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9. 망명객 정현우가 보내는 그림엽서

김진형 2024. 1. 1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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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핀 소박한 기품…그의 세계에 스며들다
작가·음악카페 사장·문화기획
자유로운 일상 삶의 폭 넓혀
그림·글·악기 연주 독학 눈길
생계형 화가·디제이·음유시인
다양한 수식어 인생 길 가늠
SNS 그림 업로드 유명세 ‘인기’
은은한 색감 사용 아늑함 매력
그리움·친숙함 전달 팬층 확대
상실의 아픔 딛고 활동 재개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 발간
▲ 정현우 작가의 용 그림.

그의 집은 황토집이다. 이층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꽤나 넓다. 창을 통해 호수와 삼악산이 흐릿하게 내다보인다. 겨울비 내리는 창가 옆에다 그는 이젤을 세워놓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내가 방문한 날엔 검은 고양이가 캔버스에서 나를 맞이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 이따금 창가로 가 담배를 피워문다. 여기에선 아파트처럼 담배 피지 말라는 관리소의 방송을 들을 이유가 없다.

정현우에겐 다양한 이름의 명사가 따라붙는다. 그림을 그리니 화가이고, 그림에다 시를 적어놓으니 시인이다. 그 덕에 최근엔 시집 ‘초승달발톱꼬리왈라비’를 펴냈다. 이 꼬리표 같은 이름들은 아주 특별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그것은 그가 걸어온 이력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디제이, 생계형 화가, 음유시인(가수), 몽상가, 망명객, 노마드, 장돌뱅이, 무정부주의자, 심마니, 몽상건축가, 소행성에서 온 어린 왕자 등등. 이중 정현우는 자신을 화가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화가라는 이름 앞에 생계형을 붙여 자신을 ‘생계형 화가’라 불러달라고. 사람들이 정현우의 그림을 만나면 풍경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랬어. 이런 때가 있었어. 아, 그때, 꼭 그때를 그려냈군.

그의 그림엔 이야기가 있고, 그의 그림엔 시가 있고, 그의 그림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이 깃들어 있다. 아버지의 자전거, 기타를 안고 버스를 기다리는 악사, 정지용의 게으른 소 울음, 외딴집 창가에 걸린 조각달, 오이풀 숲에 언뜻언뜻 흐르는 가족의 앨범, 그리고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초상화가 노새의 걸음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서정문학이다. 소슬한 날들의 기적이 울려오듯 그의 그림엔 아련한 그리움이 낡은 영화필름처럼 전개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흑백영화가 천연색의 영화로 바뀐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갑자기 환희로 바뀌지는 않는다. 어쩌면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시인의 가슴에 스며들 것은 스며들기에 더욱 웅숭깊다.

▲ 정현우 작가의 화방

삽화 같은 이런 풍경의 풍경에다 사람들은 제가끔 자신을 투영시킨다. 먼 데서 온 엽서 같고, 어떤 속삭임 같고, 바람 같고, 저녁 굴뚝 연기 같고, 복동아 밥먹어라아~ 엄마 엄마, 메아리의 날들이 문득문득 아련히 소환된다.

정현우의 감성포로가 된 사람들은 기억의 앨범을 이 무명의 화가에게서 사 가기 시작했다. 그림은 페이스북을 통해 널리 팔려나갔다. 외국에서도 정현우의 그림은 인기였다. 그러나 정현우의 생활은 그저 물감 살 돈, 밥 먹을 돈, 사글세 낼 돈, 가난한 친구와 밥 한 끼 나눌 만한 돈이면 충분했다. 그림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림값을 높게 매기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그림을 아끼고 사랑만 해준다면 그것으로 그는 만족할 따름이다. 그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계속 그린다. 정현우의 그림은 의도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도되는 그림이다. 그렇게 저절로 그림을 그릴 때면 행복감이 충전된다. 요즘엔 놀랍게도 글씨가 독특해졌다. 흔히 보아오던 글씨가 아니다. 오직 그 글씨체는 정현우만의 글씨체로서 아름답다.

정현우 화가

나는 무엇보다 그것에 주목한다. 그러니까 그림만 보아도 정현우요 글씨만 보아도 단박 정현우이다. 이제 그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느낌이다. 게다가 글 또한 정현우의 문체로 확립되어 있다. 그러니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랴.

그는 동물을 자주 그린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우리가 늘 보아오고 쓰다듬고 밥을 주고 하는 것들이다. 또한 한해 12지의 동물 그림들을 자주 그린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그러다가 어느 땐 태양의 새 삼족오를 그리기도 했고, 어느 땐 먼 사막의 여우를 그리기도 했다.

도자기를 둥그렇게 그려놓고, 그것을 배경 삼아 미루나무가 쑥쑥 자라면, 바람이 오고 바람이 가고, 나무나 풀들이 휘어지고, 그렇게 가고 오다 보면, 어느 구석엔가 낮달이 동요처럼 걸려 있었다. 낮에 나온 반달 음표가 하늘에 떠 있을 때, 소는 게으른 울음을 울곤 했다. 그림 속엔 마음의 고향이 있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가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오게 될 때면, 사람들은 문득 아득해지곤 했다.

정현우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오래 머물고 싶은 그림이요, 이미 체화된 이야기가 그림으로 펼쳐진다. 색감은 진하지 않아 언제나 은은하고 아늑하다. 정현우의 그림은 그래서 평화롭다. 그를 무정부주의자요 보헤미안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 정현우 작가의 필기구

정현우는 늘 길 위에 있다. 고등학교 때 그는 그림이 그리고 싶어 미술반에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거추장스러운 학생 신분을 집어던졌다. 그때부터 기타 하나 달랑 들고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동가식서가숙이 그의 일상이 되었다. 남해바다 어느 카페에서 DJ를 했다. 때로는 기타를 뜯으며 노래도 불렀다. 방랑가인이 되어 떠도는 일이 그의 자유로운 일상이었다. 오직 음악의 선율만이 그의 길처럼 떠돌았다. 눈치가 좋아 문화기획 일도 곁눈으로 배웠다. 군 복무 후, 문화기획 사업과 여러 일을 하면서 돈도 모았다.

1980년대 어느 날 정현우가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소행성 B612’란 이름의 음악 카페를 차렸다. 시청 언덕길에 있었다. 나는 당시 친구 이외수의 소개로 정현우와 만났다. 그날 그는 임지훈과 노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음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 정현우가 보이지 않았다. 소행성B612란 먼 별에서 홀연히 나타난 어린 왕자. 정현우는 홀연히 어느 날 사라졌다.

그 후 나는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이 ‘대마초는 죄가 없다’였다. 저자가 정현우였다. 인문학 책을 펴낸 무명화가, 이 183쪽의 얇은 대마초 책은 알게 모르게 널리 읽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정현우와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페북을 권유했다. 그림을 팔아라. 당신의 엽서그림은 하나의 메아리가 될 것이다.

그로부터 정현우는 페북에다 그림을 그려 올리고 전시를 하기 시작했다. 정현우 팬들이 버섯처럼 자라나 정현우의 그림과 시를 사 모았다. 때로는 흐린 날이었고, 때로는 그리움이었고, 때로는 몽상이었다. 이 그림과 글은 중독성이 강했다. 수집한 팬들은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리고 팬들은 정현우의 그림을 또다시 기다렸다. 원시의 땅속에서 솟아 나올 한 장의 그림과 시를.

▲ 시화 ‘꽃과 밥’

정현우가 그림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 미술반에 든 게 전부였다. 그것도 몇 달 못 되어 그만두었다. 정식으로 글쓰기도 배운 적 없고, 음악을 배우거나 기타를 배운 적도 없다. 그저 자기 방식대로 그리고 쓰고 읽었다. 기타 치면 그저 즐거워하다 저절로 줄을 튕겨 노래했다. 그러면 그는 행복했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사람들은 정현우를 날것이라 부르고 정현우를 문학과 그림의 이방인이라 부른다. 정현우의 이 고독한 방랑은 현재 60이 넘도록 지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다가 한 화가를 만났다. 그니도 고독한 화가였고,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었고, 늘 자상하고 고왔다. 4년 동안 정현우와 화가는 서로 사랑했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고 정현우는 회고했다.

재작년 그니가 심정지로 쓰러져 이승을 하직했을 때, 정현우는 몇 달 동안 몸과 마음으로 울었다. 그림도 글도 노래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어느 날 정현우는 다시 붓을 쥐었다. 슬픔 뒤에 오는 고요와 담담함이 먼 곳을 응시하게 했다. 정현우는 오늘도 그린다. 쓰고, 읽고, 노래한다. 그의 가슴엔 이런 글귀가 강처럼 흐르고 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떠나보냄으로, 언젠가 다시 만나러 갑니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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