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이름 때문에 멸종 위기에 처한 히틀러 딱정벌레

박건형 기자 2024. 1. 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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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발견돼 히틀러에게 헌정, 나치 수집가들 때문에 몸값 치솟아
식물학자 린네 학명 체계로 수많은 사람 이름이 동식물 학명에 붙어
독재자, 인종주의자, 학살자 등 이름 삭제 여부로 과학계 논란 가열
일러스트=이철원

스위스 바젤 자연사박물관에는 100년 가까이 된 딱정벌레 표본이 한 점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 곤충은 1932년 오스트리아 아마추어 곤충학자 블라디미르 코드릭이 슬로베니아 페켈 동굴에서 발견했다. 코드릭에게 이 딱정벌레를 받은 엔지니어 오스카어 샤이벨은 이전에 발견된 적 없는 종(種)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1937년 베를린에 “존경의 표현으로 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바칩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샤이벨이 붙인 딱정벌레 이름은 아놉탈무스 히틀러리(Anophthalmus hitleri). ‘딱정벌레 차’로 불리는 폴크스바겐 비틀을 처음 구상한 히틀러 입장에서는 최고의 찬사였다.

‘눈 없는 히틀러’라는 별명의 히틀러 딱정벌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라는 서식지에서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를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사람들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는 곤충이다. 혐오의 대상만인 것도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히틀러 딱정벌레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나치 기념품 수집가들이 이 딱정벌레 수집에 열을 올리며 몸값이 2000달러까지 치솟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권력에 아첨하려 붙인 이름이 지구 상에 수십만년 살아온 한 딱정벌레 종의 운명을 바꿨다.

히틀러 딱정벌레

히틀러 딱정벌레라는 이름이 오랜 논란에도 바뀌지 않은 이유는 17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물학자 칼 린네는 저서 ‘자연의 체계’에서 헤라클레스 장수풍뎅이를 소개하며 새로운 학명(學名) 체계를 제안했다. 생물의 속명과 종소명을 라틴어로 나란히 쓰는 방식이다. 인간의 경우 호모(속명) 사피엔스(종소명)가 된다. 린네 분류법은 해당 생물의 계통을 라벨을 붙인 듯 보여주는 특징 때문에 생물학의 혁명이 됐다. 같은 생물이라도 언어와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지만, 학명은 하나뿐이다. 첫 명명자는 선취권이라는 절대적 권리를 갖는다. 하루라도 늦게 발표하면 후행이명(junior synonym)이라고 불리며 폐기된다. 린네는 학명에 명명자가 자신의 이름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헤라클라스 장수풍뎅이를 비롯한 동식물 수백종에 린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자 과학계는 본인의 이름을 학명에 넣는 것을 금지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존경이나 사랑, 경멸이나 조롱의 뜻을 담아 생명체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 과학자를 비롯해 정치인, 예술가, 연예인 등 셀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생물의 학명에 새겨졌다. 히틀러 딱정벌레처럼 비판받는 사례도 많다. 독재자 무솔리니의 이름을 딴 나방 히팝타 무솔리니, 노예 무역상 조지 히버트에서 비롯된 호주 꽃 히버티아, 독일 장교 프리드리히 폰 베링게가 학살했던 고릴라 베링게이 등이 대표적이다. 명백한 학문적 오류가 있지 않은 이상 한 번 붙은 이름은 바꿀 수 없는 원칙이 만든 결과물이다.

2020년 미국 내 새의 영어 이름을 결정하는 조류학회에는 “많은 새의 이름이 억압, 노예제, 대량 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담고 있다”는 청원이 접수됐다. 지난해 11월 학회는 사람을 기리는 모든 새 이름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름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지켜야 한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학회는 “새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면, 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학명 체계에서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안에 대한 논란도 격화되고 있다. 국제학술지 ‘린네 학회 동물학 저널’에는 “문화적 이유로 학명을 변경하면 생물 다양성 연구에 심각한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과 “사람의 이름은 생물체와 직접적 연관이 없기 때문에 혼란은 과도하고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반박 글이 잇따라 실렸다. 250년 넘는 체계의 변경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 없으니 히틀러 딱정벌레가 멸종 전에 구원의 기회를 얻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생물학자 스티븐 허드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에 깊이 자리 잡은 행위”라고 했다. 그는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임무가 세상의 모든 생물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런 인간의 본능이 트럼프 이름을 붙인 나방 네오팔라 도널드트럼피, 오바마에게 헌정된 거미 아프토스티쿠스 버락오바마이가 비난받는 정당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학문적 전통과 윤리적 진보 가운데 과학자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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