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뼈아픈 조언 “노 당선자, 미국과 충분히 협의한 뒤 방미하길”

박찬수 기자 2024. 1. 1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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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DJ 국정노트 ②
노무현 당선자와 첫 만남서 북한과 주변 강국 상세 설명
정상회담 실패 경험도 공유…국정 인수인계의 모범 사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당선자가 대선 나흘 만인 2002년 12월23일 청와대에서 국정 인수인계를 위한 첫 만남을 가졌다. 김 대통령은 북한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국 상황을 깨알같이 적은 노트를 갖고서 노 당선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2년 12월23일 오전 11시55분, 나흘 전 대통령선거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노무현 당선자가 청와대를 찾았다. 현직인 김대중 대통령과 국정 인수인계를 위한 협의를 위해서였다. 김 대통령은 본관 현관 앞까지 직접 내려와서 노 당선자를 맞았다. “5년 전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자인 나를 맞던 바로 그 자리였다. 노무현 당선자는 떠오르는 태양이고 나는 지는 해였다”고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 썼다.

두 사람은 오찬 장소인 2층 백악실에서 잠시 환담을 나눴다.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과 노 당선자 쪽의 이낙연 대변인이 배석했다. 그때 대변인이던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김 대통령께서 정상회담 얘기를 죽 하셨던 거로 기억한다. 북한 김정일, 미국의 조지 부시, 중국 장쩌민,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였던 거 같은데, 당신이 만났던 주요 정상들의 인간적인 특징이나 성격 이런 걸 말씀하셨다. 오직 대통령만이 알 수 있는 귀중한 얘기였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과 노 당선자는 배석자를 물리고 1시간30분 동안 단둘이서 오찬 회동을 가졌다. 회동이 끝난 뒤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이 출입기자들에게 한 브리핑은 간략했다. “두 분은 한 시간 반 동안 오찬을 하면서 말씀을 나눴다. 노 당선자는 대통령에게 많이 도와달라고 말씀하셨고 대통령은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두 분은 북한 핵 문제를 중심으로 국제관계에 관해 주로 말씀하셨다. 미·일·중·러·유럽연합(EU) 등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하셨다.”

대통령 당선자와 현직 대통령의 첫 만남이라 언론의 관심은 높았다. 그날 언론들은 모두 청와대 대변인 발표를 바탕으로 ‘김 대통령과 노 당선자가 정권 인수인계에 관해 폭넓게 협의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박선숙 대변인과 이낙연 대변인 모두 정확히 알지 못한 두 사람만의 깊은 대화가 있었다. 김 대통령은 그날 오찬을 위해 깨알 같은 한자로 국정노트에 노 당선자에게 전할 말을 썼다. 북한을 비롯해 한반도 주변 강국의 입장을 상세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김 대통령이 노무현 당선자와 회동을 앞두고 작성한 노트 첫 장. 한반도 주변국의 상황을 상세히 담고 있다.
노 당선자와 회동을 앞두고 작성한 노트 두번째 장. 미국과 충분히 사전협의한 뒤 방미하라는 조언이 눈길을 끈다.
노 당선자와 오찬을 앞두고 작성한 노트 세번째 장. 내정 문제에선 ‘노 당선자가 잘 아실 것’이라며 간략하게 언급했다.
< 노무현 당선자와의 오찬 > 2002.12.23

1. 축하. 노고와 승리에의 인사. 국민적 승리.
2. 후보 개인의 큰 성공. 국민 특히 젊은이의 힘 집결
3. 남북화해, 세대교대, 정의실현 위한 국민적 열망의 힘
4. 관권과 금권 개입 없는 공정선거

1. (인수인계) 정부는 최선 다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협력
2. (국정 마무리) 잘되도록 협력 바람

 - 주요 국정 현안 -

1. (국정 기조)
① 공식 기자회견에서 대북, 대미 그리고 경제정책 기조에 큰 변화 없다고 발언. 국제사회, 투자가들, 다수 국민의 긍정적 평가한 듯.

② (북한 입장)
 ⓐ 이라크전 전에 미국에 압력 가해 해결하고자 함
 ⓑ 대미 관계 개선 열망, 벼랑 끝 전술
 ⓒ 클린턴과 부시의 차이가 장벽
 ⓓ 전례 없이 약체화, 고립화
 ⓔ 세 가지 옵션- 전쟁, 경제압박, 대화로 해결
 ⓕ 김정일 총명. 약속 안 지키는 때 없어(요주의)

③ 미국의 입장
 ⓐ 이라크전 끝내놓고 본격적으로 다룬다는 계획?
 ⓑ 부시가 혐오하는 5인(카스트로, 차베스, 아라파트, 후세인, 김정일-국민은 아사하는데 군비만 확충)
 ⓒ 안보리 갈 가능성(폐연료봉 봉인 제거시)
 ⓓ 북과의 대화 의지 부족
 ⓔ 한국 대선이 부시에 영향 줄 것
 ⓕ 부시의 양분적 사고 – 선이냐 악이냐
 ⓖ 방미 전 충분한 사전합의 필요(나의 작년 5월 방문 경험)
 ⓗ 최후 점검 – 명년 1~2월의 이라크전 보고 할 것
 ⓘ 대미 외교의 초점 – 북과의 직접 대화에 나서도록 할 것
 ⓙ SOFA – 개선 후, 타국 사례 충분 검토해서 개정 논의

④ 중국 입장 
 ① 한반도 평화 희망, 비핵화 입장 확실(한·일의 핵 보유 우려)
 ② 강 주석 등 중국 지도자들 김정일의 정책 불호
 ③ 김정일도 중국에 호의 많지 않은 듯
 ④ 한국과의 국가이익 – 북한보다 훨씬 크다, 우리의 제1 수출국
 ⑤ 중국과의 경협 - 기회이자 위기
 ⑥ 중국의 대미 자세 – 경제 대만 일본

⑤ 러시아의 입장 
 ⓐ 푸틴의 극동 중시, 6자 회의체 바래
 ⓑ TSR과 TKR의 연결에 열성
 ⓒ 북과의 우호 관계 그러나 실제 지원노력 부족
 ⓓ 중국과 협력 -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주장
 ⓔ 미국에 대해 북한 대변하는 입장
 ⓕ 한국에 대해서도 중요시(철도, 경협, 무기 등)

⑥ 일본의 입장 
 ⓐ 일본 국민의 대한국 감정 호전
 ⓑ 북한에 경계(미사일 사정권 내), 혐오(납치, 간첩)
 ⓒ 소천(고이즈미) 수상 – 북과의 관계개선 소망(국민여론 60%지지)
 ⓓ 미국에 대해서는 대북 평화적 해결 설득(대미 공조틀)
 ⓔ 투자협정, 관광객 등 국익도 크다

⑦ EU의 입장 
 ⓐ 한반도 평화에 관심 크다
 ⓑ KEDO 통해 대북지원 계속
 ⓒ 스스로의 역할 한계성 인정
 ⓓ 북은 EU 활용에 열성

 - 내정 문제 - 
① 당선자가 잘 알고 계실 것
② 장·차관, 수석 등 언제든지 설명드릴 것

현직 대통령과 당선자의 만남은 서로 축하와 덕담을 나누고 권력 인수인계에 관한 협력을 다짐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노트를 보면, 김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 만남을 단순한 의례적 행사로 생각하지 않았다. 현안인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입장을 최대한 자세하게 후임 대통령에게 설명하는 자리로 생각했다. 말 그대로 현직과 차기 대통령 간에 바람직한 인수인계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속실장을 지낸 김한정씨(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는 “김 대통령은 당선자와의 회동을 의례적 행사로 여기지 않았다. 회동 전에 청와대 수석비서관실과 통일부·외교부 등 관련 부처 보고를 다 받고서 그걸 토대로 자기 생각을 직접 노트에 정리했다. 디제이는 현직 대통령이 가진 국정 경험을 최대한 후임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국정노트를 보면, 김 대통령은 국내 현안에 대해선 ‘노무현 당선자가 잘 아실 것이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장·차관이나 수석비서관에게 설명을 요청하시라’고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그 대신 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연합까지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는 강대국들의 인식을 ‘대통령 김대중’의 시각으로 자세히 정리했다.

김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선 ‘대미 관계 개선을 열망하지만 벼랑 끝 전술을 펴고 있으며 전례 없이 고립화하고 있다’고 봤다. 북한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선 ‘총명하고 약속을 안 지키지 않는다’고 평가했지만 ‘요주의’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 부분을 민감하게 다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북 햇볕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던 빌 클린턴 전임 행정부와 달리,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 정권과 김정일을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다. 디제이(DJ)는 국정노트에 ‘부시가 혐오하는 5인. 카스트로, 차베스, 아라파트, 후세인, 김정일’이라 적고, 김정일 위원장엔 ‘국민은 아사하는데 군비만 확충’이라고 이유를 적었다. 이렇게 국제 관계를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부시의 인식이 북-미 관계를 푸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김 대통령은 봤다.

미국에 관해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김 대통령 자신의 한-미 정상회담 실패 경험을 솔직하게 언급하며 노 당선자에게 ‘방미하기 전에 충분한 사전 합의를 하라’고 조언한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01년 3월 서둘러 워싱턴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을 했다. 네오콘(신보수주의) 시각을 가진 부시를 하루라도 빨리 설득해서 북-미 대화를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역대 한-미 정상회담 중 대표적인 실패 사례의 하나로 꼽힌다. 김 대통령은 텍사스 카우보이 같은 부시의 스타일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부시는 김 대통령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끊고 들어와 큰 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정상회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선 김 대통령을 ‘디스 맨(This man)’이라 지칭하고, “북한 지도자에 약간의 회의감(some skepticism)을 갖고 있다”고 말해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디제이는 그때는 꾹 참았지만, 부시의 정상회담 태도와 발언이 “불쾌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노 당선자에게 ‘나의 작년(2001년) 5월 방문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조언한 이유다. 여기서 ‘5월’은 ‘3월’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 지도자들이 김정일 위원장의 정책을 좋게 생각하지 않고 북한도 중국에 호의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경제 측면에서 중국의 국가이익은 북한보다 한국이 훨씬 크며, 대중 경제교류는 우리에게 기회이자 위기라고 밝혔다.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시하는 건, 경제-대만-일본 문제 순이라는 김 대통령 분석은 눈길을 끈다.

유럽연합 입장까지 노무현 당선자에게 설명한 점도 흥미롭다. 그 이유를 ‘유럽은 한반도 평화에 관심이 많고, 북한은 유럽연합을 활용하는 데 열성이기 때문’이라고 노트에서 밝혔다. 김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서 노무현 당선자와의 이날 만남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노 당선자에게 북핵 문제 등 현안에 대해서 성심껏 설명했다. 당선자는 햇볕정책을 지속하겠다고 다짐했다.”

2002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뒤 노 대통령이 김대중 전임 대통령을 배웅하러 함께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그는 해박한 지식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지혜까지 가진 특별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국회 사진기자단

노 당선자는 이 회동을 특별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김 대통령에 대해선 이렇게 높게 평가했다. “김 대통령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였다. … 무엇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지도자였다. 청와대에 계실 때 큰 방 하나가 통째로 서고였다. 그냥 민주 투사가 아니고 사상가였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끊임없이 지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지식을 전략적으로 요령 있게 활용하는 지혜까지 지닌 특별한 지도자였다.” (2010년 출간된 자서전 ‘운명이다’)

만약 후임 대통령이 노무현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날 디제이는 상세하게 국정을 인수인계했을까. 김한정 의원은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김 대통령은 항상 한반도 정세의 엄중함을 염두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기에, 누가 당선됐더라도 자신의 정상회담 경험 등을 상세하게 넘겨주려 하셨을 것이다. 그래야 후임자가 상황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물론 후임 대통령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박찬수 대기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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