리퍼스)였는데 경기당 6.6개를 던져 2.2개만을 넣었다. 성공률은 32.6%. 성공률도 떨어지고, 리바운드는 뺏기고 실점은 높다보니 성적(35승 47패)이 날 리가 없었다. 결국 작전을 고안했던 진 슈(Gene Shue) 감독은 시즌 후 짐을 쌌다.

진 슈 감독의 해고는 한동안 ‘3점슛 팀’ 등장에 걸림돌이 됐다. 1982년 우승팀 LA 레이커스, 1983년 우승팀 필라델피아 76ERS가 3점슛 시도가 가장 적은 팀이었다는 사실 역시 트랜드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농구 전술과 전략도 ‘승리팀’ 혹은 ‘성공한 팀’이 전파한 유행을 따라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제농구연맹(FIBA)은 1982년 무렵부터 3점슛 도입을 진지하게 논의했고 결국 이를 채택했다. 1984년 2월의 일이다. 1984년 2월 6일과 7일, 독일 뮌헨에서 FIBA 이사회가 열렸다. FIBA는 6.25m 거리에서 넣은 야투는 3점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것과 동시에 코트 길이도 세로 28m, 가로 15m로 조정됐다.

당시 한국에서는 조동재 대한민국농구협회 국제이사가 회의에 참석해 이 사실을 전했는데, 통신 수단이 열악했던 탓인지 국내에는 1주일 정도 지난 1984년 2월 15일에야 매일경제 등 매체를 통해 처음 보도됐다. 그러나 ‘3점슛 도입 시작!’을 외쳐도 바로 적용하기란 어렵다. 전 세계 체육관마다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3점슛 라인은 그해 여름 최종 승인을 받았고, 국내에서는 1985년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애초 10월 전국체전부터라는 말도 있었으나 국내는 1985년 4월 제22회 봄철 대학연맹전이 ‘3점슛 데뷔’로 결정됐다.

제1호 ‘3점짜리 슛’ 주인공은 김재득
1985년 봄철대학농구연맹전이 4월 5일 국민대체육관에서 개막했다. 경희대와 서울대의 남대부 D조 예선 경기에서 김재득은 우측 45도에서 역사적인 첫 3점슛을 성공시켰다. 당시 신문에는 ‘3점짜리 슛’이라고 표기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 공식 기록된 첫 3점슛이었다. 경희대는 83-39로 대승을 거두었다.

“3점슛이 도입된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 학교에서 부랴부랴 선을 만들고 코트를 정비했습니다. 저도 연습을 하긴 했죠. 그런데 실제로 경기장에 나가보니까 거리가 멀게 느껴지더라고요.” 김재득의 말이다. “사실 넣으려고 넣은 건 아니고, 얼떨결에 들어갔어요. 당시 서울대 전력도 강하지 않다보니 선수들도 부담을 안 갖고 볼만 잡으면 자신있게 던진 것도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날 열린 4경기에서 들어간 3점슛은 29개였다.

한양대는 중앙대를 꺾는 이변도 연출했는데 김영철은 3점슛 10개를 꽂는 기염을 토했다. 김재득은 이후 국민대 전에서 3점슛 5개를 넣으며 팀 승리(66-62)를 주도했다. 경희대에는 김재득만 있는 게 아니었다. 188cm의 손영기는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3점슛 8개를 넣으며 44점을 터트렸다. 그러나 유재학, 정덕화를 막지 못해 78-89로 패했다. 김재득은 경희대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입단했다. 프로 출범 직전 금융권 농구단이 해체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니폼을 벗었다.

현재 한국은행 부국장을 지내고 있는 그는 1985년 첫 대회 분위기를 이렇게 돌아봤다. “원래 한국 선수들은 멀리서도 곧잘 슛을 던지고 넣어왔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있었죠. 그런데 반응이 유독 좋았어요. 아무래도 멀리서 넣다보니 박수소리가 컸죠. 그런 것들이 선수들로 하여금 더 3점슛을 많이 던지게 한 요인 같습니다.”

3점슛 도입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제 세계적으로 3점슛은 레이업 같은 존재가 됐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시도하는 ‘딥 쓰리(deepthree)’ 혹은 ‘로고 샷(logo shot)’이 39년 전 4월 같은 큰 박수를 받고 있다. 데미언 릴라드(NBA 밀워키벅스), 트레이 영(NBA 애틀랜타 호크스) 등의 장기다. KBL에서는 변준형(상무), 전성현과 이정현(KBL 소노) 등이 환호를 끌어내는 주인공들이다. “지금 선수들과 경쟁하면 저는 농구도 못 했을 것 같습니다. 신체조건도 너무 좋고, 굉장히 잘 하지 않습니까? 저는 얼씬도 못했을 것 같네요. 재밌습니다. 하하.”

3점슛은 한국 농구의 자산?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3점슛 도입 소식이 국내에 들려왔을 때 한국 농구인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우선은 오래 전 메모했던 취재 수첩부터 열어봤다. 슛을 워낙 잘 넣어 ‘신사수’, ‘슛도사’라고 불렸던 이충희 전 감독은 작은 선수들에게 바람직한 변화였다고 회고했다. “개인적으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중국과 할 때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신장이 작은 선수들한테는 혜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슛 연습은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먼거리에서도 많이 던져왔으니까요.”

국내무대에서라면 모를까. 국제무대, 특히 아시아를 벗어난 세계무대에서 한국은 경쟁력이 없었다. 크고 기동력 좋은 장신들이 포진한 안쪽을 흔들기에는 신장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외곽슛은 우리에게 있어 상대 높이를 피해 던질 수 있는 좋은 무기라는 여론이 형성된 이유다.

현역 시절 뛰어난 슈터 중 하나로 손꼽혔던 이민현 전 조선대 감독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2점에서 1점 더 주는 것이니 ‘기왕이면 그걸로 넣어보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3점슛 연습을 하진 않았어요. 그러다가 라인을 안 밟고 던지는 연습을 했죠. 물어보니 3점슛 라인 밖에서 점프했다가 라인 안쪽으로 착지를 해도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 거까지 물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슛이 제법 잘 들어갔어요. 그래서 장내 아나운서 하시던 염철호 선생님이 ‘네 슛은 5점짜리다’라고 칭찬해주셨던 기억도 나는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3점슛의 위력이 생각보다 크진 않았음을 알게 됐다. “1985년 무렵이면 허재가 대표팀 막내로 합류했을 때였어요. 혈기왕성했죠. 이충희부터 허재까지 다들 외곽슛을 정말 잘 넣었는데, 이게 전반 10분 정도 지나면 상대에게 다 읽히더군요. 결국에는 3점슛이라고 해도 다들 상대가 간파하고 붙어버리니 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방열 전 대한민국농구협회 회장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발표가 날 당시에 로스엔젤레스에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농구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머지않아 큰 선수들이 더 유리해지겠구나’라고요. 3점슛 자체가 작은 선수들에게 기회라는 생각도 있었겠고, 우리도 무기를 갖게 됐다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FIBA 농구월드컵에서 보셨겠지만, 누구 하나 포지션 구분 없이 다 던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가 3점슛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3명이서 공 2개를 갖고 하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한 명은 리바운드를 잡고, 다른 2명이 3점슛을 던지는 방식이지요. 예를 들어 A가 3점슛을 던지면 골밑의 B가 리바운드를 잡아서 그 다음 차례인 C에게 패스를 해주고 3점슛 라인으로 이동합니다. 그 다음에는 C가 3점슛을 던지면 먼저 슛을 던진 A가 리바운드를 잡는 식이었죠. 이렇게 1분간 로테이션을 시킵니다. 이원우, 이충희 등이 이런 훈련의 대상자였습니다. 지금은 어떤 방식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효과를 봤던 방식이었습니다.” 방열 전 회장의 말이다.

그가 감독으로 이끈 현대전자에는 앞서 언급한 ‘슛도사’ 이충희가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전자 슈터’ 김현준이 있었다. 두 선수의 맞대결, 더 나아가 두 선수 소속팀인 현대와 삼성의 맞대결은 1980년대 최고의 농구 컨텐츠였다.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하기도 했던 두 팀의 만남에는 전술도 뒤따랐다. 서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한 경쟁도 볼거리였다.

다른 한편으로 3점슛은 감독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NBA가 처음 3점슛을 도입할 당시 감독들에게서 나온 우려와 비슷했다. ‘기아 왕조’를 이끌었고 KBL에서도 사상 첫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최인선 전 감독은 “선수들이 오빠부대 함성에 젖어들까 걱정을 했던 분위기도 있습니다”라고 돌아봤다. 평소 최인선 전 감독은 ‘동료들이 이해하는 슛’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던져야 할 때, 던지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해서 ‘난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동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슛은 허용하지 않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고려대학교 코칭스태프였던 박제영 전 수원대 감독이 했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선수들이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반응이었죠. 라인 밖에서 연습하는 선수들도 많았고요. 그런데 무리하게 노리는 슛은 당연히 정확도가 떨어졌죠. 그래서 착실하게 2점을 노리자는 주문도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괜찮아, 비긴 거나 마찬가지야”
‘3점짜리 슛’은 승부에 큰 묘미를 안겨준다. 2021년 1월 24일 인천도원체육관에서 있었던 WKBL 경기를 기억하는가. 우리은행과 신한은행 간의 경기는 2020~2021시즌 최고의 명승부로 남아있다. 종료 4.8초 전, 71-73으로 지고 있던 우리은행 위성우 감독은 “코너에서 3점슛 쏴버려. 어차피 연장가면 못 이겨”라며 선수들에게 3점슛 패턴을 지시했다.

한 명, 한 명 위치와 동작을 잡아주었던 이 작전의 종착역은 박혜진. 사이드라인에서 홍보람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건넨 박혜진은 스크린을 이용해 코너로 이동, 다시 패스를 받은 뒤 3점슛을 던졌다. 결과는 74-73.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그런데 만약 3점슛이 없었다면? 아마 위성우 감독이 이런 패턴을 그리지도 않았겠지만, 이 패턴대로 갔더라도 73-73. 동점이 되어 ‘위닝샷’과 ‘역전승’이 주는 짜릿함도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중계를 했던 내 목소리가 쉬어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동방생명의 국민 스타였던 성정아는 국민은행과의 경기를 돌아봤다. “그때 버저비터를 맞아 1점차로 졌어요. 3점슛을 맞았죠. 그런데 단장님께서 ‘우승한거나 마찬가지다’라고 격려를 해주시더라고요. 3점슛이 없었던 시절이라면 2점이니 동점으로 연장을 갔을 테니까요. 아마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격려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농구 최고의 3점슈터 중 하나인 이현중(NBL 일라와라 호크스)의 모친이기도 한 성정아는 당시 3점슛은 ‘이변 제조기’ 역할을 해냈다고 돌아봤다. 남자농구와 다르게 국제대회에서도 재미가 쏠쏠했다는 회고도 있었다. “1985년 8월에 미국 콜로라도에서 세계 청소년 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열렸어요. 제1회 대회였죠. 우리가 그때 소련이랑 붙어서 준우승을 했는데, 최경희 선배가 완전 돋보였어요. 3점슛 덕분에 경기가 더 잘 됐어요. 이금진 선배도 워낙 잘 넣다보니 이득을 봤죠. 우리가 그런 쪽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정아의 회고처럼 대한민국 여자 청소년대표팀은 승승장구했다. 연전연승 끝에 결승까지 갔고, 결승에서도 종료 3분 여전까지 75-74로 리드했다. 막판에는 상대도 다급해지자 3점슛 거리까지 쫓아 나와서 압박을 가했다. 결국 신장과 체력 열세로 준우승(75-80)에 그쳤지만 최경희, 신기화, 이금진, 성정아 등 영건들이 포진한 여자농구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대회로 평가된다.

이처럼 성정아는 3점슛이 경기를 재밌게 만들어준 요소라고 돌아봤다. “우리 시절에는 김영희 선배가 굉장히 위력적이었어요. 골밑에서 득점을 잘 올리셨죠. 그러다 3점슛 덕분에 단신들도 먼거리에서 슛을 더 던지고 넣다 보니 승부가 재밌게 흘러갔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배들은 3점슛을 따로 연습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이미 우리는 중, 장거리슛이 잘 들어갔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조선일보는 1985년 11월 23일 기사에서 ‘자로 잰 듯한 장거리포를 보유한 팀이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168cm의 변가선, 172cm의 박혜옥이 3점슛을 꽂아 넣은 덕분에 ‘만년 약체’ 외환은행이 강호 한국화장품이 패하는 이변도 있었다. 한국화장품은 2미터 빅맨 김영희(작고)가 스타로 주름잡던 팀이었다. 3점슛을 막기 위해 외곽까지 나가다보니 안쪽 공간 단속이 상대적으로 허술해지고, 역으로 안에서도 찬스가 많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신용보증기금에서 뛰었던 구정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슈터들이 등장했어요. 가운데 들어가서 밖으로 빼주는 식의 패턴도 늘어났죠. 3점슛을 선호하지 않는 감독님들도 있었지만, 효과가 입증되자 많이들 시도했죠. 국민은행 같은 팀이요”라고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점보시리즈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는데, 한동안 관중들이 3점슛에 굉장히 호응을 잘 해주셨어요. 신기해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저희는 다들 따로 연습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들 원래 잘 던졌거든요.”

쇼크를 안긴 88올림픽, 그 이후
앞서 농구인들의 회고처럼, 국제농구에서만큼은 남자농구와 여자농구 인물들이 느끼는 온도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여자농구는 특유의 아기자기함에 3점슛을 ‘무기’로 장착한 반면, 남자농구는 아시아 무대를 벗어난 세계대회에서는 힘들어했다. 3점슛이 기록된 최초의 올림픽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올림픽을 관전한 농구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190cm는 물론이고, 2m가 넘는 장신들도 손쉽게 3점슛을 던졌기 때문이다.

연세대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최희암 전 감독은 서울올림픽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하면서 ‘새로운 농구’를 경험했다고 돌아봤다. “미국은 승부를 겨룰 때만 3점슛을 사용했지만, 유럽은 이미 3점슛을 무기로 활용했습니다. 3점슛이 얼마나 활용도가 높은지를 잘 보여줬죠.” 방열 전 회장도 최근의 전화 취재에서 같은 말을 했다. “206cm의 오스카 슈미트(브라질), 201cm의 앤드류 게이즈(호주) 등은 장신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3점슛을 꽂았습니다. (아비다스)사보니스란 선수는 221cm인데 3점슛은 아니지만, 그 바로 앞 거리에서 슛을 넣더군요. 놀라웠죠.(훗날 사보니스는 3점슛까지 장착해 NBA에서도 40%대에 가까운 성공률을 기록했다.)”

세계 농구는 3점슛에 의하여 빠르게 변화했다. 골밑만 보던 장신들이 자유롭게 내외곽을 오가며 3점슛을 던졌고 이를 위한 전술도 만들어졌다. 2022년 올스타 위켄드에서 칼 앤써니 타운스는 ‘나는 하이브리드 센터’라며 3점슛 대회에 출전, 3점슛 컨테스트 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 올림픽 이후 34년이 지난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 농구가 제자리걸음만 한 것은 아니다. 이충희, 김현준 등 슈터들을 살리기 위한 스태거드 오펜스는 한국농구의 무기 중 하나였다. 더 많은 스크린과 움직임을 이용해 슛 찬스를 노렸다. 넣기도 참 잘 넣어 ‘양궁 농구’라는 별명도 생겼다. 다만 중국이나 다른 신장 좋은 나라들이 즉시 스위치를 해버리면서 우리를 위축시킨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한국농구의 경우, 프로가 출범하고 외국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슛 찬스를 만들기 위한 옵션이 더 늘어났다. 빅맨 유형의 외국선수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더블팀을 불러왔고 슈터들은 이를 통한 반사 이익을 누렸다. 스크린에 능한 빅맨들을 이용, 짜릿한 역전승도 일구었다.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슈터’로 명성을 떨쳐온 문경은과 우지원은 여전히 깨지지 않는 KBL 한 경기 최다 3점슛 성공(12개)을 갖고 있다(밀어주기 기록 제외). 김상식, 양희승, 조성원, 손규완, 조성민, 방성윤, 전성현 등은 근 20여 년간 배출된 슈터들이다.

종종 등장한 가드형 외국선수들도 좋은 교재가 됐다. 원주 DB에 2002-2003시즌 우승을 안긴 데이비드 잭슨도 그 중 하나였다. 전창진 감독은 “그동안에 프로에서는 못 보던 유형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팀에는 3점슛 던질 수 있는 선수가 신기성, 양경민 정도였기 때문에 3점슛을 많이 던지진 않았습니다. 슛 능력이 좋은 선수였습니다. 감각이 있었다고나 할까요”라고 잭슨을 회고했다.

전 감독은 20년 가까이 프로 감독 생활을 해오며 조성민 같은 슈터와 여러 드라마를 만들어왔다. KT 시절의 LG전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한 방으로 LG를 꺾은 경기는 타임아웃과 이후 패턴 수행, 슛 성공까지 이어지는 플롯이 가장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조성민 코치 같은 경우는 하체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기에 하체 강화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근휘처럼, 슈터들에게는 타고난 손끝 감각이 가장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비를 확실히 따돌리고 미트 아웃할 수 있는 움직임도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런 면에서 하체가 강조됐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2000-2001시즌 LG는 국내 프로농구 역사에서 보기 드문, 극단적인 외곽슛을 추구했던 팀 중 하나였다. 김태환 전 감독은 그 시기를 이렇게 돌아봤다. “저는 3점슛을 적극 장려해온 사람이었습니다. 3점슛 성공률이 40% 정도만 되어도 2점슛 60%만큼의 효과가 있을 것 같았죠. LG에 갔을 때 어떻게 하면 3점슛 찬스를 가장 잘 만들 수 있을지 연구했는데, 답은 빠른 템포였습니다. 골을 먹어도 인바운드 패스를 빨리 주고, 드리블이든 패스든 어떻게든 하프라인을 빠르게 넘어와서 아웃 넘버를 만들자. 그래서 1차적으로 슈팅을 노리는 농구를 선호했습니다. 조성원, 조우현, 이정래 등 우수한 슈터들을 모은 것도 이 때문이죠. 외국선수들도 슈팅이 능한 선수들을 포진시켰습니다.”

LG는 이 시즌에 11.4개의 3점슛을 넣었다. 성공률은 40.3%. 조성원은 MVP가 됐고 팀은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랐으나 우승은 거머쥐지 못했다. 그러나 최종 성적과 관계없이 한동안 LG는 역사상 가장 시원한 공격을 펼친 팀으로 기억되었다. LG가 넣은 3점슛 11.4개는 2022-2023시즌, 고양 캐롯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 시즌 최다 3점슛(평균)으로 남아있었다. 전성현과 이정현 등이 미친 듯 쏘아댄 캐롯은 지난 시즌 11.54개로 역대 1위 기록을 새로 썼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슈터들은 예전보다 더 빠르게, 많이 움직이며 더 빠른 슛 타이밍으로 3점슛을 성공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진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사이 농구의 페이스는 굉장히 빨라졌고 하나의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요구되는 기술과 몸싸움, 소모되는 체력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2024년 1월 12일 현재 이재도, 이정현, 패리스 배스를 비롯해 14명의 선수가 한 경기 3점슛 6개 이상을 최소 1회 이상 넣었다. 예전에도 3점슛 6개는 자주 나왔던 일이지만, 그동안에는 특정 선수에 몰려있다면 갈수록 다양한 이름이 순위표에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양궁농구 시대’의 재림이다. 빅맨들도 3점슛을 던지면서, 그리고 로고샷까지 등장하는 이 시점에서 3점슛은 더이상 한국의 무기가 아니다. 오히려 아시안게임에서조차 우리보다 잘 넣는 팀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3점슛은 우리가, 아니 아시아 농구선수들이 내세울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무기임은 분명하다. 호주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동시에 일본과 중국, 홍콩 등 다양한 나라에서 감독을 맡아온 브라이언 고지안은 한 농구 클리닉에서 이렇게 말했다. “슛을 던지는 과정이 더 간결해지고 빨라져야 합니다. 예전 같은 자세는 이제 통하지 않아요. NBA가 그렇게 변하고 세계 농구가 그렇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시아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더 작으니 더더욱 빨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고지안 감독의 그 메시지가 가장 잘 투영된 대회가 바로 2023년 FIBA 농구월드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본의 172cm 유키 카와무라가 핀란드의 장신 라우리 마카넨을 앞에 두고 던진 3점슛은 이 대회 일본의 성장세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여전히 농구는 신장이 큰 사람이 유리한 종목이지만, 그 큰 사람들과 대등하게 겨루고 급기야는 뛰어넘을 때 더 큰 환호가 나오는 종목이기도 하다.

3점슛이 처음 ‘3점짜리 슛’이라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단신의 비밀병기’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표현은 4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시작은 낯설었지만 신나게 던지던 그 3점슛,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랬듯이 그 3점슛을 하나의 ‘팀’으로서 더 잘 던지고 많이, 그리고 정확히 넣을 수 있도록 연구하고 노력하는 과정이 더 활발하게 이어진다면 농구는 더 재밌어질 것이다.

#사진_점프볼DB(유용우 기자), WKBL 제공, AP/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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