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송국 첫 아나운서부터 이름 적은 병풍… 내 이름도 들어있다

유석재 기자 2024. 1.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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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35] 아나운서 이계진
이계진 전 KBS 아나운서가 경기 광주 곤지암 자택에서 ‘언어 문화 선도’의 자긍심을 지켜 준 국어사전을 들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백자는 2003년 아나운서 30주년을 맞아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 제목을 빼곡히 적어 만들었다. /장련성 기자

‘어쩌면 말을 저렇게 또박또박 교양 있게 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촌놈도 노력하면 되는 걸까?’ 1950년대 자유당 시절, 강원도 원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라던 소년 이계진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아나운서들의 말솜씨와 품격에 푹 빠졌다. ‘배운 어법대로 언어를 구사하면 아름답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고, 고려대 국문과를 다니며 방송 클럽(동아리)을 하면서 점점 꿈이 커졌다.

12월 26일 오전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서 이계진 전 아나운서가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 장련성 기자

‘국민 아나운서’로 불렸으며 17·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계진(78)씨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의 자택 거실을 박물관 방처럼 꾸며 놓고 있다. 온갖 방송 자료와 사진, 초상화, 기사 스크랩, 도자기와 다구(茶具)가 그곳에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 그는 ‘KBS’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인 낡은 국어사전 한 권을 꺼내들었다. “방송국에서 이걸 들고 다니면서 수도 없이 찾아봤죠.”

언어 문화 선도한다는 자긍심 있었다

1973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 뒤 국어사전은 그의 동반자와도 같았다. 1961년 출간된 이희승 편(編) 민중서관 국어사전이다. “남들과 똑같이 말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아나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은 언어 문화를 선도한다는 자긍심이었다. 그러자면 말의 정확한 의미와 발음을 알아야 했다.

정확한 발음을 공부하기 위해 지니고 다녔던 1961년 이희승 편 국어사전. /장련성 기자

당시만 해도 아나운서 선배들은 말의 장단(長短)을 철저히 교육했다. 예를 들어 경제 뉴스를 말할 때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온다’고 할 때의 차관(借款)은 ‘장·차관을 새로 임명했다’고 할 때의 차관(次官)과 발음이 달랐다. 앞의 차관은 ‘차-관’이라고 길게 발음해야 했고, 뒤의 차관은 ‘차관’이라고 짧게 말해야 했다. ‘정-직’은 정직(正直)한 것이지만 ‘정직’은 정직(停職), 즉 벌을 주는 것이다. 그는 “장단음 구별이 사라지면서 우리말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 지갑도 열게 한 화술

그는 사람들의 이름만 가득 적힌 병풍을 지니고 있다. 광복 이전 경성방송국(JODK)의 이옥경 아나운서부터 시작해 김영팔, 이혜구, 이하윤, 이석훈 등 초창기 방송사(史)에 등장하는 아나운서들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다. 명단의 제목은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실을 빛낸 사람들’이다. 병풍 두 번째 칸 중간 아래쯤에 ‘이계진’의 이름도 있다. “지금도 KBS에 있을 ‘아나운서 족보’의 영인본”이라고 했다. 그냥 방송인이 아니라 역사 속 계보를 잇는 아나운서라는 것이다.

이계진씨가 지닌 역대 KBS 아나운서들의 이름을 한자로 적은 병풍. 그의 이름도 보인다(붉은 선 안). /장련성 기자

이계진이 시청자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입사 10년쯤 지난 뒤였다. 1980년대 초 유명인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심야 토크쇼 ‘11시에 만납시다’의 진행을 맡았다. 이어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를 맡으며 ‘아나운서가 해도 재미있게 진행하는구나’란 인식을 심어 줬다. ‘그러시면 안 되죠’라는 원래 대사를 “그러시면~ 되겠습니까?”라고 비트는 식이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살짝 파격을 주는 일탈을 했던 겁니다.” 당시만 해도 ‘아나운서가 저래도 되나?’란 걱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후 ‘사랑의 리퀘스트’ ‘연예가 중계’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까지 맡으며 종횡무진 활동했다. 일주일에 5~6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아침·낮·저녁으로 TV와 라디오 생방송을 맡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KBS 봉급은 똑같았어요. 프로그램당 분장비 1000원씩 더 받은 게 다였습니다.” 1994년 프리랜서 선언 뒤엔 동시에 방송 3사에 출연해 ‘이계진 삼국(三局) 통일’이란 말까지 나왔다.

출연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진행은 그의 큰 미덕이었다. 그 비결은 ‘내가 듣고 싶은 것 대신 상대방의 입장에서 질문을 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그의 권유에 넘어가 즉석에서 “자, 보세요!”라며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봤다. 만원짜리 몇 장밖에 없어 다들 깜짝 놀랐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정말 큰 공부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방송은 종합대학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정치인보다 아나운서가 자랑스럽다

도자기를 좋아하는 이계진에게 정말 잊지 못할 백자 항아리가 하나 있다. 2003년 아나운서 30주년을 맞아 그 동안 맡았던 프로그램의 제목을 세로로 써 내려갔다. 도자기를 빙 둘러 ‘콜사인’부터 ‘배구중계 등’까지 40여 개를 적었더니 남는 자리 없이 꼭 맞았다고 한다.

그것을 제작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치권의 러브콜을 계속 거절하던 이계진은 노무현 정부 들어 새로 임명된 KBS 사장으로부터 ‘왜 한나라당 성향 방송을 하느냐’는 압력을 받았다. ‘나는 국가와 사회의 정의, 청소년의 미래를 위해 말했을 뿐인데 무슨!’ 방송을 그만두고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했다.

아나운서 이계진 자택 거실에 전시한 그의 과거 자료들. /장련성 기자

국회의원 재직 도중 초선 의원의 비애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다른 의원의 연설을 들을 때 ‘포말 피해감(침 튀김), 무한 주시 긴장감, 후면 기습 망상증, 목 디스크 불안증’ 등을 겪는 데 비해 맨 뒤에 앉은 5선 의원은 ‘성취감, 여유감, 전방 주시 편의감’ 등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는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국어기본법을 통과시키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재지정한 것을 가장 의미 있는 성과로 기억했다. 하지만 “투쟁 일변도인 한국 정치엔 유머가 통하지 않더라”며 “보람은 있었지만 내 길은 아니었다”고 했다. “지금은 아나운서였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정치를 그만둔 뒤 방송 이곳저곳에서 다시 프로그램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많았지만 자제했고, 라디오 프로그램만 하나 맡았다. “좋은 세월 다 보냈으니 처신을 잘해야지요. 아나운서의 고향은 어디까지나 라디오라고 생각했습니다. TV는 짜인 대로 방송을 해야 하지만, 라디오는 아나운서의 단독 리사이틀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요즘엔 ‘인생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방송사의 제의가 왔는데, 그는 이렇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저는 큰 병에 걸리거나 사기를 당한 일이 없고, 아직 이혼도 안 했어요. 한 10년 지나도 제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때 출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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